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동시대 예술 산책

음악은 소리의 높낮이, 장단, 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하여 목소리나 악기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예술이다. 여기서 음악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동시대 예술 현장을 둘러보다 보면 ‘사운드 아트’라는 말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이 말은 음악회장보다는 전시장에서, 그 어떤 장르의 음악과도 비슷하지 않은 소리를 들려주는 작품에서, 때론 소리를 중심으로 영상과 텍스트 등 다른 매체들이 동반된 설치물에서, 또는 누군가의 프로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을 ‘작곡가이자 사운드 아티스트’라고 칭한다. 사운드 아트라는 말에서 사운드는 소리를, 아트는 예술을 뜻하니 이 말 또한 ‘소리의 예술’을 의미하는 듯하다. 같은 의미를 지녔으니 음악과 사운드 아트는 같은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사운드 아트 작품들도

전통적인 음악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다양한 소리들을 작품화했다.

이들은 보통의 음악과는 다른,

낯설지만 흥미로운 청각적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그 소리가 우리 사회 속에서 지닌

상징적 의미와 문화적 맥락을 고민하게 만든다.


낯선 소리들
이제껏 음악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주로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였다. 물론 이들이 음악에서 들려오던 소리의 전부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오케스트라 작품 「1812년 서곡」에서는 대포 소리가 곡의 일부로 포함된다. 특수한 효과를 내는 타악기 중에는 천둥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 ‘선더 시트’, 바람 소리를 묘사하는 악기 ‘윈드 머신’도 있다. 프랑스의 작곡가 에릭 사티는 「퍼레이드」에서 타자기와 탭 댄스용 구두, 총, 물이 든 유리병 등을 연주하며 일상적인 소리들을 음악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20세기를 지나오며 유럽의 여러 작곡가들은 음악의 재료를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낯선 소리들을 음악의 영역으로 포섭했다. 그 과정에서 연주자의 숨소리나 손톱으로 건반을 긁는 소리, 클라리넷의 키를 누르는 소리가 음악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음악적인 소리’의 영역은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1913년,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화가이자 음악가였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는 ‘인토나루모리(Intonarumori)’라는 신기한 장치를 발표했다. 이는 소음을 연주할 수 있는 ‘소음 악기’였다. 악기로 연주하는 소리는 보통 음악적인 소리, 즉 소음이 아닌 ‘악음(樂音)’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루솔로는 이 관점을 뒤바꿔 소음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발명한 것이다.
루이지 루솔로가 소음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제작했다면, 그로부터 약 40년 뒤의 존 케이지(John Cage)는 소음을 음악적으로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4분 33초」(1952)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1950년대 초, 케이지는 일본 승려로부터 선불교 사상을 접하고 중국의 고서『주역』에 많은 영향을 받아 ‘우연성’을 음악에 적극 도입하기 시작했다.「4분 33초」 또한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음악가는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지만,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 4분 33초 동안 크게 움직이지도, 소리내지도 않는다. 악보에는 ‘침묵’이라는 단어만이 적혀있다. 연주자가 침묵을 연주하는 동안, 관객들이 듣게 되는 것은 약간의 웅성거림, 연주회장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던 공간음, 누군가의 기침 소리 같은 것들이다. 연주를 하지 않더라도 그 시간에는 늘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가득했고, 존 케이지는 그 침묵의 순간을 가득 채우는 다채로운 소리를 들어보기를 제안했다.
루이지 루솔로의 ‘인토나루모리’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음악사에서도, 미술사에서도 한 번쯤 언급되는 중요한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음악 작품’ 혹은 ‘미술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들은 음악에 준하는 청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소리를 주요한 재료로 하지만, 이제까지 음악이 기대왔던 관습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작품은 소리의 재료와 종류도, 들어야 할 대상도, 소리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방식도 음악과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소리와 청취 경험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작품들을 ‘미술’이라고 통칭하기도 어려웠다. 이들은 그 어느 틀에도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경향의 작품들이었다. ‘사운드 아트’는 이런 작품들이 위치한 새로운 중간지대에서 탄생했다.

