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게 아닌데, 직장 생활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세월 흘러 나이는 들어간다. 직장 떨어지면 죽는 줄만 알고 영혼을 바쳐 일하지만, 마음은 점점 회사와 멀어진다. 사명감도 재미도 없이 인내하며 견디는 방식으로 직장을 다녀서는 행복할 리 없다. 진 다 빠져 퇴직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나가면 다리 떨려서 놀기도 어려울 거고, 다시 무엇을 시작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참고 노력만 해서 성공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천직이라는 말도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살아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스스로 소멸해 간다면 모순 아닌가.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삶의 불길이 사라지면 인생 그만이다. 자 떠나자! 인생, 피 말리듯이 살지 말자. 빨리 자유를 찾아 재미있게 놀듯이 살아보자.
퇴직만 한다면 이것저것 살필 것 없이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면 된다. 늦게 퇴직할수록 지위도 올라가고 연금도 불어나지만, 그러다가 내구연한을 넘긴 폐가전제품처럼 버려질 수 있다. 어차피 퇴직할 생각을 했다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직장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젊어서 직장을 떠나면 밥은 누가 먹여주나? 남보다 한 삽 더 떠야 밥 한술 들어오는 경쟁사회에서 일찍 은퇴해서 놀면 어쩌자는 건가?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 아무런 경제 대책도 없이 그냥 은퇴하는 건 안 된다. 나이 40~50에 퇴직하면 여생이 30~40년은 족히 되니 깊이 생각할 일이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은퇴라고 해서 모든 일에서 물러나 침묵의 서원을 하고, 기도와 명상으로 나날을 보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놀고, 쉬고, 그리고 일도 하고…,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놀듯이 재미있게 해야 지치지도 않고 성과도 난다. 세상에 가장 갑갑한 사람이 힘들게 견디면서 일만 하는 사람이다.
“내년을 목표로 퇴직을 준비 중이다. 40살, 직장 생활 20주년이 되는 해라서 그때까지만 일하기로 남편과 합의했다. 은퇴 후 부부가 함께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2년 정도 쉬며 낯선 곳에서 지내도 보고 해외여행도 생각 중이다. 안식년이 끝난 후 나는 자유로운 은퇴 생활을 이어갈 작정이고, 남편은 지금보다는 자유로운 제2의 직장을 구할 생각이다. 재산은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가 있고, 약간의 유동자산을 갖고 있다. 가계부 쓰며 냉장고 파며 살아왔고, 현재 2인 생활비 100만 원을 지키며 최소한의 생활을 지향하고 있다. 월수입 100만 원만 나온다면 은퇴 후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어느 SNS 카페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오! 이런 삶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나이 40에 경제적 자유라니! 실로 대단한 계획이다. 이제 돈을 벌기 위해 일에 얽매여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 한다니 정말 놀랍다.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Retire Early)를 뜻하는 파이어(FIRE). 사실 요즘 젊은 층에서 이런 파이어족의 삶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실행은 쉽지 않다. 일찍 경제적 자유를 얻으려면 모질게 아끼고 저축하면서 재산을 형성해야 한다. 아울러 가장 작은 비용으로 살기 위해 소비 생활을 최소화해야 한다.
파이어족이 그냥 짠돌이와 다른 것은 왜 아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금융 위기 이후 이런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공동체가 생기기도 했단다. 아마 과도하게 일하고 지나치게 소비하는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반성에서 온 게 아닐까 싶다.
파이어족이 지향하는 것은 여유롭고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다. 그렇다고 매일 휴가처럼 지내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파이어족은 ‘최소한의 생활’을 추구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줄이고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단순한 생활 방식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좋은 방법이 분명하다. 그런데 파이어와 관련해서 꼭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인생에서 완전한 은퇴라는 게 있기나 할까?
- 경제적 자유를 이룬 후 일할 필요가 없어지면 무엇을 할 것인가?
- 극단적인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을 때 얼마나 우울해지고 소외감을 느끼게 될까?
이것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파이어족의 삶을 실천해야 실패가 없을 것이다. 은퇴하고 나면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위 살필 것 없이 오롯이 내 삶을 살 수 있다. 싫은 일 안 해도 되고, 힘든 일 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면 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삶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되도록 빨리 은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조기 은퇴는 우리가 꿈꾸는 것과 다를 수 있다. 잘못하면 자신의 삶을 공허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반기 인생을 절벽으로 밀어낼 수도 있으니 추락하지 않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파이어는 남은 평생을 해변에서 포도주나 마시며 보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쓰자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어쨌든 다들 ‘피곤한 술집 사장’에서 ‘조용한 선술집 손님’으로 바꿔 살기를 바라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 나이 들어서도 하는 일을 줄이지 못하고 허덕대는 사람도 문제지만, 대책 없이 놀고 쉬려고만 해서도 안 된다. 잠깐 멈추고 조용히 나를 한번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내가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최재식 전 공무원연금공단 이사장·동문(행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