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금력이 곧 권력이다. 돈은 용처나 가치에 있어서 압도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들이 군대 유지에 필요한 자금이 모자라 부유한 가문에 손을 내밀어야 했음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의 하나도 막대한 군인들의 월급으로 사용된 ‘은 부족’ 때문이었다. 영국이 중국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아편을 제공하고 마침내 양국 간에 전쟁이 야기된 배경에도 당시 기축통화인 은화의 부족이 시급한 현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이 지닌 악마적 힘이 문제며, 유사시 위험 요인이 된다. ‘돈 없이 되는 것은 없다’거나 심지어는 ‘돈이 말을 한다’는 말들이 유행하는 이면에는 내키지 않아도 금권의 위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정서가 내재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재화라는 권력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 다시 말해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축적된 재화를 입신양명이나 출세 등의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별도로 문화예술의 발전에 투자함으로써 인류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금력이 곧 권력과 동격임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본다. 메디치 가문의 부가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일으켜 세운 성공적 권력으로 기능한 것은 여러모로 축복이랄 수 있다.

한때 학계가 아닌 기업에서 ‘메디치 경영’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서로 이질적인 분야들을 접목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는 기업의 경영방식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전문성을 지닌 예술가, 시인, 철학자들이 상호 활발하게 교류해 창조적 결과를 생산한 데서 이 용어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다섯 세대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들이 축적한 재력을 바탕으로 해서다. 그들의 엄청난 부는 금융업, 정확히는 대부업을 통해 형성됐다. 기독교 신앙이 절대적이던 중세 서양의 타이폴로지(typology, 유형학)에 따르면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뉘어졌다.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전쟁하는 사람(기사), 쟁기질하는 사람(농민). 이들 이외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장사꾼같이 돈을 만지는 것들, 돈놀이 ‘치’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런 시기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돈은 언제나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유럽의 음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인의 식탁에 기본이 되는 포크의 사용도 그녀 덕분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규모 향연에서 우아하게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포크를 주목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귀족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메디치 가문
그 위력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남겼다. 말년의 이 위대한 예술가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평생의 재산인 원고 묶음, 스케치, 그리고 몇 점의 그림을 들고 클로리세성, 앙브아즈성에서 3년가량을 머물렀다. 그 시절의 작업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를 만든 것도 메디치 가문이고, 나를 파멸시킨 것도 메디치 가문이다.”
인근 도시 시에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마침내 피렌체 르네상스를 이룩한 가문이 메디치다. 은행업으로 부호가 된 이 집안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자신들의 가문에서 교황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도 메디치 가문이었다. 문화예술에 미친 이들의 긍정적인 영향은 절대적이다. 일군의 작가들을 휘하에 두고 예술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를 후원인(patron) 제도라고 부른다. 당연히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한 경합과 시기가 발생한다.
레오나르도는 찬밥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무 살 나이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식솔로 들어가 고대조각을 연구하고 여타 학문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렌초 메디치의 눈에는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10여 년의 견습 생활을 마치고 본격적 실무 작업을 시작할 즈음, 까닭은 알 수 없으나 로렌초가 레오나르도를 내친다. 이것이 다빈치가 자기소개서를 써 들고 밀라노로 떠난 배경과 원인이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생존을 위한 일자리가 절실히 필요했다.
피렌체는 현재 이탈리아 중부 내륙의 토스카나 지역의 주도다. ‘꽃의 도시’ 피렌체가 선발 시에나를 앞지르고 르네상스의 중심도시가 된 것은 메디치 가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호방한 성품과 빼어난 외모를 지닌 메디치 가문의 둘째 아들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는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종종 그들의 모델을 자처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의 모델도 바로 그였다. 피렌체가 사랑한 이 청년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피렌체의 권좌를 놓고 싸우던 파치 가문과 피사의 주교에 의해 암살당한다.

