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시간을 걷다, 모던 서울

경로: 경교장  → 구 동아일보사  → 동대문운동장기념관  → 몽양 여운형 서거지

 

1945년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 방안을 두고 국내외 정치세력 간에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면서 분단이 확정되는 1948년까지의 역동적 시기를 ‘해방정국’이라 부른다. 서울은 해방정국의 분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동시에 분열을 극복하려는 시도들 또한 같은 시공간 내 존재한다.
그렇다면 분열이 어떻게 촉발되고 확산했는지, 당시의 통합론은 현재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톺아보는 데서 역사적 성찰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첨예하게 대립했던 해방정국 속에서도 통합의 시도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분열을 걷고 통합을 상상해 보는 과정은

결코 혼자 걷는 길이 아닐 것이다.

분단극복과 남북통합의 실마리를 고민하는 이들과

통합의 길 위에서 함께 만나길 바란다.

 


 

경교장-통일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비행기 한 대가 착륙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요인들이 몸을 내렸다. 국외 독립운동의 상징들이 해방된 조국 땅을 밟는 순간치고는 초라했다. 일제 패망 이후 한반도 이남에 진주한 미군에게 존재 자체로 경계 대상이었을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런 임정이 해방정국의 굵직한 사안들을 논의하고 실천한 장소, 김구의 활동공간이자 임정의 집무실이 있던 곳이 바로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본래 일제강점기 부호 최창학에 의해 1938년에 건축된 저택이었다. 오늘날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에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서 올려다보면 병원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강북삼성병원으로 올라오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경교장 1층에는 당시 임정 응접실과 선전부 활동공간이 재현돼 있다. 임정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곳이 바로 응접실이다. 귀국 후 첫 번째 국무위원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27일, ‘신탁통치 왜곡보도’ 사건이 발생하며 해방을 맞은 한반도 공론장은 또다시 외세의 손 아래 놓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혼란스러워진다. 탁치반대 운동이 전개된 배경이며, 이 반탁운동의 선봉에는 임정이 있었다.
경교장의 2층 테라스는 김구가 38선 이북으로 넘어가기 전, 이를 만류하는 사람들 앞에서 남북대화의 당위를 연설했던 곳이다. 남북협상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내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다. 그럼에도 ‘통일을 향한 염원’을 멈추지 않던 백범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에 숨을 거두고 만다.
조국 독립, 통일 조국에 평생을 바친 인물은 결국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았기에 기울어진 정국에서도 남북협상이라는 화두를 주창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경교장을 찾아 김구를 기리는 데는 ‘자주적 문화 창달’, ‘한반도 평화통일’이라는 그의 신념에 대한 공감과 현재적 유효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역사적 진실 앞에 선 저널리즘의 운명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구 동아일보 사옥은 일제강점기 모습 그대로 보전돼 있어 과거의 자취를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이곳은 현대사의 질곡을 오롯이 새긴 곳이기도 하다.
1920년 3월 5일에는 조선일보가, 4월 1일에는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이 탄생했다. 다른 두 신문과 달리,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은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하지만 창간 4년 만에 친일 문학인 춘원 이광수가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을 통해 ‘자치론’을 주장하며 신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민족의 오랜 염원인 해방을 맞자 부일 협력자들은 위기를 맞는다. 1945년 9월 창당된 한국민주당에는 퇴색한 민족주의자들이 모여들었고, 당시 동아일보는 ‘한민당 기관지’라 불릴 만큼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해방 이후 소련의 한반도 점령 야욕을 강조해 온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27일 1면 머리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을 보도했다. 미국이 먼저 주장한 신탁통치안이 소련의 안으로 왜곡되며 국내에서는 반소·반공주의가 들끓게 됐다.
‘찬탁=매국, 반탁=애국’이라는 논리 아래 친일 이력이 있는 자라도 반소·반공을 주장하면 애국자가 될 수 있었다. 신중한 정세 판단이 어느 때보다 요구됐지만, 일부 언론과 정치인은 대화와 협력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희생시켜가며 자신들의 영향력 회복에 주력했다. 분열이 극대화한 데는 무책임한 저널리즘의 역할도 한몫한다.
오늘날 구 동아일보 사옥에는 일민미술관이 들어서 있는데, 이 건물 5~6층에는 ‘신문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신문의 역사’ 전시장에는 “좌익계 신문들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한국을 5년 동안 신탁통치하는 안을 찬성했다. 미군정은 허위 과장기사로 군정을 공격하던 좌익계 신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와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경교장에서 발길을 광화문 사거리로 돌려 종로로 내려오면서 마주치는 구 동아일보 사옥은 역사와 언론의 어제와 내일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동대문운동장기념관-운동장을 메운 해방정국의 아우성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1925년 5월에 서울 인구 25만 명을 기준으로 기공해 1925년 10월에 준공될 당시에는 ‘경성운동장’으로 불렸고, 1945년에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됐다가 1985년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1945년 12월 이곳에서 열린 임시정부 귀국 환영 행사에는 무려 15만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하지만 곧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 해석을 두고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자 그 양상은 서울운동장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임시정부 우익이 주도하는 ‘신탁통치반대국민대회’가 1945년 12월 31일 이곳에서 개최되면서 동대문 일대에는 반탁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대규모집회가 1946년 14회, 이듬해 9회 열릴 만큼 서울운동장은 해방정국의 성토장으로 기능했지만, 좌와 우가 함께 모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해방 후 처음 맞는 1946년 3·1절 기념행사를 놓고 공동개최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문화관광지 조성, 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2007년 마침내 동대문운동장은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몇 년 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섰다. 과거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DDP 구석의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념관이 소개하듯 “이곳에 기록하는 운동장의 역사는 곧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속 치열했던 시간의 기억”이다.
공교롭게도 남북통합을 주창한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의 장례식은 모두 이곳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졌다. 좌우합작이 꺾이고 단독정부가 현실화한 시기였지만, 두 인물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좌우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운동장을 덮었다. 화려하고 북적이는 DDP의 구석에 있는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서 그 시절 광장을 메운 외침들을 떠올려 본다.

