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동시대 예술 산책

1월 1일, 새해가 되는 날이면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특별한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바로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rmoniker)이 1939년 연말부터 진행하기 시작해 어느덧 80년이 훌쩍 넘는 전통으로 이어진 신년음악회다. 빈의 시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공연인 동시에 전 세계로도 널리 알려진 이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해가 넘어가는 그 시간이지만, 동시에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은 바로 ‘장소’다. 공연이 열리는 곳은 ‘황금홀(Goldener Saal)’이라는 별명을 지닌 공연장, 빈 무지크페라인(Wiener Musikverein)이다.
1870년 1월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도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는 빈 무지크페라인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건물이다. 그 안에는 작은 규모의 공연을 위한 리사이틀홀(recital hall)도 있지만, 그중 가장 큰 공연장이자 뛰어난 음향과 아름다움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황금홀이라 불리는 콘서트홀이다. 화려한 금박 장식과 샹들리에가 자리한 이 대공연장의 한쪽 벽면에는 오르간이 설치돼 있고, 천장에는 태양의 신이자 음악의 신이었던 아폴론과 아홉 명의 뮤즈를 묘사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다.
19세기의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건설된 빈 무지크페라인에서는 주로 유럽에서 작곡된 18~19세기의 곡들이 연주된다. 세계 곳곳에 건축된 콘서트홀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음악들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장소에서 우리가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은 19세기의 감상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오늘날의 콘서트홀이 19세기에 만들어진 형태일 뿐이고, 그 당시의 음악에 최적화된 특별한 발명품이라면 지금은 어떨까? 동시대의 음악문화를 잘 담아내는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유구한 전통을 지닌 콘서트홀을 빠져나와 오늘날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들을 둘러보자.
사진=Diego Edlso, delso.photo
콘서트홀에서부터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를 지나 음악가의 집, 음악감상실,
음악 카페와 다방 그리고 거리로 이어지는

다양한 음악 청취 공간들까지,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시대의음악을 듣고 즐기고 있고,
이 서로 다른 공간들은 그 음악들을 듣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
매년 봄이 되면 경상남도 통영에서는 2주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유럽의 고전음악부터 현대음악, 한국의 고전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채로운 고전과 현대음악을 만날 수 있는 이 음악제를 찾아가면 한번쯤 ‘블랙박스’ 형태의 공연장을 경험할 수 있다.
블랙박스(black box)는 20세기 중엽부터 쓰이기 시작한 공연장의 형태다. 처음에는 여러 극예술, 실험적 형태의 공연예술을 위한 장소였으나 점차 널리 확산해 음악 공연에서도 적극적으로 쓰이게 됐다. 블랙박스는 콘서트홀과 형태 면에서도, 성격 면에서도 사뭇 다른 비교적 최근의 공연장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무대와 객석이 고정돼 있었던 보통의 콘서트홀과 달리 블랙박스는 그야말로 텅 빈 상자처럼 언제든지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바꿀 수 있다. 고정된 한 자리에 앉아서 마치 액자 속의 음악 공연을 보는 듯한 콘서트홀 경험과 달리, 블랙박스에서는 언제 어떤 구조로 음악 공연을 감상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때론 블랙박스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무대가 설정되기도 하고, 무대가 정 가운데에 배치되고 관객들은 빙 둘러서 앉는 방식으로 객석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 박스형 공연장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 자유분방한 무대 구성에 있다. 이런 조건은 특히 동시대에 들어 미디어를 활용하는 음악가들에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고 이런 조건에 발맞추어 미디어를 활용하는 음악가들은 블랙박스를 자신의 주 무대로 삼기도 한다.


한편 동시대에 들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또 다른 곳은 바로 화이트큐브(white cube)다. 화이트큐브 또한 본래 음악이 아닌, 미술을 위한 공간이었다. 보통 화이트큐브는 온통 흰 벽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을 지칭한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이 새하얀 공간은 시각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에 좋은 곳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이곳은 음악가들도 무척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가 됐다. 어떤 동시대 음악가들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꼭 ‘무대 공연’에 국한되지 않는데, 전시의 관습이 배어있는 화이트큐브가 그들의 음악을 가장 잘 선보일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생황과 피리를 연주하고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한지수는 화이트큐브의 공간적 이점을 살린 공연「몸맘」(2013)을 진행했다. 공연이 진행된 곳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였다. 이 공연 「몸맘」에서는 흰 벽을 다양한 색채로 바꿔 가는 조명의 적극적인 활용, 천장과 벽면 곳곳에 매달린 스피커들이 만들어 내는 선명한 그림자, 쇼케이스 위에 놓인 여러 종류의 악기들과 악보들 등 시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부분도 음악만큼이나 돋보였다.
「몸맘」은 한 음악가를 둘러싼 악기와 악보, 오브제들을 전시장에서처럼 숨김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공연이었다. 이런 종류의 공연에서는 음악이 주는 청각적인 즐거움만큼이나 무대에 펼쳐져 있는 음악가가 마주한 악기와 사물들, 그리고 이를 연주하고 조작하는 음악가를 눈으로 관찰하는 즐거움도 크다.

