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년) 제28장에서 세상 변화의 원인을 의지의 작용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의지란 모든 자연 현상의 기저에 작용하는 원천으로서 생명을 창출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니체는 인간 삶의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보았다. 후일 그의 권력의지설은 나치즘의 권력 사상을 합리화하는 반동 이론으로 악용됐으나 그의 진정성은 냉혹한 자기초극(自己超克)을 위한 내면적 사상 원리를 명백히 규정하려는 것이었지, 컨트롤러로서 타자를 지배·통제하거나 다수 민중 위에 군림하기 위한 외적 원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견 거창하거나 심오해 보이지만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언변은 뒤로 밀쳐두고, 지구상 인류는 끝없이 권력을 탐내고 추구해 왔다. 그리고 인류가 지닌 권력 욕구는 끝없는 투쟁과 갈등을 유발했다. 매슬로의 인간 욕구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에 의하면 권력욕, 명예욕, 인정에의 욕구를 망라하는 존중 욕구가 최상위의 자아실현 욕구 아래에 존재한다. 권력욕이 욕망의 최정점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이 자아실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 즉, 돈 가진 자가 권력자다. 따라서 금권이 세상을 지배한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군주
세상에는 여걸이 많다. 남자보다 똑똑한 여자도 많고 독한 여자도 많다. 권력을 쥔 여자도 원한이 맺히면 상상 못할 경천동지의 보복극 내지 한풀이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 한다. 그들의 앙심 내지 복수심과 질투심은 워낙 크고 질겨서 깃털처럼 가벼운 일에도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이 무참한 결과를 낳는다.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이탈리아 메디치가 로렌초 2세의 딸 카트린의 위그노 학살극이 그러하며, 아버지 헨리 8세 살아생전부터 마침내 여왕이 되기까지 꼭꼭 숨겨둔 보복의 결의를 마침내 실행에 옮긴 영국의 여왕 블러디 메리의 처참한 피의 숙청, 제정 러시아 예카테리나, 잔혹의 대명사로 불리는 중국의 3대 악녀 청나라 서태후, 한나라 여태후, 당나라의 측천무후의 대활극도 그러하다.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 장애물은 그 어떤 존재라도 제거해야 한다. 혈연도 예외일 수 없다. 비열하고 은밀한 계획조차 수용된다. 목적 달성을 위해 양심, 도덕, 윤리는 그들에게 있어 사치에 불과하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군주 무측천. 무주혁명(武周革命: 690년 무후가 당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등극하면서 국호를 주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에 이은 공포정치로 악명 높은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를 능가하는 여걸은 없을 듯하다. 690년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가 되어서 국호를 ‘주(周)’로 고친 후 제위에 오른 그녀는 황실과 주변 세력의 잔인하고 비열한 권력 암투를 수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황후가 되기 위해 친딸을 죽이기까지 한 비정한 어미였다. 전 황후 소생인 황태자를 모함해 폐위시키고 죽인 것은 물론 황위에 오르게 한 친아들을 겁박해 자신에게 양위토록 해 드디어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가 됐다.
그녀는 본 것이 너무 많았다. 오래 살기까지 했다. 황제가 된 그녀에게 인생의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여자인 자신을 경외의 대상으로 섬기게 할 수 있는지, 더하여 인생을 즐기는 법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아는 영악한 여걸이었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력으로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조신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카리스마를 보였다. 그것은 화려하고 요란스러웠다.

12세에 당 태종에게 발탁돼 궁중으로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 황제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武周)의 여제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무측천(武則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아명은 무미랑(武媚娘)이며, 여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로 개명했다. 12세에 입궐해 당 태종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이 ‘무미’인데, 사람들은 무미랑이라고 불렀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함께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여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라고 부른다.
그녀는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당시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돼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손봤으며,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영화 ‘적인걸’ 시리즈의 주인공인 적인걸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녀는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주자의 성리학적 정치체제를 마련했던 송나라 그리고 그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됐던 시대에 그녀가 어떻게 황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성립시킨 신해혁명을 거치며 그에 관한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파괴한 초규모의 반달리즘(문화·예술 및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행위)인 문화혁명 시기(1966~1976년) 중국 공산당 혁명의 기수 장칭(江靑)은 자신의 정치적 모델을 1,3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무측천에서 찾았다. 독재자는 누구나 절대자이고 싶어 한다.
어느 날 당 태종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조의 기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남편의 아들을 사로잡은 여자
649년 7월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9남인 이치(李治)가 동복형 이태(李泰)를 제치고 황제(고종)에 올랐다.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돼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穿照)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갔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했다고 한다. 이치는 650년 여름 분향 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랑(如意娘)」이라는 시를 지어 연정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무조는 그길로 고종을 따라 입궁했다.
낙양수석(洛陽水席)은 연회요리다. 당나라 시대 궁중 대연회를 위해 고안돼 오직 황제와 황족만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다. 특히 젊음을 권력의 축으로 생각한 측천무후가 건조한 날씨 속에서 ‘피부관리’를 위해 즐겨 먹었다고 한다. 『신당서(新唐書)』에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자신을 잘 가꾸어 측근들조차 그녀가 노쇠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당시 수도가 낙양이었으며 모든 요리는 국물이 있는 것이고, 요리를 올리고 치우는 것이 마치 물 흐르듯 이뤄진다고 해서 물 수(水)자에 자리 석(席)자를 쓴 낙양수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낙양수석(洛陽水席)은 연회요리다.

당나라 시대 궁중 대연회를 위해 고안돼
오직 황제와 황족만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다.

특히 젊음을 권력의 축으로 생각한 측천무후가

건조한 날씨 속에서 ‘피부관리’를 위해

즐겨 먹었다고 한다.

 

낙양수석, 오늘날은 12가지 요리만 취급
낙양수석은 원래 24가지 음식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측천무후가 권좌에 있던 24년의 역사적 배경을 암시하는 것이다. 현재는 대표적인 요리만 엄선해 재구성한 12가지를 취급한다. 이유는 모두가 탕요리라서 배가 불러 도저히 다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낙양수석 연회 요리는 순서에 따라 차려진다. 먼저 반찬류인 전팔품(前八品) 8개 냉채(冷菜)가 상에 오른다. 애피타이저와 술안주가 된다. 그다음 사진탁(四鎭?)으로 4개의 대표적인 요리가 오른다. 이어서 팔중건(八中件)이라 하여 8개의 뜨거운 요리(熱菜)가 나온다. 그리고 사소미(四掃尾)라 하여 4개의 뜨거운 요리가 영어학자이지만, 뒤늦게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와 여행을 좋아해 『茶의 고향을 찾아서』『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등을 썼다. 작은 그릇에 담겨 오르면서 낙양수석 연회는 마무리된다.
황실요리였던 낙양수석은 약 300년이 지난 송나라 시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민중에게 전파돼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는 요리로 자리잡았다.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이를 ‘무자비’라 부른다. 요란한 삶을 살다가 팔순을 넘겨 세상을 뜨기 전 그녀는 자신의 묘비에 어떤 글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함부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지 말고 훗날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여제의 권력 의지가 담긴 의중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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