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지난 10회(‘19세기의 감염병’ 콜레라와 제국주의)에서 언급했듯이, 1817년에 인도 콜카타 인근에서 시작돼 1823∼1826년까지 이어진 제1차 콜레라 팬데믹은 동쪽으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서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아프리카 동해 지역까지 확산했다. 당시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중근동은 콜레라의 습격을 받았지만, 러시아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유럽 본토에는 상륙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유럽은 이러한 차이를 ‘문명’과 ‘야만’의 대비로 파악했다. ‘야만의 땅 중근동/아시아’에서 유행하는 콜레라가 ‘문명의 땅 유럽’을 위협할 리 없다고 믿은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문명’과 ‘야만’의 ‘야만적인’ 대비는 19세기 말에 ‘문명국’의 대열에 오른 제국 일본이 답습해 한국 침탈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콜레라에 관한 한 유럽의 오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826∼1829년에 다시 인도에서 시작된 제2차 팬데믹이 강 건너 불구경하던 유럽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를 침입한 콜레라는 1830년 9월에 모스크바에 입성한 후 북서쪽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북유럽(헬싱키)을, 남서쪽으로는 동유럽을 진격했다. 마침 그해 폴란드에서 일어난 ‘11월 봉기’의 진압을 위해 러시아군이 파견된 것이 콜레라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1831년 “4월 1일, [폴란드] 시에들체(Siedlce)의 러시아군 야전병원이 콜레라 환자로 가득” 찼고, 4월 19∼20일 바르샤바에 발생한 콜레라는 “간선 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서유럽의 관점에서 폴란드는 ‘러시아(아시아)-콜레라-야만’에 용맹하게 맞서는 ‘문명’의 최전선이었지만, 전선이 무너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류가 감염병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공헌한

근대적 공중위생과 역학은 콜레라의 유행을 계기로 탄생했다.

그런데 그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콜레라를 전 세계로 퍼뜨린 영국이다.
병 주고 약 주며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더욱 강화한 형국이다.

 


‘문명’의 땅을 휩쓴 콜레라 ‘쓰나미’
1831년 10월 26일, 선덜랜드(Sunderland)에 영국 최초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사망했다. 당시 영국 언론은 “영국에 역병이 침입한 것은 런던 대화재(1666) 이후 처음”이며 “선덜랜드 세관 당국의 범죄적인 태만이 원인”이라고 평했는데, 실제 영국은 빠르게 밀려오는 콜레라의 ‘쓰나미’를 인지하면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검역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32년 2월에 ‘문명의 수도’ 런던이 침범되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이 유행으로 런던에서 7천여 명이 사망했고, 1866년까지 약 4만 명, 같은 시기 영국 전역에서는 약 14만 명이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된다. 빠른 전파 속도와 높은 치명률에 더해, 14∼17세기에 유럽을 반복해서 피폐화한 페스트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콜레라의 충격은 증강됐다. 어떻게 ‘문명’의 땅에서 콜레라가 이토록 활개 칠 수 있었을까?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당대 유럽은 인구의 도시 편중이 가속화됐기 때문에 인구 과밀화, 주거 및 생활 환경 악화, 환경오염의 심각화 등 도시문제가 만연했고, 도로와 상하수도 같은 인프라도 크게 부족했다. 1750년에 약 70만이었던 런던의 인구는 1850년에는 200만을 넘을 정도로 급증했고, 파리, 베를린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도시 인구도 19세기 전반 반세기 동안 2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1810년에 수세식 화장실이 발명됐지만, 정화설비가 따로 없었기에 화장실과 부엌에서 발생하는 하수가 강으로 흘러들었다. 런던의 템스강은 지독한 악취로 유명했는데, 이를 견디지 못한 국회의원과 판사가 일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고, 특히 1858년은 ‘런던 대악취’의 해라 불릴 정도로 심했다. 상수도 시설의 도입은 비용 문제로 주로 부유층 거주 지역에 한정됐고, 하수도 설비와 폐기물 처리 시설이 따로 없어 오물과 오수가 길거리나 지하 오물 구덩이에 방치되는 일이 많았다. 폐수가 식수원인 우물에 스며드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처럼 당시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대도시는 한번 콜레라가 유입되면 콜레라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832년 유행 때 런던의 콜레라 사망률(인구 1,000명당 사망자 수)은 약 3.4였는데, 같은 해 파리가 약 21.8, 스톡홀름이 약 43을 기록한 것을 보면, 런던의 상황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을 것이다.


