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시의 별에서 온 우주인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즐겁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걸까요? 이번에는 시인들과 알게 되면서 나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기가 됐던 1년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작년에 나는 지금까지 쓴 적 없는 긴 소설을 간행했습니다. 1년 2개월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던『사람이 아님(人でなし)』이라는 소설을 책으로 묶은 것입니다. 이 작품은 나의 60년 가까운 생애에 있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인생을,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계와 함께 묶어 실험적인 가상의 시공간에 펼쳐 둔 이야기입니다. 실제와는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었다, 그쪽 길로 갔더라면 세계도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후회를 베이스로 자신의 다른 인생을 공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인생이 유토피아일 리도 없고,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한들 오히려 현재는 체험한 적 없는 다른 불쾌한 경험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궁극의 개인적인 언어인 동시에,
자아의 망집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가는 언어이기도 한 시(詩).
내가 아주 조금씩 시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렇게 신뢰하는 문우들이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소설 발표하고 후유증 앓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완전히 소설 속 세계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버린다는 커다란 각오로『사람이 아님』의 세계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세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다 쓰고 나면 이제는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소설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연재를 마친 뒤,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처럼 내 안에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설가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2회차 칼럼(〈KNOU위클리〉 제94호, 2022.7.5.)에도 쓴 것처럼, 나는 슈퍼마켓을 좋아하니까, 슈퍼마켓 점원을 할까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슈퍼마켓 점장이라도 30년간 소설만 써 온 사람을, 제멋대로일 것이고 세상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이겠거니 싶어서 채용하지는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단념했습니다.
노무라 키와오(野村喜和男)라는 시인으로부터 “소설도 다 썼으니 토크 이벤트에서 같이 대담을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권유를 받은 것은 그런 방황 속에 있던 작년 5월. 노무라 씨와는 2003년에 ‘한·일문학심포지엄(원주)’에서 함께했고, 토지기념관에서 같은 숙소에 묵은 적도 있었습니다. 기억에 없지만, 내가 그때 대담하게도 베테랑 시인인 노무라씨에게 “어떤 소설이든, 그것이 훌륭한 소설이라면 반드시 그 핵심에 시가 있다, 시가 없는 경우는 단순한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문학을 한다면서 시를 모른다는 것이 나의 오랜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래서 내내 시를 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읽기도 쓰기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소설의 핵심에는 시가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소설의 핵심에 있는 시’란 대체 무엇인지, 잘 몰랐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노무라 씨의 권유는, 시란 무엇인지 시인에게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조곤조곤 물어볼 수 있는 찬스였습니다. 나는 시에 대해서는 완전히 초보자이기 때문에, 부끄러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내 피해 왔던 시를,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할 결심을 했습니다.

시를 읽고 표현하면서 느낀 기쁨
그때부터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토크 이벤트를 들으러 온 요쓰모토 야스히로(四元康祐)라는, 역시 존경하는 시인이, “시 관련 워크숍이 있는데, 참가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시인들은, 조금이라도 시에 관심을 보이면, 이리 와 봐, 괜찮으니까 써 봐, 하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합니다. 결국 그때는 한 줄도 쓰지 못했지만,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고, 툭 튀어나온 언어를 시로 표현하는 시도를 하면서 지금까지 몰랐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는 행위가 자동화돼 있음에 지쳤구나, 하고요. 나는 일상생활의 어떤 섬세한 일에서도 사회문제나 정치적 테마를 생각할 때도, 항상 머릿속에서 그대로 곧장 에세이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으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소설적인 이야기로 전개하는 과정도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단어의 사용이나 문장의 선택 방법까지 나다운 스타일로 줄줄 자동으로 나옵니다. 이 문장의 자동화를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마치, ‘24시간, 모든 사물을 문장화하는 형벌’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은 이미 완전히 정형화돼 있어서 내용이 주어지기만 하면 곧바로 ‘호시노 표’ 문장이 나옵니다. 나 자신이 ‘호시노 도모유키다운 문장’을 생성하는 AI가 된 듯한 공허를 느끼는 것입니다.
SNS에 글을 올릴 때도 비슷한 환멸을 느낍니다. SNS에 돌아다니는 담론의 대부분은 자동화되고 정형화돼 버린 문장이나 구절이나 진부한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이 써대며 확산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성을 틀에 박힌 문장으로 정형화해 갑니다. 그것은 개인을 소멸시키고, 사람들을 새로운 전체주의로 몰아가기 위한 준비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대단히 고심해 찾거나 가공하지 않으면 형태가 나오지 않는 언어로 이뤄져 있습니다. 내가 필요로 한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재구축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뇌 안에 있는 언어영역이 시에 침식되기 시작할 무렵, 광주에서는 또다시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지난 칼럼의 계속이군요.