자연의 소리, 도시의 소리, 문화의 소리
앞서 살펴본 다양한 작품들은 주제도 형식도 서로 다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청취의 ‘대상’을 바꿔보려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악기 연주 소리가 아니라 자연 깊은 곳의 소리를, 도시 생활 속에서 들려오던 소음을 귀 기울여 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노르웨이의 예술가 야나 빈데른(Jana Winderen)은 깊은 바닷속이나 얼어붙은 수면 아래의 소리를 채집하고, 그 안의 유기체들을 관찰해 왔다. 수중에서 녹음할 수 있는 장비를 들고 필드 트립을 떠나, 고요하리라고 생각했던 물속 소리를 포착하는 것이다.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들을 수 있던 바다의 소리는 해변의 파도 소리 정도였다. 하지만 야나 빈데른의 작업에서는 수중의 움직임을 들어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빙하들이 움직이는 소리, 물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소리, 때론 우리가 ‘물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소리도 들려온다.
해양 연구자들은 해양에서 사회관계망을 이루는 동물들이 음파를 통해 소통한다고 말한다. 음파로 이뤄지는 언어 체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해양에서의 소리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나 빈데른의 작업은 바닷속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의 다양한 소리들을 듣게 하고, 나아가 그 너머의 소리들을 상상하게 한다.
크리스티나 쿠비쉬(Chiristina Kubisch)는 자연 깊은 곳이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로 걸어나가 새로운 소리를 찾는다. 바로「전기적으로 걷기(Electrical Walks)」를 통해서다. 그가 2004년부터 전 세계 75개 이상 도시에서 선보인 이 작업을 경험하기 위한 준비물은 마그네틱 헤드폰 그리고 흥미로운 전자기장이 표시된 주변 지도다. 고대 유물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들이 오래된 지도와 망원경을 들고 자연 속을 떠도는 장면과는 정반대다. 크리스티나 쿠비쉬는 우리가 몸으로는 감각하지 못하지만 도시 환경을 이루고 있는 전자기장을 도시의 거리를 직접 걸으며 추적해 보는 시간을 제안한다. 작업을 감상하는 데 필요한 마그네틱 헤드폰은 지상 및 지하를 감도는 전자기장의 음향 특성을 증폭해서 들려주는 특별한 장치로, 이는 우리의 도시 풍경을 귀로 듣던 것과 사뭇 다르게 들려준다.
한 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에 관한 접근도 있다. 임태훈의 논문「국가의 사운드스케이프와 붉은 소음의 상상력-1960년대 소리의 문화사 연구를 위하여」(〈대중서사연구〉제25호, 2011)는 1961년에서 1968년 사이, 농어촌에 무상으로 확성기를 설치했던 앰프촌 건설사업과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울려 퍼졌던 사이렌 소리 등을 다루며 근대화 시기의 소리 풍경이 어떤 문화적 의미를 지녔는지를 분석했다. 소리에 관한 다양한 작업을 전개한 김영은 작가는 바로 이런 소리의 문화사를「붉은 소음의 방문」(2018)이라는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 작업을 만들기 위해 김영은 작가는 “사이렌과 라디오 전파에 대한 기억과 당시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뉴스, 인터뷰, 에세이 등에 등장하는 서술을 조사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의 일부에서 발췌, 참조한 문장들을 서사적으로 영상 속에 배치했다. 텍스트는 화자와 시공간을 옮겨가며 사이렌과 라디오를 이야기하고, 목소리와 음향효과, 필드레코딩 등을 통해 재구성된 사이렌과 라디오 소리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교차한다”라고 설명했다. 그 당시에만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어떤 소리의 풍경들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업이었다.

사운드 아트와 음악 사이에서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소리들을 탐구해 온 ‘사운드 아트’라는 영역은 정말 음악과 완전히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지만, 여기에 새로운 답을 내놓는 한 단체가 있다. 바로 2014년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 중인 ‘위사(WeSA)’라는 단체다. 위사는 ‘우리는 사운드 아티스트입니다(We are Sound Artists)’라는 문장을 줄인 것으로, 이들은 소리를 다루는 창작자들을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초대하지만, 좁은 의미의 사운드 아트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들은 “오디오비주얼, 실험음악, 융합예술, 사운드 아트 등 장르의 경계를 실험하고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 집중한다. 즉, 위사는 사운드 아트라는 그 널찍한 개념을 기반으로 바로 그런 모호한 지대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작업을 한데 모으고, 나아가 그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매체를 포용하며 활동한 위사가 최근 새롭게 내건 슬로건은 ‘사운드가 새로운 음악이다’(Sound is the new music)라는 것이다. 사운드 아트와 음악을 가르는 이분법적 관점이 아닌, 지금 동시대 창작자들이 만들고 있는 수많은 ‘사운드’ 작업들이 이제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음악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 도시의 소리, 문화의 소리 그리고 소리와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융합예술의 모든 면면을 ‘음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인 ‘음악’과는 분명 다르지만, 이를 음악처럼 자연스레 여길 수 있을 때 우리의 청감각은 한층 더 섬세하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사운드 아트의 출발점에는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과 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음악의 사물들』을 썼고 워크룸프레스의 ‘악보들’ 총서를 함께 쓰고 엮는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있다. 우리가 ‘소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작품들이 놓여 있다. 그 이후의 사운드 아트 작품들도 전통적인 음악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다양한 소리들을 작품화했다. 이들은 보통의 음악과는 다른, 낯설지만 흥미로운 청각적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그 소리가 우리 사회 속에서 지닌 상징적 의미와 문화적 맥락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청감각과 청취문화, 소리문화를 폭넓게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운드 아트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듣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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