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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찰자는 어떻게 프랑스가 이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헌법 내부의 자기 파괴적 모순과
일반의지의 허약한 기초를 통찰한 명저를 남겼으나,
음모를 실질적으로 획책한 숨은 설계자를 보진 못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이며, 어머니는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다. 왕정복고기에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한 루이는 망명해 주변을 전전한다. 스트라스부르와 불로뉴에서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조소의 대상이었으며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통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고 프랑스 인민은 같은 해 12월 최초의 보통선거를 통해, 조국으로 귀환한 제1제정의 이 상징적 적자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가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연임을 금했다.  의회 기반이 없던 루이는 비합법적 정권 탈취를 기도한다. 1851년 12월 2일 아침, 파리 곳곳에는 세 종류의 벽보가 붙었다.「국민에게 고한다」,「병사들이여」,「포고」. 대통령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6개 조항을 선포한다. “국민의회는 해산한다. 보통선거를 재실시한다. 프랑스 국민은 12월 14일부터 21일까지 투표소에 출두한다. 제1육군사단의 전 영역에 계엄령이 포고된다. 국무원은 해산한다. 내무대신은 본 포고를 시행하는 임무를 맡는다.”


포고문은 공화제 폐지의 선언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제정으로 가는 길을 민주 절차의 외양으로 감춘 포고는 사실상 순수 형식에 불과했다. 절차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형식의 실제적 이행 여부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조치는 치밀하게 준비됐다. 경시청장, 육군대신, 비서장 등 주모자들은 2일 아침 7시까지 의회 포위, 주요 인사 체포, 벽보 부착을 실행하기로 계획한다.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하고 일제 검거에 나서야 한다. 따라서 약간의 폭동이 필요했고, 이를 선동할 준비도 마쳤다.


사태는 대략 이렇게 흐른다. 밤사이 체포자 명단에 따라 68명이 구속된다. 공화파 인사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빅토르 위고가 기초한 선언문을 채택한다. “공화국 만세, 헌법 만세, 무기를 들어라”라고 끝나는 선언문은 인쇄 및 언론 통제 조치로 전파되지 못한다. 저항위원회가 조직됐으나 집결자 수는 점점 줄었고, 공화파 의원 보댕은 군의 발포로 사망했으며, 위고는 망명길에 오른다. 2만 5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파리는 4일, 지방은 8일경에 소요가 진압된다. 7백만 명이 포고를 지지했고, 반대 60만 명, 기권 100만 명이었다. 이듬해 11월 대통령의 황제 즉위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고, 루이는 황제로 등극한다. 쿠데타와 계엄령을 발명한 나라의 인민은 제 손으로 제2제정의 성립을 승인했다.


루이를 ‘기괴하고도 평범한’ 인물로 평했던 이웃나라의 한 관찰자는 어떻게 프랑스가 이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입법권과 행정권을 분할한 헌법 내부의 자기 파괴적 모순과 일반의지의 허약한 기초를 통찰한 명저(마르크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를 남겼으나, 음모를 실질적으로 획책한 숨은 설계자를 보진 못했다(하스미 시게히코,『제국의 음모』).


오르탕스의 혼외자, 즉 루이의 의붓동생은 명목상 아비의 성을 따라 드모르니로 살았으나, 후일 ‘드’를 분리해 드 모르니 백작 행세를 하며 사교계의 총아가 된다. 실행일 전날 밤에도 태연히 희가극을 관람했다고 하는 그는, 내무대신으로 포고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하루아침에 공식 지위를 얻었고, 포고를 시행함으로써 가짜 백작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를 스스로 정당화한다. 이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이 사람은 입법원 의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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