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길 없는 길을 찾는 서예가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

한국 서예 대가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은 1996년 53세 때였다. 그의 나이를 상징하는 53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26세에 서예에 입문한 뒤 27년 만의 일이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9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일중서예상 수상자 초대전’을 열었다. ‘제8회 일중서예대상 수상자 근원(近園) 김양동(金洋東) 초대전: 품격(品格)과 파격(破格)’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초대전은 백악미술관 1층에서 3층까지 전층을 전시 작품으로 메웠다.
전시는 꼬박 2년을 준비했다. 2022년 일중서예상을 받은 후부터 준비한 초대전이다. 일중서예상은 한국 서단(書壇)을 대표하는 일중(一中) 김충현(1921∼2006) 선생의 예업을 기리고자 2008년 제정됐다. 일중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는 한국 서예 발전에 이바지한 원로 서예가에게 격년으로 상을 수여해 왔다. 수상자는 2년 후 초대전을 연다.
근원의 서예를 두고 한국 서단은 ‘서예의 지평을 넓혔다’라고 평가한다. 지필묵에 안주하지 않고 전각, 글씨, 그림을 하나의 화면에 창조적으로 담아내는 ‘각(刻)·서(書)·화(畵)’라는 새로운 장르도 개척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필라델피아 뮤지엄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계명대박물관 등에 주요 작품이 소장돼 있다.
그의 예술적 관심은 서예에 머물지 않고 확장돼 한국 시원(始原) 문화에까지 가닿았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30여 년 넘게 연구한 그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의 ‘빗살’은 머리빗[櫛紋]이 아닌 햇빛의 ‘빛살’이라는 주장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2015년 이런 내용을 정리해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지식산업사)을 펴내기도 했다.
5월 14일 전시장을 찾았을 때, 그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서예와 전각으로서 나의 작업은 시작됐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내 표현의 욕망과 용량이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서예, 곧 필묵의 세계를 재해석해 새로운 내용과 형식의 서예를 설계한 작업으로 근원 예술의 특질을 가늠하는 대표작 70여 점을 죽기 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하고 남겨 놓으려고 한다.”
81세에도 ‘길 없는 길’을 찾는 그에게서 생물학적 나이의 한계를 넘어 도전하는 방송대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여든을 넘어선 그가 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일까? 그를 만나 서예와 예술, 품격과 창조의 의미를 들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경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 한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계명대 미술대학 교수로 정년퇴직을 했으며, 계명대 미술대학 석좌교수로 있다. 지은 책은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이 있다. 동아미술상(1983), 석재문화상(2017), 이중서예상 대상(2022) 등을 수상했다.
예술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생명이 있습니다.

작가의 안주는 의식의 정지와 같기 때문에

‘파격’을 주제로 선택한 것은 의식의 날을 세우려는

제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방송대를 선택하신 분들 역시 본인의 눈과 실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이번 초대전은 ‘대형 개인전’이기도 한데, 주제가 흥미롭게도 ‘품격과 파격’이었습니다. 이 주제 자체가 선생님 서예의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파격을 주제로 담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예술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생명이 있습니다. 작가의 안주는 의식의 정지와 같기 때문에 의식의 날을 세우려는 제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초대전은 2022년 일중서예상을 받은 후부터 2년을 준비한 전시였습니다. 각(刻)·서(書)·화(畵) 경계를 넘어 통섭적 작업으로써 ‘한국식 비빔밥’과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셨는데요. 내용과 표현 방법, 재료의 선택을 혼융하되 ‘작품의 내구성’만은 철저히 중시했다고 밝히셨습니다
서화(書)의 바탕이 되는 화선지는 수명이 짧습니다. 길어야 30~40년이죠. 그러나 한지(韓紙)는 견뢰도(堅牢度)가 뛰어나 오래 갑니다. 예로부터 ‘견(絹) 오백 년, 지(紙) 팔백 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특히 해방 전 한지, 흔히 말하는 조선지(朝鮮紙)라는 걸 구해서 씁니다. 조선지는 닥을 분말로 만들어 화학적 표백을 한 요즘의 한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유질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햇볕 표백을 한 것이어서 중성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 내구성은 정말 뛰어납니다. 그렇게 접근해야 한국의 고유한 한지가 지닌 물성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토채(土彩)로 붓질해 분청의 맛을 끌어올려 토속미를 드러나게 처리할 수 있어요.

