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2017년, 한센인에 대한 강제 단종 및 낙태 수술의
국가 책임 및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불치병’이 사라지고 한센인이 꾸준히 줄고 있는 지금,
한센병의 역사는 감염병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진짜 병원체는 세균이 아니라, 이웃을 낙인찍고 차별하는
우리의 시선일지 모른다.
“살아있는 건 정말이지 괴롭고 고통스러워.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그래도 살고 싶어.”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1941~)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1997)에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숨어 지내는 인물이 내뱉는 말은, 생명의 근원적인 고통이나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운운하는 ‘의미’이기 이전에, 그가 매 순간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자체를 대변한다. 2019년, 미야자키 감독은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의 강연회에서 한센병 요양소 다마젠쇼엔(多磨全生園)의 입소자 자치회장이었던 사가와 오사무(佐川修, 1931~2018)와의 인연을 소개하고 수많은 한센병(Hansen’s disease) 환자가 보여주는 삶의 증거 앞에서 ‘대충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격리되고 인권조차 ‘말소’된 한센인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센병의 기원과 병리
약 3~4천 년 전의 인골과 미라에 흔적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인 한센병은 나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한 만성 감염병으로, 동아프리카(및 근동) 지역과 아시아(인도와 중국)에서 각기 따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의 한센병은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거쳐 서아프리카와 남북아메리카로, 아시아의 한센병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6세기경 일본 열도로 확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나병(癩病, leprosy)’이라 불린 한센병은 ‘문둥병’, ‘천형병(天刑病)’ 등의 별칭이 말해주듯 낙인과 차별의 시선이 집중된 대표적인 질병이다. 피부에 심한 병변이 생겨 콧대, 입술 등이 결실되거나 손가락 또는 발가락이 마비로 떨어져 나가거나 몸 표면의 온각과 통각이 상실되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런 뚜렷한 외형적 변화가 혐오와 기피를 불러일으켰다.
성경에 ‘차라트’에 걸린 자가 언급된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부정하다고 울부짖을 것이다. 병이 몸 안에 있는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다. 그는 부정하니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할 것이다.”(「레위기」제13장) ‘차라트’는 악성 피부병을 뜻하지만, 오랫동안 한센병이라 해석됐다. 이런 인식에 따라 한센병이 만연한 중세 유럽에서는 환자 수용시설 레프로사리움(leprosarium)이 1만9천 개소 가까이 세워졌고, 14세기 페스트 대유행 이후 한센병은 유행이 잦아들며 점차 ‘성서 속의 질병’이 됐다. 19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한센병에 시달린 노르웨이에서는 1873년 의사 아르메우에르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 1841~1912)이 나균을 발견했다. 이로써 한센병이 미아스마(miasma), 즉 오염된 공기나 유전이 아니라 감염을 통해 발병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한센의 이름은 개칭된 병명으로 남았다.
근현대 국가들의 ‘격리’ 위주 방역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한센병이 ‘미개한’ 곳에서 발생하는 ‘야만적’ 질병으로 여겨지는 한편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에서 ‘문명화된’ 유럽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고개를 들었다. 1897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국제나병회의(International Leprosy Conference)에서 한센은 격리를 통해 한센병을 예방할 수 있다며 특히 노르웨이에서 시행된 강제 등록, 통제 및 격리 체계를 권장한다고 제안했는데, 이 결의안이 채택돼 이후 세계 각지에서 한센병 환자 격리 정책이 시행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회의에서 유럽으로의 한센병 유입 방지 대상 국가 중 하나로 지목된 일본에서는 위생 단체가 나서서 자국은 “‘문명국’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나병 환자가 (……) 멋대로 거리를 활보하게 놔둘 뿐만 아니라 제각기 직업을 갖”게 하니 구미인에게 보이기에 “실로 창피하다”라며 정부에 환자 격리를 촉구했고, 언론도 “인구 비율로 보면 세계 제일의 나병국이라는 사실이 국가의 치욕”이라며 거들었다.
1907년, ‘메이지 40년 법률 제11호’(통칭 ‘나(癩) 예방에 관한 건’)가 공포돼 1909년에는 전국 5개소에 공립 나요양소가 설립됐다. 자력으로 요양이 불가능하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는 ‘부랑(浮浪) 환자’가 수용 대상이었다. 이는 도쿄시양육원(養育院) 소속 의사 미쓰다 겐스케(光田健輔, 1876~1964)의 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는 이후 공립 나요양소 젠쇼(全生)병원 원장 시절인 1915년, 내무성에 「나 예방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해 요양소를 확충할 것, 모든 환자를 낙도에 격리할 것, 관리자에게 이른바 ‘징계검속권’(규칙을 위반한 환자를 재판 없이 처벌·감금할 권리)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고, 더 나아가 요양소 내 환자끼리의 결혼을 인정하되 여성 환자는 낙태, 남성 환자는 ‘단종’(정관절제술)할 것을 제창했다. 이듬해 1916년, ‘나 예방에 관한 건’이 개정돼 요양소 소장에게 ‘징계검속권’이 부여됨으로써 한센병 환자 관리 기조가 ‘구제’에서 ‘징벌’로 바뀌었고, 미쓰다는 ‘단종’을 감행했다.
