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ㆍ취업   

"좋아하는 것보다

견딜 수 있는 걸 찾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일을 한다는 것은

세상과 나의 연결이고

내 세계를 넓히는 것이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본관 문을 열고 키 178센티의 호리호리한 건축학도 이상이 들어오는 것만 같다. 시인 김기림이 회고록에 쓴 청년 이상은 흰 피부에 긴 눈, 짙은 눈썹,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다녔다. (중략) 오가는 학생들과 일본어로 시끄러운 복도를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삐그덕대는 마룻바닥 위를 큰 키로 저벅저벅 걸어갔을 이상을 그려본다.

 

최근 파이퍼에서 발간한 서울 건축여행(김예슬 지음)의 한 구절로, 현 방송대 역사관 건물을 지나다녔던 건축학도 이상의 모습을 상상한 부분이다.

방송대 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초기의 목조건물로 르네상스풍의 화려한 외관을 가졌는데, 1912년 건립된 구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청사 건물로 공산품과 기계장치 등을 테스트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실제 건물을 오간 사람들의 다수는 학생이었다. 1909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전문학교였던 공업전습소 건물을 허문 자리였고, 19223년제 전문대학인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방송대 역사관 건물의 모습. 사진=김예슬 작가

김예슬 작가를 발굴해 서울의 근현대 건축물 54곳을 뽑아 역사와 인물 해설 등을 담아 아름다운 책으로 펴낸 김하나 파이퍼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일반인의 아직 발견되지 않은 특별한 경험을 발굴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고서정 기자 human84@knou.ac.kr

 

자기 소개를 부탁드린다

 

2007년부터 8년간 헤럴드경제,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정치부, 사회부 등을 출입한 이후 2017년부터 뉴미디어 플랫폼 북저널리즘의 콘텐츠 총괄 CCO를 맡았다. 끊임없이 취재하고 글을 쓰는 콘텐츠 생산자로 살아왔다. 파이퍼는 경험을 읽고 쓰는 논픽션 플랫폼으로 20229월 창업한 뒤 여덟 권의 책을 발간했으며 5천여 명의 애독자들이 응원하고 있다. 발행 서적 가운데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인 작가들의 책이다. 파이퍼는 페이퍼’(종이)에서 착안해 무엇인가를 연결하는 파이프처럼 종이와 웹, 독자와 저자, 그리고 독자와 독자 등을 연결하고, 다양한 연결이 일어나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플랫폼이다.

 

파이퍼를 만든 계기는 무엇인가

 

기존의 방식은 소수의 전문가나 성공한 사람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공유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외연을 확장하면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가 방송국의 공채 PD 중심 구조나 할리우드 대형 제작사에 집중돼 있던 콘텐츠 생산을 일반인과 3세계의 작은 스튜디오로 확장시키면서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더 재미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디지털이 가장 잘하는 일은 소수에서 다수로 생산의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일을 책과 신문 중심의 텍스트에서도 할 수 있다고 봤다. 유튜브처럼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일반인들의 이야기도 성공할 수 있나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일반인들의 이야기가 더 재밌다고 생각한다. 다른 국가들의 성공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일본의 노트 닷컴이라는 회사의 경우, 플랫폼에 연재된 일반 가족들의 이야기가 책뿐만 아니라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우리가 길을 지나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모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실제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서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을 간접 경험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주목하는가

 

현재 도쿄에 살면서 유튜브에서 일본의 핫플레이스를 소개하고 있는 부부에게 접촉한다거나, 사진 작가였다가 2012년 서울 명륜동에서 1700만 원으로 창업한 뒤 현재까지 유명 음식점 20여 곳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의 이야기 등을 전한다. 이 사장의 이야기는 참 상인의 길(하덕현 지음)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는데, ‘어떻게 해서 작은 가게로 세상과 소통하고 수익을 내고 성장했는지그 비결을 담고 있다. 인테리어와 장소 선정, 메뉴 선정의 비법, 사장의 마음가짐에 대한 철학적인 조언까지 고스란히 공개한다. 플랫폼 연재를 한 이후에 인기를 끌면 이후 책을 발간하는 방식이다.

 

성공하는 콘텐츠는 무엇인가

 

콘텐츠는 없어도 살 수 있다. 콘텐츠는 사람들의 즐거움, 삶의 질을 높여주고 고상한 삶을 만들어 주는 플러스알파다. 지금 시대에 소비자들이 뭔가 불편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콘텐츠가 아니라 지적인 고양감, 콘텐츠를 향유하는 기쁨을 주는 콘텐츠를 만나고 싶어한다. 자신이 하고 싶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설득해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괜찮은 편이야또는 이 정도면은 재밌지정도는 사실 선택받기가 어렵다.

 

다른 출판 플랫폼과의 차이점은

 

브런치가 1년에 한 번 예비 작가를 선정해 출판사와 연결해 주는 구조라면, 파이퍼는 선정한 글을 곧바로 책으로 출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속도와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쓰는 글과 책이 될 글을 쓰는 것은 다르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질문을 던져 하나의 글을 완성하도록 돕는 자체 에디터인 파이퍼 에디터를 만들어 특허 출원을 한 것도 특징이다. 구조화된 질문 묶음에 답을 하는 것으로 SNS에 토막글을 올릴 때처럼 편안하게, 하지만 흐름과 구조를 갖고 글을 쓰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올해 3월에 출간한 서울 건축 여행이다. 김예슬 작가는 10년 가까이 전국의 건축물을 찾아다니면서 기록을 남겨 온 건축여행자다. 책 출간 이후 주요 방송사와 팟캐스트 인터뷰로 인기를 끌었고, 스타 논픽션 작가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책 출간 전부터 사전에 펀딩으로 1100 원 판매를 기록했는데, 출간 일주일 만에 2쇄를 찍고, 한 달 만에 3쇄를 찍었다. 출간과 동시에 해외 판권 문의도 받는 등 반응이 뜨겁다.

 

대표는 일반 직원과 어떻게 다른가

 

사업을 하면서 세상의 이면을 보는 느낌이다. 답답해 보였던 세상이 위대하고 놀라워 보인다. 내가 얼마나 작은지 깨닫게 되기도 했다. 세상에 없던 것을 내가 주도해서, 나의 책임하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과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 결과물을 이용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고 감동적이다. 대표가 되면서 사람이 좀 더 커진 것 같다. 내가 일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었다는 걸 대표를 하면서 알게 됐다.

 

다양한 직업 중 가장 맞는 직업은

 

기자, 편집자, 플랫폼 대표 셋 다 견딜 수 있는 좋은 점들이 있었다. 기자를 할 때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너무 재밌었고, 내 이름을 걸고 일을 한다는 것도 좋아서 다른 어려움이 있어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편집자일 때는 쓰는 일이 엄청 많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게 팔리는 걸 보는 게 좋고, 재미있었다. 대표 일이 제일 힘들어서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겨낸 내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서 내가 모르는 나를 계속 만나게 될 것 같아 대표가 좋다.

 

자신의 길을 찾는 이들에게 한마디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은 진짜 어렵고, 찾아도 그 마음을 유지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좋아하는 것보다 견딜 수 있는 걸 찾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분야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최소한 10년은 지속해야 하는데, 오래 지속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 같다. 버티는 일이 가능하려면 싫어하는 게 좀 적거나, 오래 해도 괜찮은 일을 찾아야 한다. 좋아하는 요소는 좀 적더라도 싫어하는 요소가 많지 않아서 오래 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걸 찾으려고 하면 찾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좋아하는 게 없어도 상관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과 나의 연결이고 내 세계를 넓히는 것이기에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