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울을 걷다, 모던 서울

경로

용산역사박물관(구 용산철도병원) → 옛 철도관사 단지 → 영등포역 일대 → 경방 타임스퀘어 → 문래동 철공소 골목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의 군사기지화를 구체화한 일제는 면밀한 검토 끝에 용산역 인근 둔지산 일대를 일본군 병영지로 낙점하는 동시에 병영 도시이자 철도 도시로서 ‘신용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용산역 인근에는 용산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용산역 앞 광장을 지나 이촌동 방향 사거리에 이르면 긴 벽돌조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용산역사박물관이다. 예스러운 외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건물은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개관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인데, 2011년까지 이곳은 병원으로 운영됐다.
병원의 시작은 러일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수행 과정에서 일제가 급속히 철도 건설을 추진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투입됐는데 이 와중에 부상자가 잇따랐다. 철도국은 급한 대로 철도관사 건물을 개조해 병원으로 운영하다가, 1913년 현 용산역사박물관 위치에 용산철도병원을 신축해 이전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경의선의 철길 소음이

함께 빚어내는 이곳의 공기는 을씨년스럽다.
이 허물어진 마을과 대비되는것은

동네 어귀 어디서나 잘 보이는

 K-POP의 산실, 하이브의 신사옥이다.
어제의 용산과 오늘의 용산이
이곳에서 조우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속의 풍경들
건물의 외형뿐만 아니라 건물 내부에서도 준공 당시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박물관 1층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로 수놓은 아치형 현관과 병원 접수처로 쓰였을 법한 안내 데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 상단의 스테인드글라스는사진=김형선 파손을 복원하는 정도의 보수만 진행해 준공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색적이게도 한강철교를 달리는 기관차가 형상화돼 있다. 보통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장소는 중세의 성당 등 종교적 공간으로 성스러운 인물들이 형상화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한강철교와 힘껏 달리는 철도의 모습은 당시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있어 철도로 대표되는 근대적 발전의 가치가 신성시됐음을 보여준다.
철도병원 현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한강철교는 식민지를 개발하고 장악하려는 제국의 청사진이나 다름없었다. 일제는 자금난으로 경인선 부설에 실패한 미국인 모스의 부설권을 인수해 한강철교까지 완공함으로써 제국의 능력을 한껏 과시했다.
나룻배만 오가던 한강 위에 등장한 거대한 무지개 모양의 교량과 그 위를 달리는 철마의 폭음은 조선인들에게 제국의 힘을 각인시키는 계기였다. 철로와 교량 건설에 조선인 인부들이 강제 동원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항일의병세력은 일본군의 폭력과 착취에 저항해 철도시설을 주요한 공격 목표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이 신성시한 영역인 철도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사형이라는 무자비한 조치가 이어졌다.
철도병원 외에도 용산역 일대에는 대규모 철도관사 단지가 조성돼 있었다. 관사단지를 중심으로 철도병원, 철도원양성소, 철도공원 등 철도관련 시설이 집중돼 있었다. (신)용산은 그야말로 철도의 중심지이자 철도를 위한 도시로 만들어져 갔다. 또한 이곳은 순전히 일제와 일본인을 위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을 철도단지로 강제 수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철저한 희생이 뒤따랐다.
1908년경 120동에 불과했던 용산 철도관사는 철도산업의 확장과 더불어 1925년에는 774동으로 대폭 증가했다. 용산 철도관사는 동일 종사원을 대상으로 한 조선 최대의 집합주택단지였다. 1980년대 이후 도시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며 대부분 철거됐으나 용산역사박물관 뒤쪽에는 관사단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골목이 여전히 남아있다. 옛 관사단지 일대는 대규모 신축공사 현장이 조성돼 있어 어수선한 느낌이 다분하다. 그러나 경의선 철길에 근접한 지역에서는 당시 관사 원형이 일부 남아있는 주택을 종종 볼 수 있다.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10평 남짓한 단층 가옥들이 줄지어 선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다른 시공간의 느낌을 자아낸다.
이곳에는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오랫동안 사람 산 흔적이 없는 빈집들도 곳곳에 방치돼 있다. 집집에 재개발을 촉구하는 문구를 내건 깃발만이 휘날리고 있다. 이따금 지나가는 경의선의 철길 소음이 함께 빚어내는 이곳의 공기는 을씨년스럽다. 이 허물어진 마을과 대비되는 것은 동네 어귀 어디서나 잘 보이는 K-POP의 산실, 하이브의 신사옥이다. 어제의 용산과 오늘의 용산이 이곳에서 조우하고 있다. 지금은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옛 식민지 철도 도시의 흔적은 사라져갈 전망이다.
식민지 공업수도 영등포의 탄생
(신)용산이 철도의 도시였다면 영등포는 가히 공장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신용산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등포는 한강변 저지대에 위치해 수해가 빈번했던 탓에 시가지가 발달하지 못한 한촌(寒村)이었다.
영등포가 경인지역의 핵심 공장지대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토대는 바로 경인철도 부설이었다. 경인선이 영등포리를 통과하게 되면서 역사(驛舍)가 설치됐고, 1901년 영등포역이 경부선의 분기점으로 낙점되면서 영등포는 경부선 개발의 북부 거점으로 탈바꿈했다. 이윽고 철도 부설에 따른 인력들이 영등포로 쏟아져 들어왔다. 영등포역 일대를 중심으로 열차 창고, 공장, 사택 및 여관, 상점 등이 들어서며 신시가지가 조성됐으나 본격적인 공업화는 좀더 기다려야 했다.
이후 대규모 공업도시로서 영등포의 성격을 규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11년 조선피혁주식회사 공장(이하 조선피혁)의 설립이었다. 조선피혁은 소가죽을 가공해 군화 등 피혁제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등을 거친 일제는 군수용 피혁제품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장 개발을 유치했다.
이 과정에서 영등포역과 조선피혁 공장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된 철도인입선은 이후 영등포 산업지대의 혈맥으로 작용했다. 이어 영등포에 들어오는 주요 대형공장들은 모두 이 철도인입선을 따라 자리를 잡았다. 영등포역에서 당산동 방향으로 가는 영신로가 바로 철도인입선이 깔렸던 길이다. 영등포 공업단지를 일구는 데 크게 기여한 철도인입선은 자동차 시대로 접어들며 1973년 철거됐다.
1920년부터는 대규모 공장들이 영등포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에는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경성방직이 있다.
오늘날 영등포를 대표하는 장소를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이 타임스퀘어를 떠올릴 것이다. 타임스퀘어의 공식 명칭은 ‘경방 타임스퀘어’로 경성방직(현 경방)의 영등포 공장부지를 재개발해 만든 복합쇼핑몰이다.