몽양 여운형 서거지-차이를 극복하려는 사랑
“나뉘면 쓰러질 것이오, 합하면 일어서리라.”
종로구 혜화동로터리 우체국 앞, 조그만 벤치 옆에 서 있는 비석에 적힌 문구다. 이곳은 몽양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 장소다. 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다채롭지만, 결국 몽양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통합’이 아닐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 상태로 결렬되면서 단독정부론이 고조되자 좌익과 우익 내 일부 세력들이 머리를 맞댔다. 임정 시절부터 합작을 경험한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다시 뭉친 것이다. 신탁통치, 친일파 청산 문제로 견해차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통일국가’라는 대의 아래 끈질긴 대화를 통해 이들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가장 현실적 방법이라는 데에는 공감했다.
비록 좌익의 분열 등으로 좌우합작은 금세 위기를 맞았지만, 여운형은 우익이 동조할 수 있는 내용을 최대한 마련하며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듬해 7월, 혜화동에서 여운형이 암살당하며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끝내 해산하고 만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 나가는 것”이 사랑의 목표라고 말했다. 모든 사랑은 갈등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데, 그렇다면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공통점에 매달리는 게 아닌 차이를 극복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나가는 데 있을 것이다. 해방정국 속 여운형은 이런 정의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 사랑의 지향점은 민족의 독립과 통일된 조국이었다. 사망 전까지 열한 번 테러 시도가 있었고 열두 번째 저격에서 운명을 달리한 그의 정치적 삶이 시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끊임없는 테러 시도에도 그가 견지했던 신념의 순도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첨예하게 대립했던 해방정국 속에서도 통합의 시도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분열을 걷어내고 통합을 상상해 보는 과정은 결코 혼자 걷는 길이 아닐 것이다. 평화와 공존, 또 그것의 실현은 우리 공동체가 꾸준히 고민해야 할 숙제와 같다. 분단극복과 남북통합의 실마리를 고민하는 이들과 통합의 길 위에서 함께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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