음악가의 집
우리가 매일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휴식과 여가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집.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공연장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집’에서 공연을 진행한다면 어떨까?
더하우스콘서트(The House Concert)는 음악가 박창수가 2002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시작해 지금은 강선애 대표가 그 흐름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공연 플랫폼이다. 여기서는 한국의 고전음악, 즉흥음악, 전자음악, 현대음악 등 다양한 음악들이 폭넓게 다뤄진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천 회가 넘는 공연을 만들어 온 만큼 더하우스콘서트가 열리는 ‘집’의 공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연희동 자택을 떠나 광장동, 역삼동의 스튜디오를 거쳐 도곡동의 율하우스로, 그리고 지금의 대학로 예술가의 집까지. 서서히 터를 바꾸어 갔지만, 그간 변하지 않은 것은 연주가와 관객이 잘 만들어진 ‘객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문득 집에 놀러 온 손님처럼, 바닥에 자유롭게 앉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음악을 듣는 일’은 음악인 가까이에 앉아 마룻바닥을 타고 울리는 진동을 느끼는 것까지 포함된다.
처음에 더하우스콘서트의 ‘하우스(house)’는 통상의 주거 공간을 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음악인이 자라나고 안전히 머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음악인이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음악가의 집’처럼 자리매김한다. 사적인 공간, 혹은 홀로 연습만을 하던 공간을 공연장으로 탈바꿈시킨 이런 더하우스콘서트의 사례는 이제는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아 곳곳에서 나름의 ‘하우스콘서트’가 열리곤 한다.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닌, 음악가가 늘 머무는 곳에서 듣는 음악은 콘서트홀을 비롯한 연주회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까운 거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두 곳의 특별한 음악감상실
경기도 파주에는 특별한 음악감상실이 두 곳 있다. 바로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와 ‘콩치노 콩크리트’다. 모두 뛰어난 음향 시스템을 갖춘 이곳에는 언제든 사람들이 입장해 음료를 마실 수 있고 자유롭게 오갈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히 음악을 듣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카메라타와 콩치노 콩크리트는 꽤 묵직한 분위기의 대형 음악감상실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옛 ‘음악 다방’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학림다방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꾸준히 들려온다. 젊은 시절 이곳을 오갔던 청년들이 문화예술계의 거장들이 됐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명동에 위치했던 ‘르네상스 다방’은 1920~30년대생 음악가들이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으로, 지금처럼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없던 시절, 청년들이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원 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학림다방과 르네상스 다방이 주로 클래식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했다면, 동명의 영화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주목받았던 대중음악감상실, ‘쎄시봉’도 있다. 서울 중구 무교동에 위치한 음악 다방이었던 이곳에서는 이장희, 송창식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탄생했고,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했다.

거리의 음악
도심 곳곳을 걷다 보면 간혹 길거리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만날 수 있다. 그 피아노는 2008년부터 영국 아티스트 루크 제람(Luke Jerram)이 시작한 ‘스트리트 피아노’ 프로젝트의 일환이거나 혹은 그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져 놓인 것이다. 루크 제람과 그의 동료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강변, 인도 한구석에 “Play Me, I’m Yours”라고 적힌 피아노를 가져다 두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던 이들,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이들의 연주를 듣거나, 그들의 임시 공연장 앞에 잠시 머물며 음악을 경청하고 다시 떠난다.
불현듯 이들의 공연을 듣게 된 청중들은 음악가들에게 자발적인 기부를 하곤 한다. 이런 버스킹 공연은 거리의 소리를 음악으로 탈바꿈해 도시의 소리 풍경을 바꾸어 놓고, 때론 공연장에서만큼의 깊은 감동을 청중들에게 선사한다.
콘서트홀에서부터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를 지나 음악가의 집, 음악감상실, 음악 카페와 다방 그리고 거리로 이어지는 다양한 음악 청취 공간들까지,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시대의 음악을 듣고 즐기고 있고, 이 서로 다른 공간들은 그 음악들을 듣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실과 분리된 환상적인 공간부터 일상과 맞닿은 곳까지, 넓게 포진해 있는 이 음악 공간들은 오늘날의 동시대 음악문화가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로운지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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