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신화에서 신화로

중·동부 유럽에서 전승되는 창세신화 자료들 가운데는 창세의 주역신이 유일신이 아니라 선신과 악신이든 절대신과 악마이든 일종의 짝패의 형식으로 설정돼 있음을 말해 주는 유형이 있다. 짝패의 창세신은 어느 신화에서나 동일한 성격과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상호모방과 협연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양상은 분명 해당 신화를 전승하는 집단의 특별한 종교적·역사적 경험과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지만, 동일한 문화권역 안에서도 변주를 드러내는 것은 창세의 내력을 다양하게 인식한 결과이기도 할 터이다.

창세의 내력에 대한 다양한 인식
예컨대와 다음과 같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신화 일부를 보자.

신과 악마 둘이 함께 작업을 했다. 신은 악마를 바다 맨 밑으로 내려 보내 흙을 가져오게 해서 땅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악마가 수면으로 올라오는 동안 흙이 모두 물에 씻겨나가 버렸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악마는 신이 명령한 대로 손톱 밑에 붙어 있는 흙을 잘 긁어냈다. 그들은 흙을 6일 동안 반죽했다. 그러자 한 발로 올라설 만큼의 양이 됐다. 신은 한 발로 반죽 위에 올라선 후 6일 동안 쉬자고 말했다. 신과 악마가 쉬는 동안 반죽이 계속 불어났으나 둘이 눕기에는 공간이 부족했다. 이에 악마가 밤에 잠을 잘 때 신을 밀쳐 물속으로 빠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악마는 신을 완전히 밀쳐 물속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단지 약간 밀릴 뿐이었지만, 신이 밀려 난 공간만큼 진흙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아침이 되자 신은 악마가 밤새 자신에게 행한 행위의 연유를 알았다. 그런데 신은 흙이 너무 많은 걸 보고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뭔가를 만들자.” “네가 만들어 보거라.” 이에 악마가 진흙을 조금 떼어내어 발로 찼다. 그러자 진흙이 개구리로 변해 뛰기 시작했다. 이후에 신은 “잘했다. 하지만 사람도 만들어야겠다”라고 말한 후 진흙을 조금 떼어내어 발로 찼다. 그러자 사람이 되어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진흙에서 사람이 나오게 됐다. (헝가리) 

하느님이 땅도 만드시고, 들과 산과 계곡도 만드셨지만, 아직은 하늘에 빛이 없었다. 하느님은 빛이 없어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기에 아무 불편이 없었지만, 악마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자신도 세상의 창조물들을 보고 싶으니 빛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하느님은 악마에게 세상의 네 방향에서 각각 부싯돌과 금덩어리 한 개씩을 찾아오면 그것들을 가지고 땅을 비춰 줄 태양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악마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이 요청한 물건들을 다 구해서 돌아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마가 보는 앞에서 태양을 만드시려 하지 않았다. 혹시 악마가 태양을 만드는 법을 흉내 내다가 자칫 이 세상을 다 불타버리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지금은 피곤하니 한숨 자고 나서 태양을 만들겠다고 하고는 곧 잠이 들었다. 악마도 부싯돌과 금덩어리를 구해 오느라 피곤해서 이내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악마가 곤히 잠이 든 걸 확인한 하느님은 살며시 일어나서 악마가 구해 온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켜 금덩어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랬더니 마치 고양이 눈알같이 동그랗게 반짝이는 불빛 덩어리가 생겨났다. 하느님이 그 작은 불빛에 성스러운 생기를 불어 넣자, 그 불빛은 천천히 창공으로 날아오르면서 점점 커지더니 온 땅에 환한 빛과 따뜻한 열기를 맘껏 줄 수 있는 큰 불빛이 됐다. 하나님은 그 불빛을 ‘성스러운 태양’이라 이름 지어 주셨다. (루마니아)

