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인류는 급변하는 기술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특히 2020년대 이후, 인공지능(AI)은 사회 전반의 화두로 떠오르며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창작 활동마저 인공지능의 손길이 닿으면서 예술계는 깊은 성찰의 시기를 맞이했다.
ChatGPT와 같은 프로그램이 상용화되면서 인공지능이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례가 등장했고, 이는 인공지능의 창작물이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인공지능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졌을 뿐, 대중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예술과 기술의 결합은 더 이상 낯선 시도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이 예술과 접목돼 이미 대중과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러나 이는 주로 미술과 게임 분야에 국한됐고, 연극과 같은 타 장르와의 협력은 아직 많은 여지를 남겨둔 과제로 여겨졌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로봇 기술의 상용화가 가속화되면서, 연극계 역시 로봇을 무대에 올리는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인공지능과 로봇, VR·AR 기술은
연극의 전통적인 창작과 소비 방식을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있다. 기계가 무대에 오르면서
연극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탐색하게 됐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 감정, 소통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서양 연극, 로봇과 만나다
로봇이 연극 무대에 등장한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1921년, 카렐 차페크(Karel Capek)의 희곡「R.U.R(Rossum’s Universal Robots)」에서 이미 ‘로봇’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까지 연극에 등장하는 로봇은 실제 로봇이 아니라 인간 배우가 로봇처럼 분장하고 연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로봇이 직접 연극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서양 무대에서 로봇이 직접 연기를 펼친 최초의 작품은 2006년 뉴욕에서 공연된 연극「헤다트론(Heddatron)」이다.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밖에서 제작됐지만, 북미 전역에서 추가 제작 및 투어 공연을 진행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이 작품은 로봇 캐릭터를 수정하고 다른 로봇이 등장하는 버전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뉴욕을 중심으로 로봇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들이 연이어 초연됐는데, 이때는 실제 로봇들이 오디션을 통해 연극 캐릭터에 가장 적합한 로봇으로 캐스팅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로봇 연극의 흐름은 고전 연극과의 결합으로도 이어졌다. 2012년에는 500년 전통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Comedia del Arte)를 각색한 연극「코메디아 로보티카(Comedia Robotica)」를 통해 로봇이 배우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이는 고전과 현대 기술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매우 새롭고 이색적인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히라타 오리자, 로봇 연극의 새로운 지평
2000년대 이후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있어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준 인물은 일본의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Hirata Oriza)다. 1990년대부터 인공지능, 인지과학, 감정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로봇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러한 연구는 다양한 예술 장르와의 협력적 시도를 낳았다. 히라타 오리자는 그 중심에서 극단 세이넨단(청년단)을 이끌며 로봇 과학자 이시구로 히로시의 연구소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는 1990년대 일본 연극계에 유행했던 ‘화려하고 강한 느낌의 연극’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조용한 연극’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기존 연극의 틀을 깨는 시도를 많이 했던 그는 로봇 연극에서도 단순히 로봇이 본연의 기능을 과시하는 접근을 피했다. 대신 ‘로봇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창작을 시작했다.
히라타 오리자 연극의 핵심은 로봇의 움직임에 ‘마이크로 슬립(Micro slip)’을 삽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언어학자, 인지 과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로봇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설계됐다. 마이크로 슬립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반드시 수반되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의미한다. 인간이 특정 행동을 할 때 목표한 동작 외에 곁들이는 사소한 행동들이 바로 인간다움을 나타내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봇이 무대 위에서 인간과 유사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미세한 움직임의 설계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연극「일하는 나」,「사요나라」,「세 자매」등과 같은 훌륭한 로봇 연극들이 탄생했다.
로봇 연극이 던지는 질문
히라타 오리자와 오사카 대학 로봇 연극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활동을 알린 작품은 2008년 발표된 연극「일하는 나」였다. 총 30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일상화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일을 하지 못하는 로봇 하인과 인간 주인공에게 동일한 상황을 부여함으로써, ‘일하지 못한다’는 것이 로봇과 인간에게 각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3년 작「사요나라」는 죽음을 앞둔 시한부 소녀와 그녀를 위로하는 로봇이 출연하는 2인극이다. 15분이라는 짧은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한국, 독일, 프랑스, 태국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청받아 투어 공연을 진행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이후 후카다 고지 감독에 의해 장편 영화로도 제작됐고,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이야기를 추가해 30분이 넘는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특히「사요나라」에 등장하는 로봇은 실리콘, 머리카락 등 실제 인간과 흡사한 재료를 사용해 외모와 움직임 면에서 인간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로봇이 연극에 등장한 것은 이 작품이 최초였으며, 유례없는 시도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세 번째 대표작인「세 자매」는 안톤 체호프의 동명 희곡을 번안, 각색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인간과 흡사한 얼굴을 가진 로봇과 기계적인 외모의 로봇이 함께 등장하는데, 사람의 모습을 한 로봇은 이미 사망한 셋째 딸을 대신하는 역할로 연출돼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들을 비롯한 로봇 연극들은 기존의 연극이 가진 소통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이는 관객들에게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는 예술과 기술이 만난 현시대에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화두다.
한편, 한국에서도 로봇 연극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2009년 로봇 배우 ‘에버’는「에버가 기가 막혀」,「로봇공주와 일곱 난장이」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당시 로봇 배우는 대본에 따라 대사와 몸짓을 이행했고, 인간 배우들은 이에 맞춰 동선을 짜고 합을 맞추는 등 실제 공연 연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한국 연극의 새로운 흐름
최근 한국에서는 로봇 연극 외에도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게임 분야에서는 이미 전용 고글을 쓰고 몰입감을 높이는 VR 게임들이 출시됐으며, 미술 전시나 콘서트,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AR, VR 기술이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전용 고글을 착용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점은 대중화에 있어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은 소통의 확장에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24년 연극「비(Bea)」는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더 많은 관객이 차별 없이 작품을 온전히 느끼도록 하기 위해 ‘스마트 자막 안경’을 도입했다. 인공지능과 증강 현실 기술이 결합된 이 안경을 착용하면 공연과 함께 자막을 볼 수 있다. 장애인은 물론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도 공연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실제 공연을 직접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는 어렵겠지만, 기존 연극에서 장애인과 외국인을 위한 장치가 전무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큰 변화이자 진정한 소통을 위한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 VR·AR 기술은 연극의 전통적인 창작과 소비 방식을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있다. 기계가 무대에 오르면서 연극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탐색하게 됐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재, 감정, 소통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기술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 기술을 통해 인간다움을 재발견하고 소통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기술과 예술이 융합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연극의 새로운 미래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끝]
나여랑 공연평론가
한예종 연극원 연극학과를 졸업한 후 스페인과 한국을 오가며 연극 평론, 극작,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평론집『여기, 그리고 지금』, 희곡집 『시간의 감옥』,『리듬으로 사유하기』(공저)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