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Weekly 시네마

“뛰다가 숨이 넘어가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리가 진짜 없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7월 3일 개봉한 영화 「탈주」(감독 이종필)에서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부대에서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을 연기한 이제훈 배우의 회고다. 규남은 영화 내내 직진한다. 검문에 걸려도, 늪에 빠져도, 밟는 순간 죽음일지도 모를 지뢰밭으로, 추격대를 뒤로 하고 낭떠러지 물속으로. 멈춤 없이 직진하는 규남에게서 운명을 벗어나고 싶다는 근원적 욕망이 보인다. 이는 각자 처한 치열한 상황 속에서 탈주를 꿈꾸는 여느 사람들의 욕망과 호응하며 영화의 층위를 한 단계 확장하는 힘이다. 영화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 2012)에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박열」(감독 이준익, 2017)에서는 저항하는 아나키스트로, 드라마 「모범택시」(연출 박준우, SBS, 2021)에서는 정의를 구현하는 통쾌한 캐릭터로 사랑받은 이제훈 배우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탈주」에 합류한 계기가 궁금해요
시나리오 읽었을 때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와 메시지가 분명했던 거 같아요. 사람들에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원했던 삶을 살고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지는 거죠. 그런 생각을 하던 시절을 대입해서 본다면 공감가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규남’을 보면서 저는 배우를 꿈꿨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정말 배우라는 직업을 하고 싶은데, 가족, 친구 등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렸거든요.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배우가 되는 데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무모하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너무나 불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저는 도전했어요. 그 삶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규남이라는 인물 역시 주어진 삶에 따라야 하는 건데, 가고자 하는 지점이 불확실하고 실패하더라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공가도 많이 돼서 이 작품을 선택했죠.

영화가 ‘스타일리쉬’합니다. 한 방향으로 직진하는 속도감도 느껴지고요.
장면 구성을 스토리보드에서 굉장히 촘촘하게 했어요. 사운드, 믹싱, 음악 전부 고려해서요. 영화가 짧은 시간 안에 직선적으로 표현돼서 한 번에 사람들이 체험하면 좋겠다는 감상의 목표가 있었거든요. 빠른 스피드로 전개하면서 음악도 과감하게 시도했습니다. 관객이 비하인드씬을 궁금해하면 디렉터스컷이 나올 수도 있으니 더 풍성하고 재미있을 거 같아요.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규남 전사에 배경음악으로 나와요. 호불호가 있겠지만, 이제훈 배우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 2012)에서 그런 경험이 한 번 있었어요. 극장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온다면, 이 노래를 알든 모르든 분명 굉장한 전율이 있을 거란 믿음이 시나리오 볼 때부터 있었거든요. 이번에 「탈주」 시나리오를 보면서 「양화대교」가 나오는데, 실제로도 제가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하고요. 규남의 전사와 함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에 맞춰 보여주면 왜 규남이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지 이 노래로 전달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곡을 쓰도록 허락해주신 자이언티에게 감사하죠.(웃음)

영화에서 정말 ‘죽도록’ 고생하더라고요. 대역도 안 썼다고.
제가 앞으로 이렇게 험난하게 액션을 하면서 할 작품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 없지 않을까요.(웃음) 스크린은 너무 크잖아요. 현장에서 점처럼 보여도 극장에서는 크게 보이니 대역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그런데 규남이 처한 상황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더 극단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 인물을 표현할 수 없다고 봤어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계속 뛰고, 구르고 하던데 촬영 전에 체력적으로 준비를 단단히 했을 것 같아요.
매일 운동하고, 어렸을 때부터 지구력은 운동부 빼고 최고라 자부할 정도로 자신 있었어요. 「탈주」 들어가기 전에도 당연히 할 수 있어,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를 몰아붙일 거야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어요. 착오였구나.(웃음) 마흔을 앞둔 상황에서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달리는 차를 어떻게 두 발로 따라잡나요. 그런데 규남 입장에서는 저 차를 못 따라잡으면 그 자리에서 총 맞아 죽는 거잖아요?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로 달렸죠. 그걸 제가 몸으로 표현하지 못하면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요.

