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앞에 앉으면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하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책등들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풍경은, 오래된 병풍처럼 고요하다. 육십을 넘긴 지금, 그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책이 단순한 지식의 모음이 아니라, 내 삶의 조각을 비추는 거울이며 내가 건너온 강과 아직 건너지 못한 강을 보여주는 풍경임을 이제야 깨닫기 때문이다.
내가 책과 처음 마주한 것은 젊은 날, 레인보우 도서관의 한구석이었다. 무심히 꽂힌 문학 작품 한 권을 집어 든 순간, 활자가 품은 세계에 매혹됐다. 책을 빌린다는 행위 자체가 설레었고,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조금 더 나아진 듯했다. 그때의 나는 책을 통해 지혜를 얻기보다, 책이라는 존재 자체가 나를 한 단계 올려줄 거라 믿었다.
책장은 차곡히 쌓여갔다. 소설, 철학, 역사, 에세이… 겉보기엔 정갈했으나, 그 안엔 불안과 욕망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읽지 못한 책들은 미결 사건처럼 남았고, 같은 책을 여러 번 사는 일은 지식에 대한 집착의 흔적이었다. 마치 더 많은 책이 내 삶을 채워줄 거라는 착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작가의 서재 사진을 보았다. 벽을 가득 메운 장서 대신 몇 권의 얇은 책과 오래된 자전거만 놓인,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 단출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강렬한 울림이 다가왔다. 그는 삶을 채우기보다 덜어내며, 꼭 필요한 것만 곁에 두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 책장은 지적 탐구의 기록이 아니라, 불안과 욕망을 숨긴 방패였음을….
이제는 안다. 책은 숨을 곳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친구이며 길잡이라는 것을. 그래서 육십이 넘어 국문학과에 입학했을 때 주저함이 없었다. 늦은 나이의 도전이었지만, 그것은 평생 책 앞에서 품어온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시를 음미하고 소설을 해석하며, 글 속에 숨어 있는 삶을 따라 걸어가며 나는 젊은 날 놓쳤던 나 자신을 되찾아가고 있다.
내 책장 한 편에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있다. 주인의 말 한마디에 삶이 흔들리고 가족이 찢겨나가는 인물들 속에서, 엘리자는 어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강을 맨발로 건넌다. 그 장면은 늘 내 삶의 한 단면과 겹쳤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산다고 배웠지만, 돌아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굴레 속에 있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이 나의 주인이 됐고, 스펙이라는 이름의 굴레는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엘리자가 얼어붙은 강을 달리던 장면은 내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발밑 얼음이 갈라져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 나도 내 강을 건너리라.” 빚의 강, 두려움의 강, 시선의 강… 그 강물은 지금도 내 발목을 잡지만, 나는 조금씩 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면 책장 앞에 앉는다. 이제는 묻는다. “이 글이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건네는가?” 책의 행간에서 어제의 나를 만나고, 내일의 내가 고개를 든다. 책장은 더 이상 종이의 무더기가 아니라, 아직 읽히지 못한 내 삶의 문장을 여는 심장이다.
해리엇의 소설은 오늘의 나에게 여전히 묻는다. “너는 무엇에 묶여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아직 완전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도 나의 강을 건너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책과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 언젠가 저편에 이르면, 나는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나는 책과 함께 나의 자유를 읽어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