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무엇을 위하여 종(種)은 어울리나

‘들개’하면 아프게 떠오르는 이름이 둘 있습니다. ‘상암이’와 ‘블랑이’입니다. 2018년 9월, 상암동 월드컵공원에 살던 개 상암이가 마취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공원에 들개가 있다. 무서우니 잡아달라’는 민원 때문이었습니다. 공원에 산책 오는 사람들의 반려견들과도 잘 놀던 상암이였습니다. 게다가 입양자도 나타나, 곧 ‘반려견’이 될 예정이었기에 더욱 원통한 죽음이었지요.

 

‘블랑이’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넘어 미안함과 자책감까지 몰려옵니다. ‘카센터 개’였던 블랑이는 버려진 후 ‘새터산 들개’가 됐습니다. 블랑이는 같은 처지의 뽀식이를 만났습니다. 블랑이 가족 역시, ‘새터산 들개들을 잡아달라’는 민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상암이 사건 이후 마취총 사용이 금지돼 총에 맞지는 않았으나, 열악한 환경에서 출산을 반복하던 블랑이는 2020년 5월 산속에서 병사했습니다.

 

블랑이는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떠났습니다. 중성화수술의 절실함 그리고 들개 문제의 난감함 등입니다. 구조도 입양도 어렵고, 그렇다고 ‘비둘기밥을 주지 말라’는 팻말 문구처럼 자연의 일원이 돼서 살아가게 둘 수도 없는 들개들. 저는 블랑이 가족을 위해 사룟값과 구조 비용을 보태기는 했지만, 블랑이처럼 야생화된 큰 개를 입양하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블랑이가 죽은 후 어렵게 구조돼 보호소로 간 블랑이의 두 딸, 곰순이와 곰지도 선뜻 입양하지 못했고요(곰순이는 구조자의 끈질긴 노력 끝에, 2022년 덴마크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고 합니다). 반려견들과 노는 ‘들개’ 상암이의 사진을 보면 지금도 의문이 솟구칩니다. ‘대체 그 무엇이, 이들을 반려견과 들개로 나누는 것인가?’

 

개가 사는 곳이 그 개를 말해준다
개는 ‘가축화한 늑대’라는 게 보편상식입니다. 개와 늑대는 같은 종(種, species)으로 분류되며 유전자 일치도는 99.96%입니다. ‘가축화한 늑대’인 개와 ‘개의 조상’인 늑대 사이에, 그 0.04%의 차이 어디쯤 ‘들개’가 숨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들개는 개에 가까운가, 늑대에 가까운가? 사실 이 질문은 우문입니다. ‘들개’라는 명칭부터 개를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온라인 사전을 검색해봅니다. 지식백과에서 들개의 영문명은 ‘bush dog’, 학명은 ‘speothos venaticus’이며 ‘식육목(食肉目) 갯과의 포유류’로 분류돼 있습니다. 여기서 ‘들개’는 개와 같은 과이지만 다른 동물을 말합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상당히 포괄적이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라고 기술한 후, ①떠돌이개(유기견) ②늑대와 가까운 딩고(dingo) 등의 야생견 ③지식백과에서 ‘들개’로 분류된 야생동물 ④승냥이 등 갯과 동물로 분류했습니다.

 

우리 인간과 친한 그 ‘개’는 ①번이며, ②~④번은 갯과의 ‘야생동물’입니다. 이 둘을 총칭하는 용어가 ‘들개’인데요. 유전자적 차이는 0.04%를 넘지 않을, 이 둘 사이를 더욱 벌리는 차이는 ‘자리’ 즉 ‘공간’입니다.

 

원래의 자리(인간의 곁)를 잃고 떠도는 개(stray dog, chien errant)와, 원래의 자리(야생환경)에 있는 갯과의 야생동물(wild dog, chien sauvage)의 차이인 것이지요. 전자는 난민, 후자는 야생 속 삶을 이어가는 원주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만, 둘 다 삶이 위태롭긴 마찬가집니다. 인간 종(種)이 점령해 버린 지구에서 그들이 안전하게 살 곳(공간)은 좋은 ‘반려인간’의 곁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2024년 대한민국에서는 ‘금수저’, 즉 부자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가깝겠네요.
‘금목줄’, 즉 좋은 반려인간을 만나지 못해 반려견이 되지 못한 개들의 삶은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인간에게 버려져 갈 곳을 잃은 유기견, 산이나 공원에 사는 들개, 보호소에서 입양자 또는 안락사를 기다리는 보호소견….

