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구려 평양성과 그 연관 관계 연구』 펴낸 복기대 인하대 교수

 

“고조선 이후 삼한(마한·진한·변한)의 시작은 늦어도 기원전 3세기부터입니다. 삼한의 맹주는 마한이었고, 지역적으로 삼한의 위치는 현재 중국 요령성 중남부 지역부터 한국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호남으로 알고 있는 마한의 위치는 크게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삼한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기대 인하대 교수(융합고고학)는 최근 펴낸 저서 『고구려 평양성과 그 연관 관계 연구』(우리영토 刊)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사료로는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마한’ 편의 기록에서 ‘마한이 고구려를 계승했고, 고구려의 첫 도읍지가 중국 요령성 금주시였다’는 점, 『삼국지』 「위서」 권30, 동이전, ‘한’ 편의 기록에서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는 통일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마한이 바로 고구려였다는 견해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삼한의 위치는 호남으로 비정돼 있는데, 이는 낙랑군의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한의 낙랑군은 한이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 땅에 설치했는데, 위만조선이 현재 북한의 평안도나 황해도에 있었다는 것이 주류 사학계의 견해다. 위만조선이 북한 평양 지역을 공격했고,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전라도 익산 땅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마한 땅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복 교수는 “이런 방식으로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학계는 세 가지를 해결했다. 먼저 위만조선의 위치이고 다음은 한의 낙랑군 위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준이 도망간 마한의 위치다. 이와 연동이 되면서 변한, 진한의 위치도 정해졌고, 결국 가야, 신라, 임나, 백제 등의 위치도 연동돼 나타나게 됐다. 이런 내용이 한국사를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한 시작이다. 마한이 호남으로 대못이 박혔고, 신라는 경주로 못이 박혔으니, 임나가 갈 곳은 가야 지역밖에 없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위의 삼한위치설은 한국학계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 도식으로 한국사의 모든 틀이 짜여 있다. 복 교수는 이 도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셈인데, 마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통째로 다시 써야 할 판”
복 교수가 고대사에 관심을 둔 건 유학을 막 끝낸 2001년이다. 스승인 고(故) 윤내현 단국대 교수가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가져온 엄청난 분량의 북방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다. 중 만주 지역 지리서인 『요해총서』에서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양’이라는 구절을 발견했고, 현대 한국사와는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생각에 요사, 금사, 원사 지리지와 관련 연행록,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평양의 기록 등을 찾아 읽으며 교차 분석했다. 상당한 자료를 찾아 갈무리하면서 현재 북한 평양은 고구려 평양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역사를 통째로 다시 써야 할 판이었죠.” 『삼국사기』에 언급된 고구려 도읍지를 꼼꼼히 살펴 기존 3개에서 8개로 확장했고, 2009년에 이 내용을 다듬어 「장수왕 천도에 대한 고구려 평양성 위치 연구」 논문으로 발표했다. 당시 언론에도 보도 될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사학계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주류 사학계의 ‘무대응’을 뒤로 하고 문헌 자료와 함께 지형지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를 계속해서 모았다. 2015년 그의 논문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이 제기한 비판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고구려 도읍과 국경선에 대한 연구도 이어갔다.

 

“고조선은 신화 아닌 역사”
“흔히 ‘한국사 5천년’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사는 대부분 약 2,300년 정도를 연구한다. 단군이 왕으로 있었던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100여 년 전 일본 학자들은 그들이 인식하는 조선의 영토, 즉 한반도에서 이른바 단군조선이 실증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이 주장은 오늘날 한국 학계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고조선의 실체가 증명되지 않으면 전통 시대 일부 학자들이나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다름없다.”

 

저서에서 복 교수는 일본이 ‘실증사학’이라는 연구방법론이 무색하게 왜곡했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필수라고 주장한다. 그는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고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단군조선은 어떻게 붕괴했고,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연구를 시작해,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 마한의 위치까지 비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대로 고조선은 신화가 아닌 역사일까? 저자는 고조선의 실체 증명을 위해 △기록의 전승성 △연대의 증명성 △고고학적 증명 등 세 측면에서 논증을 짚어 간다.

 

먼저 기록의 전승성에 대해서는 삼국시대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 고려시대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권근의 『양촌서생문집』 , 조선시대는 『승정원일기』와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 등에 언급된 고조선을 증거로 제시했다. 조선 후기 단군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 단군을 기자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위에 둔 학자 이종휘의 저서 『수산집』에서 ‘단군은 맨 처음 나온 성인으로 중국으로 치면 아마 복희나 신농 같은 임금’이라는 부분을 인용하기도 했다.

 

연대의 전승성 측면에서는 국내 문헌 중 『삼국유사』에서 ‘지금으로부터 4,600여 년 전’이라는 설과 ‘4,300여 년 전’이라는 두 견해가 기록돼 있다는 점, 또 『동국통감』에서도 ‘4,300여 년 전 ’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중국 측 기록에는 ‘ 2,500여 년 전후’와 고고학적으로 한국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를 근거로 삼아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무렵’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했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한국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고조선 건국 연대를 『동국통감』에 근거해 지금으로부터 4,300여 년 전 무렵이고, 이를 현재 한국의 ’단기(檀紀, 단군기원)‘의 근거로 삼았다.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은 고조선의 붕괴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중국계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을 인용해 대략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사이에 고조선과 연과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에서 고조선이 연에게 패해 서쪽 2,000리를 잃게 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봤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의 건국 연대와 쇠퇴 시기를 정리하면 기원전 2,333년 무렵에 건국돼 기원후 3세기 무렵까지 존재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계는 그의 주장에 대해 여전히 무대응이다. 그가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거나 학술대회를 개최해도 주류 사학계 연구자들과의 협업은 거의 없다. 오히려 천문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같은 타 분과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복 교수는 연구의 지평을 융복합적으로 넓히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등에 대해 20여 년간 국내외 답사를 다니며 실증한 자료들로 기존 연구를 집대성했다. 특히 새롭게 마한의 위치를 비정한 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다.

 

복 교수의 마지막 말이다 “농반진반으로 말씀드리면, 챗GPT에 한국 역사학계에서 가장 성실하게 연구한 학자가 누구인지 물어봤더니, 저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적어도 학자라면 논문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30여 년째 그 작업을 넓고 깊게 하고 있고요.”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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