선신과 악신이 창조한 각각의 인간 유형은

어느 한쪽도 완벽한 피조물이 아니어서
둘을 하나로 합쳐야 했다는 인식은

인간 세상과 인간의 창조가 선신과 악신의

공동 창조이며 모방 창조의 결과임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헝가리의 경우, 선신이 진흙으로 개구리를 창조하는 악신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해 인간을 창조한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진흙으로 생명체를 창조한 후 생명을 불어넣는 행위는 그 피조물을 발로 차는 것이다. 악신의 행위에 이어 선신이 모방행위를 한 사정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두 사례에서 보면, ‘잠자기’의 제안은 모두 선한 신의 몫이지만, ‘거짓 잠자기’의 속임수를 실행하는 쪽은 악한 신이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각기 속임수를 한 차례 시도함으로써 각각의 욕망을 해결하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전자, 즉 선신의 우위로 결판난다. 루마니아의 사례에서 유의할 것은 선신과 악신이 잠을 자는 동안에 서로가 상대방을 배제하려는 행위를 한다는 점이다. 잠을 자는 동안 상대편을 먼저 배제한 쪽은 악신인데, 선신이 동일한 행위를 통해 태양을 창조한 것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선신이 악신의 행위를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을 창조한 주체는 누구일까?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공통적 양상 가운데 선신이 잠을 자는 사이 악신이 선신을 땅에서 밀어내려 하자 땅이 계속 넓혀졌다고 하는 설정은 선신이 잠든 사이에 행해진 육지의 창조 행위를 의미한다. 물론 악신이 창조의 비밀스러운 원리를 인식하고 있어서 선신이 잠든 틈을 이용해 육지를 그런 방식으로 확장시켜 창조했다고 하는 문면적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반죽을 해놓은 상태에서 땅을 넓히는 방식은 특정한 매개(밀대)를 활용해 반죽을 펴는 행위에서 착안한 것이다. 결국 육지를 평평하고 넓게 확장하는 창조 원리는 선신을 매개로 하여 반죽을 펴듯이 땅을 펴나가는 것에 있다는 인식일 터이다.
이렇게 보면, 문면에서 악신이 그 원리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하는 서술이 선명하지 않으나 결과적으로 육지를 창조한 주체가 악신이었다고 하는 설명은 가능하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긴 했는데, 하느님과 악마는 둘이서만 같이 다니다 보니 점차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악마가 먼저 인간을 만들 것을 제안하게 된다. 악마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의 형태를 만들어 보려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떠한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빛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본떠서 인간의 형태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악마는 열심히 만들어서 하느님의 형상에 가까운 인간을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나눠 줬다. 그 모습을 본 하느님도 인간을 만들어 보기로 하고는 앞에 있는 악마의 형상을 본뜬 괴물 같은 인간을 만들어서 생기를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하느님과 악마는 서로 처음으로 만든 인간을 하나로 합쳐 버렸다. (루마니아)

악신이 선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이, 선신이 악신을 본떠 만든 인간보다 선신의 본성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결과를 낳았다면 창조의 모방행위가 갖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선신과 악신이 창조한 각각의 인간 유형은 어느 한쪽도 완벽한 피조물이 아니어서 둘을 하나로 합쳐야 했다는 인식은 인간 세상과 인간의 창조가 선신과 악신의 공동 창조이며 모방 창조의 결과임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의 원인을 이런 방식으로 해명하려 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창조의 모방행위가 가지는 함의는 선신과 악신의 인간 창조가 서로를 반영한 결과라고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의 모방행위가 가지는 함의
기독교 위경(僞經) 가운데 하나인「비서(秘書)」에서는 사탄이 지상의 모든 것을 건설했다고 한다. 성서와 달리 사탄의 세계 창조는 ‘말(Logos)’이 아니라 ‘행위’로 인식된다. 궁창에 앉아 있던 사탄이 공기 위에 있던 천사와 물 위에 있던 천사를 불러 물에서 땅을 들어 올리라고 명하자 땅이 마른다. 그런 연후에 두 번째 천사의 관(冠)을 잡아 그 반으로 달빛을 만들고 나머지 반으로 별빛을 만들었다 한다. 그리고 번개와 우박 등의 자연 현상과 모든 짐승과 식물을 창조하고, 인간의 조상을 위한 에덴동산도 만든다. 인간은 사탄의 피조물이며 그의 형상을 닮았으나 진흙으로 빚은 몸에 천사를 가둬 놓아 천상의 영혼을 지니게 됐다고 했다. 악마가 창조의 주역임을 확정한 것이 매우 이채로우나 헝가리와 루마니아 창조신화에서 설정한 상호모방과 협연의 창조 행위를 환기하면, 이들 신화의 전승력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더불어 인간 세상을 차지한 최초의 신으로서 사탄의 존재가 선악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일 수 있으나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유일신 야훼의 적이 아니라 인간의 적일 따름이며, 그곳에서 사탄은 신의 종이며 충직한 하인이라는 인식을 인지하게 되면 이해의 틈이 보인다.
폴 카루스(Paul Carus, 1852~1919)가 “초기 기독교에 보이는 사탄은 이 세상에 군림하는 악마였다. 이런 믿음은 이교도 정권이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구비문학회 연구이사 등을 지냈으며,『창조신화의 세계』『한국-동유럽 구비문학 비교연구』『신화의 세계』등을 썼다. 비교신화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유지되는 동안 교회에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통치자들이 정권을 잡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립되자, 곧 사탄은 점차 세상에 군림하던 통치자의 권좌에서 물러나는 대신, 이번에는 하나님이 다시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권좌에 오르게 된다”(『악마의 탄생』, 이지현 옮김, 청년정신, 2015)라고 진술한 바를 환기하면, 두 지역의 창조 신화에 대한 인간 인식의 저변, 곧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선과 악의 기원에 대한 인간의 해석 하나를 짐작할 수 있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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