26세에 서예에 입문해 53세에 첫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이어서 81세에 대형 개인전이랄 수 있는 이번 초대전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전을 매우 드물게 연 이유가 있는지요
첫째는 경제적 문제라는 현실적 사정을 꼽아야겠죠. 개인전은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준비 기간이 길고 전시 기간은 짧습니다. 흔히 전시만 생각하는데, 준비와 제작에 요청되는 공력이 엄청납니다. 이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도 결코 무시할 수 없죠. 둘째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인데, 작품 내용과 형식에 있어 새로움이 없는 개인전을 반복해서 열 필요가 있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뻔한 개인전을 할 바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죠.

50년 넘게 서예가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선생님에게 서예는 어떤 의미인가요
네, 종종 받는 질문인데요, 서예는 제 삶의 중심축이자 정신적 기둥이지요. 저는 서예를 제 삶을 담아내는 향기로운 그릇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서예평론가인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은 ‘근원의 예술은 길 없는 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미 나 있는 익숙하고 넓은 길을 거쳐, 인생 후반기에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자등명(自燈明)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평가했는데요. 사실 ‘길 없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고독하고 힘겹다는 뜻 아닌가요
이동국 관장의 그러한 평가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과찬이 좀 있습니다. ‘길 없는 길’을 찾아가는 고독과 힘겨움은 예술가들만이 느끼는 특권이지요. 익숙한 길은 설렁설렁 가기 쉽지만, 낯선 길에 대한 개척적 탐구심과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조형 미감을 찾아보는 묘미 때문에 힘든 것을 도리어 즐기는 예술을 하고 있죠.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인 유예(劉藝)는 저의 예술에 대해 “새로운 구상과 빼어난 사고(思考), 이것은 특별히 좁은 곳을 여는 것이지 익숙한 길로 쉽게 달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을 언급하면서, 모든 예술가들이 선배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또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다고 했는데요. ‘근원 서예’의 형성에도 선배들의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로부터 영향을 받으셨나요
네, 물론입니다. 역사와 전통에서 배우고 스승과 선배로부터 배운 결과죠. 저는 심지어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미술에서 동치(童稚)의 미학을 배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승 철농(鐵農) 이기우(李基雨) 선생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2013년 ‘성철 스님 법어 서화전’에서도 한국 시원(始原) 문화의 상징을 차용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번 초대전에 선보인 작품들도 상당수가 그런 요소를 담고 있었고요. 서예에 기반을 둔 ‘근원 예술’의 핵심이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과 닿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점입니다
제가 서예·전각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미술의 원형질이 신석기시대 문양이고, 그것은 천손족(天孫族)의 원시 사유가 투영된 ‘빛살무늬’라고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즐문(櫛文) 또는 ‘빗살무늬’로 불러오던 일본식 명칭의 오류를 바로잡아 ‘빛살무늬’로 정명(正名)함으로써 한국미술의 원형은 ‘환하고 밝은, 밝음의 미학’이라고 그 철학적 배경을 확실하게 천명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각(刻)·서(書)·화(畵) 삼법을 혼융해 작업하다 보니 배경에는 자연스럽게 빛살무늬의 흔적이 나타나 한국 시원 문화의 상징을 차용하게 됐습니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들도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햇살과 사람, 문자가 서로 조화를 이룬 게 많은 이유이기도 하죠.

다음 개인전은 언제 여실 계획인가요
젊을 때와 달라서 작업할 때 무엇보다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장시간 허리를 굽혀 작업하니 힘이 많이 부치더군요. 다음 개인전은 기약이 없습니다.(웃음) 생애를 마칠 때까지 ‘빛살무늬 작가’로서 3백호 이상 대작을 많이 제작하려 합니다. 작업 보조 도우미도 좀 쓰려고 합니다.

81세에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파격’을 모색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방송대 역시 70대, 80대 나아가 90대 초반의 고령 학우들이 많이 재학하고 있는데요. 이분들을 위해 그리고 젊은 방송대 학우들을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방송대가 우리 사회의 교육 약자에게 희망의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는 것, 나아가 인생을 바꾸는 대학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파격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파격이 품격을 지니면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70대 이상 고령 학우라는 자체가 이미 파격이고 젊은 영혼을 가졌다는 위대함이죠. 저 역시 70세에 컴퓨터를 배워 73세 때 『한국 고대문화 원형의 상징과 해석』이라는 책을 지식산업사에서 펴냈습니다. 예술가의 미덕은 본인의 눈과 실력으로 당대의 문제의식을 읽어내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송대를 선택하신 분들 역시 본인의 눈과 실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것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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