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자연법 전통은 인간의 역사, 윤리, 정치 전반을 아우르는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그 뿌리는 고대 로마법에서 시작된다. 자연법은 동물, 식물,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에 적용되는 법칙이었다. 중세 가톨릭 스콜라주의 학자들은 이 자연법을 신의 의지와 조화시키려 했고 15~18세기, 즉 초기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적 자연법학이 확립됐다.
자연법학자들은 공화주의자들과 달리 ‘무엇이 좋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는 세계관을 가졌다. 그들은 법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삶을 추구했고, 이를 위한 자연법의 핵심 원리는 신이 인간에게 부과한 ‘의무’에 있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할 권리, 즉 자연권을 가진다. 그러나 자연법 세계관에서 권리는 의무에 종속되며 이 의무와 권리는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한다. 자유의지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연법 인식은 인간이 타고난 자유와 평등 같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형성됐고 이를 법으로 강제하기 위해 국가와 공권력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자연법이 곧 자연권이라는 오해가 퍼졌다. 실제로 서양 여러 언어에서 ‘권리’와 ‘법’이 같은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법의 구조적 핵심을 보면 자연권 보장은 전체의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16~18세기의 기독교적 자연법 패러다임의 중심은 신이 인간에게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할 추가적 의무를 지니며, 그 결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권리는 타인의 의무 수행과 충돌할 수 있었고, 이를 조정하는 것이 법률, 사법제도, 공권력 등 사회적 힘이었다. 그리고 사회는 인간의 선천적 사회성에서 비롯될 수도, 사회성이 없는 인간이 계약을 맺어 창설할 수도 있었다.
자연법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자연법학자들은
신이 부여한 의무와 권리,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민주정보다는
강력한 군주정과 소수의
통치집단에 의한 법치를
이상적 정치로서 제시했다.
자연법의 의무와 권리
자연법의 사유 체계를 살펴보자. 먼저 신이 부과한 ‘의무’가 그 의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리’에 우선한다. 의무가 먼저 존재하고 권리는 그 뒤를 따른다. 이 의무와 권리는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만 해당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자연법학에서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기보존의무’였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뜬 피조물로서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타인의 신체도 함부로 해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보편적 원칙이 도출된다. 내가 내 신체와 재산을 공격받기 싫다면 남의 신체와 재산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법 세계관의 근본적인 토대였다.
자기보존의무를 수행하려면 필수적인 행위들이 수반된다. 따라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자기보존의무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공격하면 나는 방어할 권리가 생긴다. 이런 식으로 자연법상 의무를 다하기 위한 권리가 바로 자연권이다. 자기보존의무에서 파생되는 자연권에는 신체만이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재산을 지킬 권리도 포함된다. 자연법학자들은 소유권을 매우 중시했다. 타인이 소유한 재산을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이 신에게 자기보존의무를 다하는 일을 방해하는 행위로 간주됐다. 그래서 소유권을 침해받는 사람은 저항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갖는다. 소유물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논리 때문에, 소유권은 자기보존의무와 불가분의 관계로서 설정됐다. 복지와 같은 사회적 권리는 ‘불완전한 권리’로 간주됐지만, 소유권은 ‘완전한 권리’로 여겨졌다.

자연법과 사회성 논쟁
자연법 세계관은 인간에게 자기보존이라는 으뜸 원칙을 지키되 나의 삶이 남의 삶과 공존할 수 있는 방식, 즉 사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의무와 권리의 도덕적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각자가 자기중심적으로 생명보존의무와 자연권을 주장하다가 다툼이 일어나고, 이것이 조정되지 않으면 아무도 자연법에 따라 살 수 없다. 그래서 자연법 사상가들은 이 조정 행위를 위해 사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기원에 관한 쟁점에서 자연법 전통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인간이 타고난 사회성에 바탕을 두는 ‘사회성 테제’였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사회성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보는 ‘반사회성 테제’였다. 사회성이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려는 경향성을 뜻한다. 17~18세기 서양에서는 인간이 사회성을 갖고 태어나는지, 아니면 고립된 존재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더 강한지에 대해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 특정 사상가가 이 논쟁에서 어느 쪽에 서는지가 그의 인간관, 역사관, 정치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자연적 사회성 테제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서는 자기보존의무를 다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결국 사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그로티우스, 컴벌랜드, 푸펜도르프, 턴불, 허치슨, 뷔를라마키, 바텔 등이 이 관점을 지지했다. 이들은 정치적·경제적 개혁이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고, 인간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협력하는 것이 본성에 더 부합한다고 봤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협력해 더 나은 삶을 만들 잠재력을 지녔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타고났으므로 계약 없이도 자연스럽게 사회를 이루며, 따라서 원초적 사회계약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가 간 국제관계도 자연적 사회성 테제에 따라 설명됐다. 국가들도 전쟁 상태를 피하고 사회를 구성하려는 본성을 지니며, 국제법은 이런 국가들 사이의 의무와 권리를 규정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반사회성 테제는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부정했다. 대표적 사상가는 홉스였다. 그는 인간이 사회성을 타고나지 않았으며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진다고 주장했다. 자연 상태에서는 사회도 법률도 압도적인 힘을 보유한 지도자도 없으므로, 엇비슷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무질서와 파괴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일반적인 능력의 평등이 무법 상태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전쟁 상태에서는 소유, 정의, 도덕이 존재할 수 없었다.
홉스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법률을 만들어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확고한 힘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것, 다시 말해 강력한 공권력을 지닌 국가를 창설하는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국가 간의 관계도 반사회성 테제에 따라 설명됐다. 국가 간에는 계약이 없으므로 여전히 자연 상태, 즉 끝없는 전쟁 상태가 지속됐다. 국제법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황된 것으로 여겨졌고, 국제평화는 힘의 균형에 의해 한시적으로만 유지된다고 봤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류의 집단적 진보도 기대하기 어려웠고, 국가란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통치자는 자유보다는 질서를 강조하며 강압적 통치를 펼치게 됐다. 이와 같은 홉스의 주장은 과도하게 비관적인 것 혹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돼 동시대인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자연법과 민주주의
근대 자연법 전통의 도덕이론은 의무와 권리의 근원을 신에게 두었다. 자연법학자들은 신이 없는 도덕 질서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국가는 신의 뜻에 따라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소수가 다스려야 한다고 여겼다. 자연법 전통은 ‘올바른 삶’을 목표로 했고, 통치자는 사회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법을 만들고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 전통의 사상가들은 다수 국민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아, 민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많은 자연법학자들은 소수만이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보고, 민주정은 자연법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체로 국민은 복종하기만 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저항권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인정됐으며, 그마저도 주로 종교적 이유에 국한됐다.
자연법 전통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부 형태로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군주정이었다. 푸펜도르프는 국가의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통치권이 분산되면 국가가 분열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군주 1명과 소수의 통치집단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국민은 통치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홉스 역시 사회계약을 통해 절대적 주권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말했고, 국가의 힘을 분할하는 것은 내전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자연법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자연법학자들은 신이 부여한 의무와 권리,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민주정보다는 강력한 군주정과 소수의 통치집단에 의한 법치를 이상적 정치로 제시했다. 민주정은 비현실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정부 형태로 간주됐으며, 민중의 정치 참여는 오히려 민중 스스로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