교양   시간을 걷다, 모던 서울

경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세종로, 광화문) → 서울역사박물관(새문안로, 경희궁)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칠패로, 충정로역)


 

오랜 세월 이미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시간과 기억들은

오늘날 공원과 박물관이라는 문화적 기억공간으로

다시 호출돼,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의미와 함께 우리와 마주한다는 것을

이곳  박물관들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서울을 역사적인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걸어보고자 하는 데는 조금 다른 ‘걷기’의 의도를 품고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 속, 화려한 성장뿐 아니라 식민과 분단이라는 사회적 조건 아래 억압된 기억을 불러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고민도 전제돼 있다.
본격적인 서울 나들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울의 기념관과 박물관을 통해서 기억의 전승을 둘러싼 공간의 정치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곳들은 전시 공간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이지만, 그곳에서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바로 그곳이 서 있는 자리와 거기에 박물관으로서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중층적 의미
첫 방문지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세종로에 있다. ‘국가의 기억’을 주조하는 이곳은 사회적 인식의 변화보다 정부의 입장을 발 빠르게 ‘공공의 기억’ 차원에서 받아들이도록 하는 ‘기억의 정치’가 민감하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그런 대표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개관 직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내용적인 측면은 물론 조성 과정의 비민주성과 비전문성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계속된 피드백과 더불어 정권이 교체되면서 2020년, 박물관은 상설 전시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전과 달리 새 전시는 정부의 실적을 홍보하기보다 현재의 한국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를 담는 것에 주력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제주 4·3 및 여순사건과 함께 배치하고, 정부 수립 과정을 북의 정부 수립 과정과 나란히 보여주는 방식은 이전의 상설 전시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다시 시간이 흘러 겨우 한 구석에 자리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은 정부가 바뀌고 다시 개편된 전시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췄다. 2022년 하반기, 분단과 전쟁을 다루는 전시는 긴 세월 우리에게 익숙했던, 남북의 적대적 대결과 편 가르기를 자극하는 냉전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내용으로 전면 교체됐다. 새 정권의 기조에 충실하게 교체된 전시는 이 박물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자 문화적 프로파간다의 주요 장치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우리는 집단이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승하려고 하는가, 어디까지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기억의 테두리를 형성하려고 하는가가 국가의 정치적 앞날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그들의 향방, 또는 우리의 향방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지금 박물관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가의 기억, 국민의 기억을 넘어 시민의 기억으로 미래를 만들어 갈 장소가 되도록 하려면 그 힘겨루기의 장에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성찰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수도와 로컬리티
광화문광장을 지나 서대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새문안교회 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경희궁지에 터를 잡은 서울역사박물관을 만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도시박물관’을 표방하며 개관했다.
일반적으로 도시박물관의 건립은 도시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에 도시 유산의 보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오고 가며 만들어진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서울의 경우, 처음에는 도시의 물리적인 개발 자체보다는 86서울아시안게임이나 88서울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 개최를 앞두고 도시의 위상을 제고하자는 목적에서 박물관 건립 논의가 제기됐다. 다행히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지배권력의 유산을 중심으로 권위적 거대서사와 국가를 강조하는 방식의 관점이 오히려 서울이라는 도시를 보여주기에 한계가 있다는 견해가 주를 이루게 됐다.
이에 따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갖는 환경과 역사,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문화와 같은 것들이 서울역사박물관의 기본적인 전시 골격으로 자리잡게 됐다. 즉, 조선의 수도,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틀을 넘어 서울이라는 도시의 로컬리티(locality)를 담은 역사박물관으로서의 성격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곳의 전시는 조선부터 해방 이후까지 시대순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변천에 따라 서울의 핵심 공간과 골격, 경관과 쓰임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구체적인 형태를 통해서 이해하기에 좋다는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관람을 통해, 한 사회의 성격이 변하면 도시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 나아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와 풍경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도시학의 아이디어를 느껴볼 수 있어 좋다.
서울이 단지 통치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은 다양한 전시를 통해 재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지 운종가 시전(市廛)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나 박태원의 장편소설『천변풍경』(1936~1937)의 장면으로 일제강점기 서울 사람들의 생활 공간을 보여주는 전시는 벽면 패널 전시만으로는 와 닿지 않던 과거의 생동감 있는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해주어 흥미롭다. 무엇보다 박완서의 장편소설『목마른 계절』(1978)을 애니메이션화해서 해방부터 한국전쟁기까지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이 겪었던 격동과 아픔을 보여주는 전시는 한정된 서술로 이미지화했던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이끌어 인상적이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애도와 성찰
서울역사박물관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15분 안에 서소문역사공원에 도착한다. 빌딩 숲 사이에서 만난 너른 잔디공원에는 망나니들이 형을 집행하기 전에 칼을 씻었다는 우물인 ‘뚜께우물 터’, ‘노숙자 예수상’, 처형당한 천주교인을 기리는 ‘순교자 현양탑’ 등 여러 기념물이 곳곳에 있다.
기념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공원과 박물관이 자리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공식적인 참형장이었다. 특히 1800년대 이후부터 이곳은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이들로 여겨진 천주교도의 처형이 이뤄진 장소였다. 천주교인은 물론, 임오군란의 주동자 원갑식,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김개남 등이 효수된 곳이기도 하다.
지하 1층, 진입광장에 들어서면 청동으로 만든 조형물인「순교자의 칼」과 박물관 입구 바로 옆, 시멘트로 만든 「수난자의 머리」가 보인다. 순교자의 칼은 조선시대 죄인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화한 설치물이다. 그것은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던 의로운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려는 의도를 가진 작품인데, 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치솟는 형태는 그들의 기개를 상징한다. 수난자의 머리는 식민의 유산을 떠안은 채로 다시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의미하는 조형물이다.
지하 3층의 ‘콘솔레이션홀’은 위로와 위안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다섯 성인의 유해함이 있는 야트막한 단과 넓은 공간의 상단부를 둘러싼 4면의 벽으로 돼 있다. 고구려 무용총의 내부 구조에 모티브를 두고 만들었다는 그곳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영상은 견고한 시멘트에 한 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지며 스며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다양성이 수용되지 않았던 조선 후기의 경직성, 그럼에도 싹텄던 새로운 사회를 향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 개의 상설전시실 사이에는 “한 사회에는 다양한 사상과 신념이 존재합니다”라는 메시지 전시물이 놓여 있다. 「순교자의 칼」과「수난자의 머리」가 박물관의 여는 말이었다면 이 메시지 전시물은 박물관의 닫는 말과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는 “다양한 사상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며, 때로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타인의 다른 생각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만 그 다른 생각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상설전시, 특별전시가 매번 성격을 달리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서소문 밖 네거리 옆으로는 경의선 철로가 놓였다. 번화하던 곳은 주변으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일제 도시계획에 따라 서소문과 인근 성곽이 철거됐다.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성은 그렇게 차차 잊히고 1966년에 고가차로가 건설되면서 이 일대는 통과지대로만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공간이 품은 역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이미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시간과 기억들은 오늘날 공원과 박물관이라는 문화적 기억공간으로 다시 호출돼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의미와 함께 우리와 마주한다는 것을, 이곳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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