 

그런데 몸에도 한계가 있고, 먹는 것도 제한이 있었어요. 영화에서는 2~3일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실제 촬영은 넉 달 가까이 했어요. 탄수화물은 거의 섭취하지 못한 채 갈수록 마른 장작,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런 극한의 상황을 돌파하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달리는 장면에서 결국 부상을 당했다고요.
풀숲을 질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너무 달리다 보니 결국 무릎이 안 굽혀지더라고요. 그때 스스로에게도 너무 화가 났어요. 스태프들에게도 너무 미안했고요. 거의 다 찍긴 했는데 아직 몇 컷이 남은 상황에서 제 무릎이 안 굽혀지니까요. 무릎이 안 굽혀지니까 나중에 본 무릎을 펴고 달리고 있더라고요. 그만큼 몰입했어요. 이종필 감독님이 이건 아니라고 오히려 현실을 자각시켜줘서 진정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계단을 내려오거나 장시간 산을 타면 오른쪽 무릎이 아파요. 앞으로 액션 영화를 하려면 보조기구를 차야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탈주」는 제게 그런 작품입니다.

 

대사 중에는 어떤 게 기억에 남나요?
“내 갈 길 내가 정했슴다”라는 대사요. 이 영화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인물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로 이어지는 대사가 되길 바랐어요. 다들 세상에 치여서 살잖아요. 각자가 설정한 목표, 꿈이 있는데, 그걸 향해 다가가는 방법과 속도가 다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영화 말미에서 질주하다가 리현상에게 잡혀 감정을 폭발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더라고요.
마지막에 현상이 제 턱 밑까지 쫓아와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너무 서글프고 슬펐습니다. 규남이 여기서 나갈 수밖에 없는 진심을, 정말 내장까지 꺼내서 보여준다는 기분이었죠. 그걸 구교환 배우 눈빛을 바라보며 연기하는데, 제가 예상하지 못한 지점을 발견했어요. 아, 내가 진짜 자유를 갈망하고 있구나 하는. 시나리오상 대사나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었죠. 그런데 한 땀 한 땀 치열하게 씬들을 찍어오면서 울분 같은 게 많이 쌓였었나 봐요. 형이 그렇게 연기를 받아줘서 감정을 다 폭발시킬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리현상’ 역의 구교환 배우와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시나리오의 대사와 표현들을 자유롭게 창작하는 배우라고 느꼈어요. 너무 재미있고 독특하면서 특별한 지점이 있는 배우죠. 특히 「탈주」에서는 립밤, 전자담배, 핸드크림 같은 단순한 설정을 넘어 독특한 매력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더라고요. 이 작품을 보면 관객들이 더 구교환 배우에게 빠지겠구나, 이미 팬이라면 더 이상의 출구는 없겠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번에는 배우 대 배우로 만났지만, 구교환 배우가 장편영화 연출을 준비 중이라서요. 감독 구교환과 배우 이제훈으로 만날 날을 기대합니다. 형이 시키는 거 다 할 테니 불러달라고 이야기는 했는데, 아직 확답은 안 주더라고요.(웃음)

동혁 역의 홍사빈 배우와는 어떠셨어요?
홍사빈 배우 역할이 컸어요. 규남의 계획에서 동혁이 하는 일들이 어찌 보면 미울 수도 있거든요. 규남이 이루고자 한 목표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규남은 아무리 힘들어도 주변을 돌아보며 나누는 마음씨,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걸 동혁을 통해 드러낼 수 있었어요. 제가 동생이 없는데, 만약 있다면 이런 존재이지 않을까 싶었죠. 너무 귀엽고, 또 성실하게 연기를 잘해요. 「탈주」 촬영 중에 다음 작품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정말 당연하다, 기대되는 배우다, 쉬지 않고 작품을 계속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홍사빈 배우 역시 배우를 꿈꾸면서 저처럼 쉽지 않았다는 게 느껴져서인지, 굉장히 노력하고 몰입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이종필 감독은 어떤 스타일이던가요?
감독님을 만나서 이 영화의 목표지점이 너무 명확하단 걸 발견하고는 아, 이제 우리는 달리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배우로서는 규남 캐릭터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궁금하잖아요. 감독님께 여쭤봤는데, 엄청 두꺼운 페이퍼를 보여주시면서 규남의 전사를 설명해주더라고요. 촬영 전날이면 다음날 찍을 장면들에 대해 규남이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지를 장문의 문자로 보내줬어요. 80회차 가까운 촬영 동안 매일요. 이런 감독이 어딨나요? 정말 대단한 거죠.

