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바야흐로 영양 과잉의 시대다. 과식도 모자라 영양보충제까지 챙겨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인에게는 낯선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영양소 하나의 결핍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이 있다. 바로 각기(脚氣, Thiamine deficiency, Beriberi)다. 각기에 걸리면 다발성 신경염에 의해 다리(脚)의 신경마비를 비롯한 운동장애, 지각장애 등이 나타나며, 염증이 심장으로 퍼지면 일종의 심부전인 충심(衝心)으로 급사에 이르기도 한다. 이 질병은 감염병이 아닌 탓인지 그다지 잘 이야기되지 않지만, 근대 의학과 영양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각기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특히 일본에서 피해가 컸다. 고대 일본의 전설 속 영웅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가 일본 최초의 각기 환자라 여겨질 정도로 각기는 일본 역사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늦어도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84)에는 출현해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에 귀족 사이에 많이 발생했고, 이후 발병이 감소했다가 전란이 그친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흰쌀밥을 쉽게 접한 무사나 부유층 중심으로 퍼졌는데, 주로 에도(현 도쿄)에서 유행해 ‘에도병’이라 불렸고, 당대 최고 권력자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쇼군)도 피할 수 없어 역대 쇼군 15명 가운데 4명(제3, 10, 13, 14대)이 각기충심으로 사망했다.

일본의 각기 논쟁은 전통 학문의 말살과

일부 엘리트의 오만이 어떤 폐해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도쿄대학 의학부 출신 군의 수뇌부는 일본군 ‘대학살’도 모자라

자국 의학과 영양학의 발전을 저해했다.
모방과 사대(事大)에 골몰하고 환자를 도구로 보는 풍조가
과연 남의 일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가?

 

 

서양의학 도입한 일본 의학계의 첫 과제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 들어서자 각기는 ‘국민병’으로 맹위를 떨치며 큰 사회 문제가 됐다. 현미에 모래를 섞어 정미하는 혼사정미법(混砂精米法)이 보급돼 흰쌀이 비교적 흔해졌고, 특히 농촌에서 상경한 청년들에게 흰쌀밥은 동경의 대상이어서 흰쌀밥만 먹을 수 있다면 반찬은 단무지와 약간의 채소 정도로 족했다. 오로지 흰쌀밥 때문에 입대한 자도 많았으며, 징병제 시행 후 군대는 각기의 온상이 됐다. 메이지천황과 황족도 각기에 시달렸으니 국가적 재난에 준하는 사태였다. 그러나 해결은 요원했다. 각기는 서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질병이었기에 근대 서양의학 도입 이후 일본 의학계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이기도 했다.
각기와 오랫동안 씨름한 일본의 한방의학은 이미 각기 전문의를 배출할 정도로 임상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는 한방의학의 박멸을 추진하고 있었고, 서양의학을 배운 의학자는 한방의학을 비난하고 무시했다. 1877년에 발발한 일본 최후의 내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서도 각기 환자가 속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각기를 앓던 메이지천황은 당시의 ‘치료법’인 전지요법(轉地療法)을 거절하고 각기 전문의 도다 조안(遠田澄庵, 1819∼1889)의 치료법을 포함한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협력을 통해 근본적인 각기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이에 위생국장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 1838∼1902)는 도다에게 치료약 공개를 요청했으나 도다는 비방(方)이라며 거부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양의사와 한방의사 각 2명이 각기 환자의 치료 성적을 겨루는 ‘도쿄부립각기병원’이었다. 이는 ‘한양(漢洋)의 각기 스모’라 불리며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지만, 명확한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병원도 문을 닫았다. 서양의사들은 도다의 요법이 쌀밥을 멀리하고 보리밥 등을 먹는 것임을 알고서는 미신이라 조롱했다.
1880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해군 군의 다카키 가네히로(高木兼寬, 1849∼1920)는 각기가 발생하지 않는 영국 해군의 식단에 주목해 일본 해군의 단백질 섭취 부족이 각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생각은 틀렸지만, 1884년 원양 항해에 나선 군함의 병식(兵食)을 양식으로 바꾸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전년의 경우 371명 중 160명이 각기에 걸려 25명이 사망했지만, 이번에는 겨우 14명만이 각기에 걸렸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군은 이시구로 다다노리(石忠悳, 1845∼1941)를 필두로 해군의 성과를 무시하고 독일 의학자의 의견에 따라 각기가 감염병이라 주장했다.