 

제 반려견 ‘뽀민’도 그랬습니다. 한때는 누군가의 반려견이었으나 공원 나무에 묶여 버려진 후 유기견이 됐고, 공원을 떠돌며 들개가 될 뻔하다가 구조된 후 보호소견으로 살다 저를 만나 다시 반려견이 된 거죠. 이 모든 과정에 뽀민의 의지나 선택은 없었습니다. 오직 인간의 선택과 행위, 그에 따른 ‘공간’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지요. 지금도 길, 산, 공원 그리고 보호소에는 그런 ‘뽀민들’이 넘쳐납니다.

살리기는 너무나 어렵고, 죽이기는 쉬운
온라인에서 ‘들개’ 관련 기사를 검색해봅니다. ‘국민 78.67% 들개 포획 찬성’, ‘○○시 서구, 들개 포획 예산 2천만 원뿐’, ‘△△시 야생들개 포획 총력전’, ‘□□시 들개 집중포획’ 등 전국에서 들개를 잡느라 난리네요. 간혹 들개가 늘어나는 원인(마당개, 개 유기)부터 파악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기사도 눈에 띄긴 합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뜨거운 주제는, 구리시에서 일어난 반려견 ‘샌디’ 사망 사고입니다. 등산로를 산책하던 반려견이 ‘어떤 동물’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죠. 누가 샌디를 물어 죽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멧돼지포획단의 사냥개와 들개가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현재까지는 추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용의자인 사냥개와 들개의 처지는 사뭇 다릅니다. 구리시 멧돼지포획단 소속인 사냥개는 조직의 변호를 받지만, 들개는 조직도 변호인도 없습니다. 인간을 위해 멧돼지 포획을 수행하는 일꾼, 사냥개는 혐의만으로 죽일 수 없습니다. 반면 이미 멧돼지와 함께 포획 대상이 된 들개는 혐의만 쌓여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십상이지요. 멧돼지도 들개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이 없는 그들만의 공간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들개로 살다 죽는 개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구조가 어렵고, 입양은 더 어렵고요. 그래서 들개를 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렵지만, 죽이는 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구조’와 ‘포획’ 둘 다 잡는 작업이지만, 목적도 성격도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살리기 위한 일이라 조금도 다치지 않게 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인 반면, 후자는 작업과정에서 들개가 죽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포획은 어차피 안락사의 전 단계니까요.

 

“해질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때는 선과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2007년에 방송된 MBC 드라마「개와 늑대의 시간」마지막 회에 주인공 이수현(이준기)이 하는 독백입니다. 드라마 제목은 프랑스어 표현 ‘L'heure entre chien et loup’에서 따온 것으로, 내게 다가오는 그림자가 개(내 편)인지 늑대(적)인지 알 수 없는 황혼 무렵을 말합니다. 문득 영화「밀정」의 카피였던 ‘적인가, 동지인가?’가 떠오르네요. 이수현의 독백을 동물의 관점으로 바꿔볼까요?

 

“해질녘, 귀와 코를 바짝 세우고, 저 언덕 너머에 움직이는 그림자가 나를 도우려는 인간인지, 나를 잡으려는 인간인지 분간해야 할 시간. 이때는 삶도 죽음도 모두 운일 뿐이다.”

 

이편의 인간 이상으로, 저편의 동물도 혼란과 불안, 공포와 긴장을 느끼지 않을까요?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길고양이’들은 거의 매일 저런 독백을 할 듯합니다. 내게 밥을 주는 고마운 인간인지, 나를 해치려는 위험한 인간인지 빨리 분간해야 살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도 공원, 산 등에서 죽어가고 있을 들개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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