메디치 가문의 여인과 프랑스 궁정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치스(Catherine de Mdicis, 1519~1589)는 메디치 가문의 여인이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519년에 태어났다. 교황 레오 10세는 그녀의 종조부(從祖父)였으며, 레오 10세가 사망한 후 그녀의 재종조부(再從祖父)가 클레멘스 7세로 교황에 즉위했다.
그녀는 유럽의 음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구인의 식탁에 기본이 되는 포크의 사용도 그녀 덕분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규모 향연에서 우아하게 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포크를 주목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귀족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크는 16세기 유럽 궁정에서도 매우 귀한 도구였다. 포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나오지만 17세기에 와서야 엘리트 계층의 식탁에서 일상적인 식기가 됐다. 17세기 후반까지도 영국인들은 손가락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유럽 내 최고의 상류 사회인 베르사이유 궁정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포크 문화는 카트린에 의해 프랑스 궁정에 전해졌다. 후일 유럽 상류 문화의 중심이 된 프랑스 귀족사회의 음식문화는 유럽 각국으로 전파된다. 19세기가 돼서야 나이프와 스푼만으로 식사하던 유럽인들은 누구나 포크를 사용하게 된다.
카트린이 프랑스 궁정에 데리고 들어온 요리사들은 이탈리아의 식사 예절과 다양한 음식 레시피도 전수했다. 향신료, 셔벗, 마카롱 등이 그것이다. 카트린의 혼수품 중의 하나였던 마카롱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가 됐다. 당시 마카롱은 필링 없이 코크(coque)만 먹는, 오늘날의 쿠키와 비슷했다. 샌드위치 같은 현재 형태의 마카롱은 20세기 초 파리 라뒤레에서 처음 개발됐다. 이후 마카롱은 프랑스 각지에서 현지화하며 독특한 맛과 모양으로 발전했다.
마카롱은 코크라고 불리는 과자 2개 사이에 크림, 프랄린(초콜릿 크림), 잼 등을 채워 넣은 달콤한 디저트다. 코크는 밀가루 대신 아몬드 가루를 머랭(설탕을 넣어 단단하게 거품 낸 달걀흰자)에 섞어서 만든다. 가볍고 바삭하게 바스러지는 식감이 경쾌하다. 여기에 달콤하고 향긋한 필링이 조화를 이루며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마카롱은 색상도 다양해 보는 즐거움도 크다.
대단한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지만 궁궐에서의 그녀의 삶은 험난했다. 시아주버니와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의 죽음으로 차남인 남편이 앙리 2세로 즉위해 뜻하지 않게 왕비가 됐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남편인 앙리 2세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앙리 2세는 카트린과의 관계를 단지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다. 앙리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부인을 애인으로 삼았다.
그러다 남편이 마상시합 때 사고사를 당하고, 왕위를 이은 장남 프랑수아 2세와 차남 샤를 9세를 연거푸 잃는다. 국가 재정도 바닥났다. 왕권에 도전하는 기즈 가문도 골칫거리였다.

위기에서 살아남은 카트린의 힘
위기의 카트린이 프랑스 궁정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고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이다. 또한 화술도 매우 뛰어나 탁월한 정치, 외교적 능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소원했던 개신교 및 오스만제국과도 협력체계를 구축해 국정 안정과 왕권을 강화하고 위협이 되는 정적 제거에도 영어학자이지만, 뒤늦게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와 여행을 좋아해『茶의 고향을 찾아서』『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등을 썼다. 성공했다. 그 결과 아들의 왕위를 지킬 수 있었으며, 아들 앙리 3세를 폴란드 왕으로 세우기도 했다. 왕위를 승계한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섭정하게 되면서 그녀는 프랑스의 실권자가 된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47년부터 1559년까지는 프랑스의 여왕이었고, 1559년에서 1589년까지는 왕의 어머니로 군림했다.
또한 프랑스 궁정에 식사 예절과 이탈리아 문물을 도입해 이후 부르봉 왕조 시기에 이르러 유럽의 궁정문화를 주도하게 될 프랑스식 궁정문화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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