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일본에 가본 적이 있는 분들은 도쿄에 신오쿠보(新大久保)라는 거리가 있다는 걸 아실지요? JR야마노테선(JR山手線)으로는 신주쿠(新宿)역과 이웃하고 있고, ‘한류 타운’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인이 도쿄를 여행할 때 일부러 한류 타운에 가고 싶지는 않을 터이니, 이름은 알아도 정작 가본 사람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류 타운은 한국인 거리가 아니라, 일본의 ‘한류 팬’을 위한 거리입니다. 한국 요리나 달콤한 것, 술집 등의 음식점부터, 미용 관련 가게, 슈퍼마켓, 한류 스타들의 굿즈를 파는 가게, 그리고 한류 아이돌의 라이브 하우스 등이, 길가에 빽빽합니다. 명동을 좀 더 한류 팬을 위해 특화하고 응축시켜 놓은 듯한 거리라고 할까요? 장사를 하는 한국인이나 재일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거리에서 한국어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팬들은 ‘신오쿠보에 한 발을 들여놓으면, 그곳이 한국이다’라는 말도 하고 있지만, 이 경우의 ‘한국’이란, 한류 팬들이 이미지로서 희망하고 소비하는 환상의 한국이지, 현실의 한국 사회는 아닙니다. 아키하바라가 오타쿠들에게 욕망의 거리인 것처럼, 신오쿠보는 한류 팬들에게 욕망의 거리입니다.

신오쿠보역에 내려서 오른쪽으로 가면 한류 타운이 펼쳐지는데, 왼쪽으로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네팔 등 남아시아 사람들로 들끓는, 이슬람 거리입니다. 타이나 베트남 사람들도 많이 있고,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즐비합니다. 여기는 이미지의 거리가 아니라, 정말로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장입니다.
제가 자주 방문하는 신오쿠보는 그곳입니다. 약 35년 전, 1990년 무렵부터 저는 그 거리가 좋아서 드나들었는데, 당시에는 타이, 필리핀, 미얀마, 콜롬비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는 사람들의 출신지는 바뀌어도 이 거리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의 커뮤니티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이 있는 길을 건너, 모스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13년 전과 비교하면, 이민자들은
상당히 감소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이 길 바깥 무대를 피해,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주거비도 비싸고, 도저히 살기 힘들어진 것일까요?

 

 

13년 만에 찾아간 ‘모스크’ 거리
서울에도 그런 거리가 있지요. 이태원 말입니다. 2012년에 서울에서 3개월간 지낼 때, 저는 이태원에 매료됐습니다. 그 당시, 전철역이 있는 큰길에서 해밀턴 호텔 쪽은 화려하고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곳이었습니다. 클럽도 많아서 도쿄로 말하자면 롯폰기(六本木) 같은 장소였습니다. 세계 음식 거리 등은 환상의 국제 타운 이미지를 소비하는 거리였고, 그런 의미에서 신오쿠보의 ‘한류 타운’과 비슷했습니다.
제가 매력을 느낀 것은, 길 건너 반대편의 모스크(서울중앙성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슬람권의 사람들이나 아프리카권 사람들이 붐비는 것이 신오쿠보 같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맛있는 튀르키예 요리를 먹고, 살사 바에 가기도 했습니다. 또 그곳은 퀴어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도쿄로 말하자면 신주쿠 2초메 정도 될까요?

그 잡다한 사람들과 목소리가 넘쳐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끝나지 않는 어떤 것을 품고 있으며, 소비재화될 수 없는 그런 길에 왔다는 것으로, 저의 기분은 편안해졌고 동시에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저 자신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곳에는 잘 적응하지 못하며, 환락을 추구하는 장소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이지만, ‘이것이 표준’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장소가 필요했고, 그것이 대략 이태원이나 신오쿠보 같은 거리였던 것입니다.
그 이태원에서 3년 전 할로윈데이에, 그 끔찍한 압사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경비가 갖춰졌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니,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제가 자주 돌아다녔던 그 거리에 저 자신이 있었던 것처럼, 사고 현장이 재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골목길의 경사 때문에 모두가 천천히 쓰러져가는 감각까지 피부로 느껴져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한국에 갈 때는, 그 길에 서서 세상을 떠난 이름 모를 사람들을 느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9월에 광주 아시아문학 페스티벌에서 알게 된 시인 김현 씨는 사고 후에, 오래도록 이태원에서 시 낭독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지난 번 칼럼에서 쓴 것처럼 저는 서울에 잠깐 머물렀습니다. 친한 친구인 김석희의 개인전을 보기 위해, 3일 동안 문래동 갤러리에 틀어박혀 있다가 한나절 정도 시간을 내어 이태원을 향했습니다.

일본의 배타주의와 이태원의 변화
사고가 있었던 길 구석에는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OCTOBER 29 MEMORY ALLEY’이라고 쓴 하얀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뉴스에서 본, 골목 바깥에 설치돼 있어야 할 비석은 없었고, 그 길의 언덕 아래 지면에 있어야 할 ‘우리에겐 아직도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있습니다’라는 금색 글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잠든 듯한 거리였으므로 인적이 거의 없고, 댐 아래로 가라앉은 폐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언덕 중간쯤에 서서, 사고 뉴스를 보면서 뇌리를 스쳐갔던 그 절망의 시간을 다시 재생시켰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감정이며, 정치적 동기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역이 있는 길을 건너, 모스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2012년에는 아프리카나 이슬람권 사람들이 북적대던 큰길과 나란하던 골목은 한산했습니다. 좋아하던 튀르키예 요리점도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스크가 있는 안쪽 길까지 가서야, 겨우 이슬람계나 인도계 레스토랑 등이 늘어선 곳을 발견했습니다. 13년 전과 비교하면, 이민자들은 상당히 감소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이 길 바깥 무대를 피해,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주거비도 비싸고, 도저히 살기 힘들어진 것일까요?

이민에 대해 무관심한 일본 사회에서는 일하러 왔다가 정착한 이민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메이저리티인 일본인들은 그 정도의 이민자들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민 1세대를 부모로 둔 아이들은 일본의 학교에 다니고, 일본 사회의 네이티브로서 자라며, 부모 세대보다는 훨씬 사회에 대한 귀속 의식이 강합니다. 숨은 듯이 지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씩, 일본은 ‘이민 사회’라는 점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됐습니다.
작년 무렵부터, 일본에서도 배타주의가 급속히 지지세를 모으고 있습니다. 매일의 생활을 괴롭게 느끼는 것은 외국인이 우대받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있던 특정의 이민 커뮤니티를 일부러 찾아내어, SNS 등에 노출시키고, 차별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이민 사정을 저는 잘 모릅니다만, 이태원의 변화에 비슷한 배경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번역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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