일본 육군 군의본부와 도쿄대학 의학부
다른 한편으로 1881년, 예산 삭감으로 일본 전국 감옥의 규칙이 변경돼 죄수에게 쌀밥 대신 보리밥이 지급되자 감옥 내 각기 발생이 거의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주목한 오사카육군병원장 호리우치 도시쿠니(堀內利國, 1844∼1895)가 서로 멀리 떨어진 효고(兵庫)와 오사카(大阪)의 감옥에 각각 질문서를 보냈다. 두 감옥 모두 보리밥이 지급된 해부터 각기 환자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오사카 육군의 병식을 보리밥으로 바꿀 것을 요청해 결국 1884년 12월부터 보리밥 지급이 시작됐다.
그 결과는 획기적이었다. 1884년에 병사 1천 명당 353명이었던 각기 환자가 1885년 1천 명당 13명으로 격감한 것이다. 이 성과는 이듬해 도쿄의 황거(皇居)를 경위하는 고노에사단(近衛師團)에서 채용돼 다시 효과가 입증됐고, 1891년까지 일본 본토 내 전 부대로 확산했다. 1885년에 해군도 보리밥을 도입했다. 빵 지급이 녹록지 않아 그나마 ‘단백질 함량이 높은’ 보리밥을 택한 것이지만, 어쨌든 성과는 얻은 셈이다. 보리밥을 먹기 시작한 메이지천황도 각기가 재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육군 군의본부의 이시구로는 서양의 학문에 비춰 보리밥 섭취는 말도 안 되고 “군의가 한방류의 미신에 따르는 것은 괘씸”하다며 각기가 감염병이라고 완고하게 주장했다. 그의 배후에는 도쿄대학 의학부가 있었다. 1885년, 그런 이시구로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세균학자 오가타 마사노리(方正規, 1853∼1919)가 각기의 병원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득의양양한 육군 군의본부와 도쿄대학 의학부는 호리우치와 해군의 다카키를 공격했지만, 실상 ‘각기균’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시구로는 1890년 육군 군의총감과 육군성 의무국장에 취임해 군의의 최고봉에 올랐다.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시 최고 통수 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되고 산하 육군부 야전위생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역시나 그도 백미를 수송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보리밥으로 각기를 치유한 경험이 있는 대본영 운수통신장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이후 제3대 조선 통감 및 초대 조선 총독)가 보리밥 지급을 주장했으나 밀리고 말았다. 육군에 흰쌀밥을 배급한 결과도 역시나였다. 전투로 죽은 자가 453명이었던 데 비해 각기로 죽은 자는 그 5배가 넘는 2천410명이었다(각기 환자는 약 4만8천 명). 보리밥을 먹은 해군의 경우 각기 환자 33명, 사망자 3명에 불과했다. 전후 육군의 각기 대량 발생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이시구로는 끝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평시로 돌아온 일본 군대는 다시 보리밥을 먹었고, 각기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1899년, 육군성 의무국장 고이케 마사나오(小池正直, 1854∼1914)는 각기 치료와 보리밥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이듬해 전국 군의부장 회의에서 이를 훈시했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각기 치료제 내놓았지만 조롱 계속돼
그러나 역사는 반복됐다. 전지의 육군 병사는 흰쌀밥을 먹고 죽어갔다. 러일전쟁 전체 전사자 약 4만7천 명 가운데 각기 사망자만 약 2만8천 명이 나올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환자 수 약 21만2천 명). 고이케가 보리밥 지급을 포기하도록 뒤에서 맹렬히 압박한 인물이 있었다. ‘대문호’ 모리 오가이(森鷗外)로 잘 알려진 제2군 군의부장 모리 린타로(森林太, 1862∼1922)다. 그 역시 이시구로급의 고집불통으로, 고이케의 자리를 물려받은 후에도 한결같이 보리밥을 거부했고, 이후 조직된 임시각기병조사회 회장을 맡으면서도 보리밥의 효능을 매장하는 데 급급했다.
학계에서는 각기에 유효한 영양 성분 추출 경쟁이 벌어져 육군 군의 스즈키 진노스케(都築甚之助, 1869∼1933)가 쌀겨에서 엑기스를 추출해 1911년 각기 치료제 ‘안티베리베린(Anti-Beriberin)’을 내놓았지만,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장 아오야마 다네미치(靑山胤通, 1859∼1917)는 “각기가 쌀겨로 낫는다면 소변을 마셔도 낫겠다”라며 조롱했다. 그에 앞서 1910년, 농화학자(農化學者) 스즈키 우메타로(鈴木梅太, 1874∼1943)가 세계 최초로 각기 억제 성분을 고순도로 분리해 ‘오리자닌(Oryzanin)’이라 명명했지만, 이 역시 묻혔다. 그렇게 티아민(비타민 B1) 발견의 공은 뒤늦게 발견한 서양으로 넘어갔다.
일본의 각기 논쟁은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의료사』등을 쓰고,『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옮겼다. 전통 학문의 말살과 일부 엘리트의 오만이 어떤 폐해를 초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시구로와 모리를 비롯한 도쿄대학 의학부 출신 군의 수뇌부는 일본군 ‘대학살’도 모자라 자국 의학과 영양학의 발전을 저해했다. 그러나 비극을 촌극으로 만드는 능력 하나는 탁월했다고 마냥 비웃을 일도 아니다. 모방과 사대(事大)에 골몰하고 환자를 도구로 보는 풍조가 과연 남의 일이라고 안심할 수 있는가? 1943년, 일본 육군은 “모리가 병식을 보리밥으로 바꾼 덕분에 각기가 감소했다”라고 역사를 날조했고, 2년 뒤 패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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