2024년 9월 광주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 문학 페스티벌 ‘아시아의 도시, 인간과 비인간의 이야기’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요 몇 년, 내가 젠더 아이덴티티를 잃고 혼란에 빠져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션을 끝내고 강단에서 내려와 자리에 돌아가 앉을 때, 한국 측 참가자였던 젊은 시인과 작가들이, 대단히 분명하게 내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인 김현, 이소연, 안희연, 김은지, 소설가 이지, 예소연, 이서수, 장류진……. 정말이지 예기치 못한 반응에 나는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의, 내 존재를 긍정받은 감각. 정확히 전달됐구나, 실감한 그 순간.
이 작품은 지난 3월 14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아트필드에서 열린 김석희 초대전「The Poetic: 숨결·물결·바람결」에 전시됐다. 호시노는 이 작품을 두고 “김석희의 그림「봄길」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나의 행복감도 폭발하고 자아가 형광색 그린의 공기와 빛 속에 섞여서 사라져 버린다. 정말 무아의 경지”(초대전 도록 해설「언어 바깥의 노을」)라고  썼다.
한국의 시인들과 재회한 밤
모두와 다음 봄에 재회할 약속을 했지만, 작년 12월에 그 약속을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2월 3일 밤, 한국에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뉴스를 들었고, 나는 진지하게 바로 한국에 갈 수 있는 비행기를 찾았습니다. 중계방송 영상에서는 총을 든 군인에게 일반인이 대항하거나 하고 있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참극이 빚어질 거 같았습니다. 김석희도 광주에서 친구가 된 작가들도, 이럴 때 저항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최악의 사태까지 가지 않더라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도 서울 거리에 나가서 함께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서울에서 김석희의 얼굴을 본 순간 다리에 맥이 풀려버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석희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김석희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갔고, 3일 동안 매일, 문래동의 아트필드 갤러리에서 멍하니 좋아하는 그림에 둘러싸여 있으려니, 이 무슨 더없이 호사스러운 시간인가 싶었죠!
김석희가 자신의 그림은 언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작품이며, 그것은 한없이 시에 가까운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김석희는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주변은 온통 시인투성이었습니다. 정말 세상에는 공기처럼 시인이 가득한데, 단지 내가 시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어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를 시로 이끌어준 힘의 하나가 김석희의 그림이었다는 것을, 그의 개인전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3일째 밤에, 한국의 시인들과 재회했습니다. 신미나, 유현아 씨와도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전혀 평범한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항상 그러려고 애쓰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농담만 하고 크게 웃으며 계엄령 따위 거의 화제에도 오르지 않았지만, 이 생각이 깊이 공유되고 있었기에, 우리의 친근한 기분은 몇 배나 강해졌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현 씨는 나에게 “시는 쓰셨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초대면 때, 내가 ‘시에 대한 관심이 싹트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못 쓰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그럼, 신미나 선생이 이번에 일본에 ‘라이터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체재하게 되어, 모두 같이 놀러 갈 예정이니까, 그때 이벤트로 함께 시를 읽을까요?”라고 제안해 주었습니다.
아니, 한국의 시인들 모임에서 시인으로 데뷔? 그런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나는 것인가? 너무 놀랐지만, 조난당한 나를 구원해준 사람들이 함께해준다니 끌려 들어가는 게 당연한 운명이다 싶고, 피가 끓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5월, 김현, 이소연, 신미나 씨에 시인 이동욱 씨도 합세해 도쿄에서 한국 ‘시 파티’가 열렸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읽었습니다.
궁극의 개인적인 언어인 동시에, 자아의 망집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져 가는 언어이기도 한 시(詩). 내가 아주 조금씩 시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렇게 신뢰하는 문우들이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6월 말에 신미나, 김현 씨와 도쿄 이벤트에서 만나, 함께 후지산에 갔습니다. 알고 나서 아직 1년이 안 됐지만, 네 번이나 만나다니, 분명히 올해도 또 만날 일이 있을 테지요.
왜냐하면, 만날 수 있으니까요! 

■ 번역 김석희
1988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1997년 『마지막 한숨』으로 제34회 문예상을 수상했고, 2000년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로 제13회 미시마유키오상, 2003년 『판타지스타』로 제25회 노마문예 신인상을 수상, 『오레오레』로 오에 겐자부로상, 『밤은 끝나지 않는다』로 요미우리문학상, 『호노오』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대표 소설집 『인간은행』, 『디어 프루던스』 등이 국내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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