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하고 고향에서 살고 있는 몇 명의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재미있게 놀면서 지낸다. 체력이 남아 있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철저히 자기 자신들을 위해 즐긴단다. 가슴 떨릴 때 놀아야지 다리 떨리면 놀 수 없다면서 말이다. 참 재미있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들이다.
지난해에는 칠순 기념으로 한반도 둘레길을 트레킹했다. 2024년 1월 12일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남파랑길, 서해랑길을 돌고 돌아 12월 13일에 전국의 주요 둘레길을 거의 모두 다녀왔다. 물론 곳곳의 맛집 탐방도 빼놓지 않았다. 속초 곰치국, 양양 막국수, 해남 한정식, 보령 굴구이, 부산 신선회, 포항 돼지고기 연탄구이 등등. 해파랑길 울산 구간의 신불산에 올라 간월재의 억새평원을 바라보면서 읊조린 친구(대천 최병섭)의 시 한 수!
세상사 힘겨워 감당키 어렵거든,
간월재에 올라
골바람에 몸 맡기고 영겁을 살아온 저 억새를 보거라.
세상 겁날 것 없이 당당한 친구야,
그래도
신불산 바위틈에 숨어 핀 작은 풀꽃도 보아가며 쉬어 살자.
은퇴 후 노년에는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지내도 된다. 노년기에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다. 비생산적인 것도 아니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놀고 쉬지만은 않는다. 각자의 취향과 특기를 살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글을 쓰고, 손자를 돌보고,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한다. ‘놀고 쉬고 일하고’ 삼박자를 갖추어 살고 있다. 그들은 결코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일할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노년의 ‘존엄한 삶’이 아니겠는가.
노년을 존엄하게 사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조건을 갖춰야 가능하다.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하듯, 노년기를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스스로 발급한 ‘은퇴면허증’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은퇴면허증 - 나는 노년을 살아갈 자격을 두루 갖췄으므로 내게 이 증서를 수여한다. 이 증서를 소지한 나는 어떠한 제한이나 제지 없이 행복하게 은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은퇴 면허의 조건은 무엇일까? ‘자주와 책임’, 이 두 가지다. 자녀와 국가사회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책임 있게 노년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년의 존엄을 지켜줄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다.
노년에 자녀로부터의 독립은 자주와 책임의 기본이다. 자식에게 짐이 돼서는 안 된다. 자식 보험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자식 사랑은 자식의 공부나 출세를 위해 모든 것을 털어 지원하는 게 아니라 자식에게 자신의 노후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 신세 지지 않는 삶이 자주와 책임이다. 기초 생활 수급자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복지 수급권은 국민이 정당하게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씌워지는 복지 수급자라는 오명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 정부의 지원금이 부족하니 더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것은 인생의 자주독립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주와 책임의 조건들은 운명과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생에는 운명이라는 게 있지만, 인생은 운명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노력으로 개척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대의 많은 중장년들은 은퇴 후의 상황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현역 기간만큼이나 긴 은퇴기를 그저 자투리 인생쯤으로 생각한다. 설마 내가 90이나 100세까지야 살까?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설령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책임 보험에 가입하듯 일단 90이나 100세를 살지도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노년 무전만큼 인생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안일한 태도로 인생을 살거나 향락과 소비에서만 행복을 찾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람은 어느 때나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해야 한다. 성실과 함께 필요한 것이 분수를 지키는 것이다. 젊었을 때 분수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면 노년에 파탄이 오거나 힘들어진다.
소비가 소득을 초과해서 가분수가 되면 빚을 지게 된다. 그러니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의 소비 행태를 따라 소비할 게 아니라 자신의 분수에 맞게 소비해야 한다. 현직의 소득 격차가 반드시 노년의 빈부 격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돈 버는 일뿐만 아니라 돈 불리는 일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은퇴는 가깝고 죽음은 멀다. 산 입에 거미줄 칠 일이야 있겠냐마는, 남에게 신세 지지 않고 존엄하게 살려면 젊었을 때부터 은퇴 후의 ‘자주와 책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동문(행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