1930년, ‘나(癩)의 근절책’을 모색한 내무성 위생국은 ‘20년 근절 계획’을 채택함으로써 새로 1만 명을 수용하는 시설을 만들어 10년 후 모든 환자의 격리를 달성하고 20년 후 환자가 거의 없도록 하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같은 해 일본 최초의 국립 나요양소 나가시마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이 설립돼 초대 원장으로 미쓰다가 부임했다. 이듬해 1931년에 공포된 ‘나예방법’은 격리 수용의 대상을 기존의 부랑 환자에서 모든 환자로 확대해 강제적인 절대격리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1930년대 이후 지역 내의 모든 한센병 환자를 요양소에 격리하려는 관민일체의 ‘무나현(無癩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했다. 1938년에는 구리우라쿠센엔(栗生泉園)에 ‘일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고도 불린 ‘특별병실’(일명 ‘중감방(重監房)’)을 설치하고 반항적이라 판단된 환자를 가혹한 환경에 방치해 약 9년간 수감자 93명 중 23명의 목숨을 앗았다. 그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일본 본토의 상황이 이럴진대 식민지 조선의 환경이 나을 리 만무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한센병 환자 격리를 위한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설하고 1934년 이를 확장해 소록도갱생원으로 개칭했다. 이듬해인 1935년, 본토의 ‘나예방법’에 준거한 ‘조선나예방령’을 제정해 전국의 한센병 환자를 소록도에 격리했는데, 1940년에는 입소자가 6천137명에 달했다. 1941년에 격리 수용된 1921년생 조선인 남성은 “환자 10명보다 소나무 한 그루가 더 중요하다”라고 공공연하게 지껄여지는 환경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그로 인해 열 손가락과 두 발을 잃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수차례 얻어맞고 감금실에 갇혔다가 징벌로 마취 없이 ‘단종’ 수술을 받았다. 1944년에 격리 수용된 1934년생 조선인 여성은 어린 나이에도 강제 노동에 동원돼 역시 열 손가락과 두 발이 상실됐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도 모자라 매월 15일에는 전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 1885~1942) 동상 참배까지 강요당했다. 입소자 이춘상(李春相, 1915~1943)에게 살해당한 스오는 수많은 조선인 환자에게 고통을 안긴 장본인이다.
광복 이후 한센인들의 참상
해방을 맞이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은 악화됐다. 일제 지배 이래 핍박받던 조선인은 식민자 이상의 잔학성을 표출했고, 그 손쉬운 대상은 한센병 환자였다. 1945년 8월 22일, 한국인 소록도 직원의 손에 환자 84명이 학살당했고, 이후 오랜 기간 경남 사천 비토섬을 비롯한 곳곳에서 주민에 의한 학살이 이어졌다. 일본의 미쓰다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소록도에서 도주한 한센병 환자가 일본에 대거 밀입국한다며 공포를 조장해 일본의 격리 체제를 강화했다. 한센병 권위자인 그는 1951년 제1회 문화공로자로 선정, 같은 해 ‘나(癩)의학에 대한 공헌’으로 제10회 문화훈장을 받았다. 1940년대 이후 유효한 치료제가 개발돼 한센병은 낫는 질병이 됐지만, 한일 양국의 한센인은 1990년대까지 격리와 낙태·단종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신체적 고통, 사회적 차별,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치 활동, 경제 활동, 창작 활동을 하며 살아냈고, 시대의 망각에 맞서 삶의 증거를 각인시켰다. 미야자키 감독을 움직인 사가와 오사무의 본명은 김상권(金相權), 조선 출신의 재일 한국인이었다. 도쿄 대공습을 겪고 발병해 세 곳의 요양소를 전전한 그는 한센병 자료관 개설(1993)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1996년 ‘나예방법’이 폐지됐고, 2001년 이른바 ‘한센병보상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2006년에 개정돼 소록도 입소자도 보상 대상이 됐다. 한국에서도 2017년, 한센인에 대한 강제 단종 및 낙태 수술의 국가 책임 및 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불치병’이 사라지고 한센인이 꾸준히 줄고 있는 지금, 한센병의 역사는 감염병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진짜 병원체는 세균이 아니라, 이웃을 낙인찍고 차별하는 우리의 시선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