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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석 출판평론가
〈출판저널〉 편집장과 〈기획회의〉 편집주간으로 일했고,지금은 계간 〈뉴필로소퍼〉 편집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살아 있는 도서관』 『금서의 재탄생』 『다른 생각의 탄생』 등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서울 변두리 눈 덮인 봉화산에서 썰매를 타며 하루를 보내던 소년이 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날은 집에서 빈둥거렸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서점까지 다녀왔다. 소년의 손에 들려진 책은 정비석의 『삼국지』. 여섯 권의 책이 무거울 법도 한데 소년의 눈은 웬일인지 반짝였고, 결국 아버지가 읽는 순서에 맞춰 『삼국지』를 읽고야 말았다. 소년은 가랑비에 옷 젖듯 『삼국지』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책 읽는 재미도 서서히 알게 됐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출판평론가 혹은 북칼럼니스트라고 불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리 만무하지만, 소년의 삶은 『삼국지』로 인해 큰 줄기가 바뀐 것만은 분명하다.
『삼국지』는 여전히 소년의 삶을 견인하고 있다. 이제 중년이 된 소년은 연초가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삼국지』를 읽는다. 그래야 비로소 한 해를 시작하는 것 같아서다. 읽을 때마다 번역·평역한 이를 달리했더니 읽는 재미가 한층 더해졌다. 정비석을 시작으로 이문열, 황석영, 김홍신, 김구용, 박종화, 장정일, 리동혁 등이 번역·평역한 여러 판본의 『삼국지』를 읽었다. 만화 삼국지도 빼놓을 수 없는데, 6권에서 10권 사이를 오가는 소설 『삼국지』를 읽기가 겁이 난다면, 중년이 된 소년처럼 만화 삼국지에 애정을 줘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해마다 『삼국지』를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다. 그 내용이 그 내용일 텐데, 서른 번도 넘게 읽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별 뜻 없이 책을 읽는 소년은 대답이 궁할만도 한데, 비교적 막힘없이 대답한다. 읽을 때마다 다른 세상을 경험하니 해마다 읽어도 늘 다른 책이라고. 실제로 그렇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시기, 사춘기 소년 누구나 그렇듯 소년도 친구가 세상의 전부였다. 하여 유비·관우·장비의 빛나는 형제애와 우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은 대학 가보겠다고 재수를 시작하던 무렵에는 제갈공명의 선견지명과 혜안밖에는 눈에 밟히는 것이 없었다.
IMF를 지나고 세상살이가 팍팍하다고들 할 때는 황건적이 단지 세상을 뒤집어보겠다는 도적떼로만 보이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황건적은 단지 도적떼로만 치부된 것은 아닐까. 어느 해인가는 『삼국지』에서 악역을 담당하는 조조가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철저히 악인이 돼야만 했던 조조의 진짜 모습이 서서히 재평가를 받던 시기였다. 『삼국지』는 여전히 『삼국지』였지만, 소년이 『삼국지』를 읽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책은 변하지 않지만 소년의 삶이 변했으니, 책도 변한 것이 틀림없다. 어디 『삼국지』뿐일까. 대개의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소년은 연초가 아닌 지금 『삼국지』를 품고 있다. 어릴 적 광활한 대륙을 달리며 무한한 꿈을 꾸던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서다. 생활에 찌든 중년이 된 소년은 그 시절 꿈을 반추하며,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으로 얻고 싶은 것이리라. 한 권의 책이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면, 누군가에게도 그러하지 않을까 소년은 상상해 본다.


소년은 연초가 아닌 지금 『삼국지』를 품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면, 누군가에게도 그러하지 않을까 소년은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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