경방 타임스퀘어와 문래동 ‘오백채 마을’
1919년에 조선인 자본가 김성수에 의해 설립된 경성방직은 공장부지로 영등포역 근처 5천 평을 매입했고, 1923년부터 본격적인 생산라인을 가동했다. 철도인입선까지 끼고 있어 최적의 입지를 차지한 경성방직은 해방 이후에도 국내 면방산업의 선도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1990년대 이후에는 면방산업 사양화에 따라 국내 생산라인을 모두 철수하고 베트남으로 이전한 상태다.
20세기 면방산업의 주 무대였던 경방의 영등포 공장부지를 재개발하려는 시도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됐다. 마침내 2009년 새롭게 탄생한 타임스퀘어는 개점 당시 국내 최대의 신개념 복합쇼핑몰이라는 수식어를 내걸었다. 한마디로 타임스퀘어는 20세기 국내 경공업의 중추기지 역할을 했던 영등포가 대형 소비도시로 재탄생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공업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영등포는 공도(工都)라는 별칭까지 얻게 됐다. 이에 영등포는 전국의 노동자들이 모인 노동자의 도시로 자리잡았다. 한편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극심한 주택 문제를 일으켰다. 영등포 일대의 주거난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주택영단(주택공사의 전신)은 문래동에 500가구 규모의 영단주택을 건설했다. 주민들은 이곳을 ‘오백채 마을’이라 불렀다. 사다리꼴 모양으로 조성됐던 오백채 마을은 바로 오늘날의 문래동 철공소 골목으로, 조성 당시 단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문래동의 영단주택단지는 해방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안식처로 남았다. 이곳에서 전쟁을 겪고, 전후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황석영의 소설 『모랫말 아이들』(2001)에서 엿볼 수 있건국대 통일인문학과 박사과정다.
제국을 팽창시키려는 욕구로 시작된 일제의 공업화정책이 공업도시 영등포를 만들었고, 그 조건 속에서 사람들은 그네들의 삶을 부지런히 일궈왔다. 일제강점기의 끝자락,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꿋꿋이 살아낸 영단주택의 공장 노동자들이 그러했고, 한국전쟁기의 참혹한 상황을 견디며 산업화를 일궈낸 영등포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오늘의 문래동이란, 긴 세월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시공간과 ‘인스타 갬성’을 찾아 이곳에 오는 젊은 세대의 그것이 교차하는 묘한 공존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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