감염병 전염에 속수무책이었던 당대의 의학
그러나 불행히도 콜레라의 위협에 대해 당대 의학은 속수무책이었다. 콜레라의 원인 즉 콜레라균(세균)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에 의학적 예방과 치료 모두 불가능했다. 콜레라 환자에게 ‘극약’인 감홍(甘汞, 염화제일수은) 또는 아편을 처방하거나 피를 뽑는 사혈(瀉血)을 실시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의학은 오히려 해로운 것이었다.
세균학의 발달로 감염병의 병원체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역병의 원인에 관해 두 가지 설이 공존했다. 하나는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제창돼 온 미아스마설(miasma theory)로,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공기의 오염 즉 장기(氣)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16세기에 이탈리아의 의사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8∼1553)가 주장한 전염설(contagion theory)로, 살아있는 전염 물질이 직접 접촉, 의류 등의 물질 매개, 공기 매개 등을 통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후자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는 전자가 우세했다.
미아스마설에 따른다면, 콜레라의 유행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환풍이 안 되는 좁은 골목에 줄지어선 비위생적인 주거공간과 오물 범벅인 거리를 일소하고 도로 확충, 위생적인 가옥 건설, 상하수도 정비, 거리 청소 등을 통해 청정 공기를 유입시켜야 한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려 한 인물이 영국의 법률가이자 사회 개혁가인 에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 1800∼1890)이다. 그는『영국 노동인구의 위생상태에 관한 조사 보고서(Report on the Sanitary Condition of the Labouring Population of Great Britain)』(1842)를 통해 주거환경이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 신체와 정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즉 콜레라 발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기 때문에 공중보건에 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의회에서 “모든 냄새는 질병”이라 역설할 만큼 미아스마설의 신봉자였지만, 그의 노력으로 1848년에 공중보건법이 마련되면서 영국은 세계 최초의 공중위생 규제 국가가 됐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염설의 입장에서 콜레라의 유행을 근절하려는 ‘소수파’도 있었다. 영국의 의사 존 스노(John Snow, 1813∼1858)는 1849년 런던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콜레라의 증상이 주로 소화기와 관련되므로 미지의 병원체가 소화관 경유로 체내에 들어오고 이후 배출돼 물을 매개로 타인을 전염시킨다고 추측하고 1832년과 1849년의 런던 콜레라 유행과 수도 공급 회사와의 연관성을 발표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존 스노의 통찰과 역사의 아이러니
1854년 여름, 런던 브로드스트리트(Broad Street, 현 브로드위크스트리트(Broadwick Street))와 그 인접 거리에서 10일간 500명 이상이 사망한 “지금까지 이 왕국[영국]에서 발생한 가장 끔찍한 콜레라 유행”이 발생하자 그는 현장에 달려가 콜레라 발병자의 식수 공급 회사를 추적하고 환자와 가족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사용한 식수 펌프를 조사했다. 존 스노의 저작 『콜레라의 전염 방식에 관하여(On the Mode of Communication of Cholera)』(1854)에 따르면, “현장에 가보니 거의 모든 사망 사례가 브로드스트리트의 우물 펌프 주변에서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펌프 주변 구역에서 발생한 사망 사례와 관련해 61건은 지속적으로든 단속적으로든 브로드스트리트 펌프의 물을 마셨다는 것이 드러났다.” “조사를 종합한 결과, 런던의 이 지역에서는 앞서 언급한 우물 펌프의 물을 습관적으로 마신 사람들을 제외하고 콜레라의 발생이나 전파가 특별히 나타나지 않았다.”
1854년 9월 7일 목요일 저녁, 그는 “세인트제임스 교구의 구빈위원회와 면담하고 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결과, 다음날 그 펌프의 손잡이가 제거됐다.” 그리고 유행은 종식됐다. 근대적 역학(疫學, epidemiology)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스노의 통찰은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1866년이 돼서야 콜레라 재유행을 계기로 “스노 씨의 비범하고 예리한 관찰 덕분에 콜레라와 오염된 물 소비의 연관성이 명백하게 입증됐다”라고 선언됐다. 그의 사후 8년 뒤의 일이었다.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의료사』등을 쓰고,『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옮겼다.
인류가 감염병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데 크게 공헌한 근대적 공중위생과 역학은 이처럼 콜레라의 유행을 계기로 탄생했다. 그런데 그 산파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콜레라를 전 세계로 퍼뜨린 영국이다. 병 주고 약 주며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더욱 강화한 형국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학적’인 전염설뿐만 아니라 ‘비과학적’인 미아스마설도 인류의 진보에 큰 역할을 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다. 어쩌면 아이러니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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