규남 캐릭터나 시나리오에 대한 이견은 없었나요?
너무 재미있는 게 이견이 없었어요. 오히려 극한의 장면을 제가 너무 보여주려고 하니, ‘됐다’고, ‘오케이’라고 계속 하시더라고요. 저도 연출한 경험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소스를 더 많이 만들어들여야 편집할 때 감독님이 편한 걸 알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해서 감독님께 안겨드리고 싶었어요.

 

배우를 꿈꾼 건 언제부터인가요?
어렸을 때 영화를 보면서부터였어요. 초등학생 때 매일 비디오가게에 가서 VHS 테이프로 된 영화를 빌려봤거든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가 선명하게 기억나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명확한 메시지 전달은 안 됐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막둥이 역할의 한석규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그 꼬맹이가 인생사를 느꼈으니까요. 당시 관객들이 한국 영화는 질 떨어진다며 잘 안 보던 시절이었는데,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8) 같은 블록버스터 나오면서 관객도 한국 영화에 열리기 시작한 거 같아요. 저 역시 한국 영화에 애정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거죠.

그렇게 원하던 배우가 됐고 인기도 얻으셨어요. 하지만 연차가 쌓이며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릴 때는 큰 스크린에 나오는 배우가 된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보면 꿈을 이룬 거긴 한데, 주연을 맡으면서는 꿈을 이룬 게 아니라 배우는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완성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것, 한 작품, 한 작품이 목숨처럼 소중해요. 평가가 더 냉정해지고 있기 때문이죠. 평론, 대중의 사랑이 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에 십지 않아요. 행복하려고 배우를 선택했는데, 갈수록 괴로운 순간을 목도할 때가 많아지거든요.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도전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 이렇게 살려는 운명인가 합니다.(웃음)

 

작년에 개인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뻔한 상황에 놓였어요. 그때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죽으면 억울하다, 좀 막 살 걸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막상 눈을 뜨니 숨이 붙어 있었죠. 그럼 이제부터 난 천천히,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거야, 할 줄 알았는데, 또 작품 하나하나에 몰두하고 있더라고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마 지금 제게 주어진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 그런 진심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관객에게 보이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소통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죠.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
다들 목표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저는 분명 노력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삶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솔직히 제게 배우에 대한 꿈을 이뤘냐고 말씀하신다면, 그 무게감, 책임감,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저는 계속 도전하고 있을 거 같아요. 도전하는 속에서 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거든요.

 

저는 100명 중에 99명이 저를 응원하더라도 1명이 응원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가 궁금해요. 반대로 99명이 싫어해도 1명이 진심으로 사랑해준다면 그걸 통해 인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고, 배우를 꿈꾸는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희망을 주는 배우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배우들을 보면서 꿈을 키운 사람이니까요.

소속사를 만드는 또 다른 도전도 하셨죠.
평생 연기할 사람이니 소속에 대한 부분이 중요해요. 소속사에서 좋은 순간도 있겠지만, 배우로서 좋지 않은 순간이 있다면 이동을 고민하게 되죠. 평생 배우할 사람이 계속 이동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헤어지는 걸 반복하면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소속사를 만들었는데, 저와 함께 하겠다고 의기투합해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더 무거운 책임감으로 잘하고 싶고, 배우들이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비전을 가져가고 싶어요. 배우를 평생 하고 싶은 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좋은 배우이자, 좋은 CEO시네요.
제가 배우다 보니, 배우들이 원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 정도 있어요. 소통하면서 거짓 없이 채워줄 수 있다고 보고요. 물론 다 좋을 순 없어요. 다만 나쁜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것들이 고민인데, 지금까지는 희망적으로 봅니다.

오랜만에 영화 주연으로 관객을 만납니다. 흥행 부담도 있을 것 같은데,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주연 배우로서 매 순간 흥행에 대한 부담은 있죠.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만나니 설레면서 동시에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큽니다. 보통 배우들이 개봉 당일과 1~2주차에 무대인사를 하는데요, 더 많이 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GV를 좋아하는데, 영화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 관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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