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온 삶을 통해 지켜온 것, 그런 게 혹시 있다면 무엇일까요?”“글쎄, 나는 그저 내 시(詩)에 저촉되는 삶을 살지는 않으려고 했지.”지난 시월이었다. 나라시(奈良市)의 어느 전철역에서 김시종 선생을 만났다. 한 눈에도 서릿발 같은 꼿꼿함과 자상함이 함께 느껴지는 분이었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한사코 배웅을 받지 않으셨다. 아흔의 김시종 선생을 만났지만, 헤어질 때는 청년 김시종을 보았다.나의 시는 무엇일까? 언젠가 나도 나의 시에 저촉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내가 김시종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황국신민’이던 한 소년이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일본에 밀항했다는 드라마 같은 서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 일어난 공간이동도 작은 사건이 아니었지만,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보다 더 큰 변화가 존재한다고 느꼈다. 권력을 추종하던 소년에서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삶의 어떤 경계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No재팬’ 바람이 한창이던 7월 17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시인 김시종’의 인생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인생의 선물’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일곱에 해방을 맞았고 우두커니 둑방에 앉아 일본의 패전을 슬퍼했다. 일본군가와 창가를 부르다가 아버지의 무릎에서 조선어로 듣던「클레멘타인의 노래」를 무의식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대대적인 내면의 사건이었다. 그는 교육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절감했다. 해방 후 광주의 교사 양성 학교에 다니던 그는 방학에 친가가 있는 제주도로 내려갔고 4·3사건에 관여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구속했던 언어, 일본어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어딘가 어색하거나 독특한 일본어로 쓰였다. 그것은 김시종 자신에 대한 성찰과 고통의 시어인 동시에 일본어에 균열을 내는 저항의 시어다. 그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도 북한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재일교포의 삶을 ‘자이니치(在日)를 산다’는 말로 표현한다. 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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