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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은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를 위한 법이다.
그러므로 노동법학은 노동이

지금보다는 더 ‘할 만한’ 것일 수 있도록 돕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년 전 여행을 하다 우연히 중동지역 파견근무를 하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휴가를 맞아 한국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잠시 들른 도시에서 짧은 여행을 하던 분이었는데, 직업병이 도져 이것저것 물어보다 파견근무 중이라는 말을 듣고 “아, 노동자셨군요”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더니 그는 “노동자 아니고, 엔지니어입니다”라며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신학기를 맞아 새 학생들을 만날 때면 종종 이 일이 기억난다. 내가 사용한 ‘노동자’라는 단어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블루칼라 생산직 노동자를 떠올렸을 수 있고, 그래서 기술 전문직인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폄하하는 단어로 노동자의 의미를 규정했을 듯하다. 혹은 ‘근로자’도 아닌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학우님들은 어떨까.


우리는 일하며 살아간다.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현실이다. 그리고 일한다는 것이 곧 노동(勞動=labor) 이다. 노동이 충분히 만족스럽고 나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노동자라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노동(labor)이라는 단어에 출산(labor)의 고통이 담겨 있듯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역인 노동을 그나마 인간답게, 안전하게, 자유롭게, 그래서 ‘할 만한(decent)’ 노동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노동법이다. 우리나라에는 노동법이라는 명칭의 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헌법」 제32조 제3항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라는 선언에 따라「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산업안전보건법」등을 제정해 두고 있다. 이것이 노동법의 한 축이다.


다른 한편, 노동자는 결코 혼자 충분히 ‘할 만한’ 노동을 만들어 갈 수 없다. 노동을 요구하는 자본하에서의 노동은 자본과 대립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는데, 이 양자는 결코 대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는 단결해 노동조합이라는 사회적 반대세력을 만들고, 그 힘을 배경으로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뤄나가야 한다. 과격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헌법재판소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 헌법 제33조 제1항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ㆍ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는 것의 원리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인정하고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방법을 정하면서 노동자가 노동3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조합법」이 마련돼 있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통해 노동을 보다 더 ‘할 만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이것이 노동법의 다른 한 축이다.


결국 노동법은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를 위한 법이다. 그러므로 노동법학은 노동이 지금보다는 더 ‘할 만한’ 것일 수 있도록 돕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노동법을 좋아하고, 노동법학자임이 자랑스럽다.

 

2024년 1학기부터 재직하게 된 방송대에서 담당하게 될 강의는 노동법의 양 축을 구성하는 법 과목들과 함께, 노동자들의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고자 하는 사회보험법 제 과목이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연구하며 강의하는 노동법을 이제 방송대 학우님들과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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