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나의 파란 하늘
최민정
이제는 알겠다. 나는 단순히 직업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나 자신을 찾았다.
아무리 안정적이고 안전한 길이라도,
내 적성과 맞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쇼펜하우어가 부유한 상인의 길을 버리고 철학에 몰두했듯,
나도 결국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졌다.
‘미쳤니?’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엄마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사실 그 말은 엄마만의 반응이 아니었다. 친구도, 동료도, 심지어 나조차도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렇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엄마와 같은 반응이었다. 사실 그 반응은 당연했다. 우리나라에서 공무원이란, 특히 여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정적인 직업이었으니까. 역설적이게도 나 역시 그 ‘안정’ 때문에 공무원이 되었는데, 정작 나는 숨 막혀 족쇄처럼 느껴져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육아휴직 첫날, 운전하며 신호 대기 중 보이던 유난히 새파랗던 하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일할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색이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올라왔다. 단순히 기쁨만도 아니었다. 이제야 숨을 쉴 수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하늘이 이렇게 파랬구나.”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날의 하늘은 단순히 푸르른 풍경이 아니라, 내게 “이제는 숨 쉬어도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마치 내가 새로운 인생의 문 앞에 서 있다는 신호 같았다.
출산 휴가 3개월 후 바로 복직한 나는 출산 직후라 바로 휴직을 쓰는 게 쉽지 않았다.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조직 분위기 역시 육아휴직을 곱게 보지 않았다. 제도가 보장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쓰는 순간 불이익과 눈총이 따라왔다. 지금처럼 육아시간을 주던 때도 아니었다.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조직은 ‘젊다’는 이유로 새로운 일들을 계속 맡겼다. 새벽 수유로 잠이 부족한 채 눈을 비비며 전철에 올랐고,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오면서도 늘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는 엄마 품을 찾았고, 엄마는 자꾸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집에 일거리를 싸들고 오지만, 정작 퇴근 후 집으로 들고 온 일들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따가운 눈총을 뒤로 하고 서둘러 칼 퇴근해 허겁지겁 집에 도착하면, 아이를 받아 목욕시키고, 젖병 소독하고 재우다 같이 잠들어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회사에서는 눈치, 집에서는 피로, 그리고 친정엄마에게는 미안함이 쌓여 갔다. 남편에게 도움을 바랄 수 없다는 것도 더 힘들게 했다. 새벽에 아이가 울어도 코를 골며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지 못했고, 주말이면 서로 피곤함에 지쳐 다투는 횟수가 늘어나 부부관계는 악화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게 엉망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일도, 육아도, 가정도. 직장에서는 죄인처럼 숨죽였고, 집에서는 예민한 엄마로 변해갔다. 친정엄마의 피곤한 얼굴을 보면 미안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승진이고 따가운 눈총이고 뭐고 일단 1년 휴직하기로.
휴직을 선택한 순간,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가족들의 시선이었다. 남편은 육아휴직을 했으니 아이를 당연히 어린이집에 안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러자 남편은 “그럼 휴직했으니 한 달만 보내고 그 후에는 보내지 말자.”고 권했다,
시어머니도 전화를 걸어 말씀하셨다.
“애가 너무 어린데 벌써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좀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리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오전에만 어린이집에 보내고, 낮잠 시간은 집에서 함께 보내며, 그 사이 나를 위한 시간과 아이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싶었다. 가족들에게 충분히 공감 받지 못한 나의 휴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우려, 시어머니의 잔소리, 이웃의 수군거림. 모두가 나를 향해 묻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 거니?”
하지만 육아는 고됐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아이와의 추억을 쌓으며 아이의 일상을 내가 직접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루는 둘째를 안고, 아들과 함께 아파트 주변에 매미를 잡으러 간 적이 있었다. 아이는 작은 손에 잠자리채를 들고 “엄마, 저기! 매미!” 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매미는 금세 높은 나무 위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아들과 함께 뛰어갔다. 하지만 매미는 높은 나무 위로 날아올라 버렸다. 아들은 순간 아쉬워하며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곧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포기하지 않고 다른 매미를 찾겠다며 팔짝팔짝 뛰는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참을 쫓아다니며 매미 소리를 듣고,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긴 매미를 발견하려 애쓰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벅찬 기쁨이 밀려왔다. 평소 같으면 더위와 귀찮음, 일상의 피로에 짜증을 내거나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육아휴직 동안 나는 그저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뛰고, 웃고, 소리치고, 때로는 매미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마음까지 온전히 느끼면서, 나는 삶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 짧은 한순간이 나에게는 세상의 어떤 상금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그 순간, 아들의 웃음과 매미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까지 모두 어우러져 내 마음속에 평화와 감탄을 함께 심어주었다. 일상에서 쉽게 놓치던 작은 행복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알았다. 이런 순간들을 위해 내가 휴직을 선택했음을, 그리고 이런 순간들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애초에는 단 1년만 계획했던 휴직이었지만, 어느새 1년이 또 1년을 불러오며 길어졌다. 그 사이 우리 집에는 둘째가 찾아왔다. 아이가 둘이 되자 육아는 분명 더 버겁고 고단해졌다. 경제적으로도 빠듯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나오는 웃음과 작은 성취의 순간들은, 그 무게를 오히려 감사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나 어느덧 육아휴직 6년이 끝나가고, 복직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답답해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는 끝없이 걱정과 의문이 맴돌았다.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간다고 해서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회사라는 공간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일과 육아, 둘 다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마음속에서 수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한쪽에서는 책임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가정 경제를 생각하면 당연히 복직해야 했다. 휴직이 길어지면서 무급휴직이 되었고, 가족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공포와 불안이 속삭였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육아에서 벗어나 다시 업무와 성과, 눈치와 경쟁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숨이 막히게 했다.
‘만약 그대로 돌아가면, 일은 일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엉망이 될 거야. 자존감은 또 바닥으로 떨어지겠지…’
‘하지만 어떻게 된 공무원인데…정년까지 보장된 직업인데…“
내 마음속 독백은 밤마다 반복되었다. 때로는 심장이 두근거려 숨조차 고르게 쉬기 어려웠다. 머릿속에서는 미래의 내 모습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피곤에 지쳐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나, 전철 안에서 졸며 출근하는 나, 업무 보고에서 실수하며 좌절하는 나… 모두 너무나 생생했다. 복직하면, 분명 남편과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것이다. 아이가 울면 누가 먼저 달래고, 저녁을 누가 준비할지, 주말의 시간을 누가 차지할지… 사소한 일부터 일의 우선순위까지, 매 순간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바로 나 자신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그 선택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숨을 쉬었고,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여보, 그냥 그만두는 게 어때? 차라리 육아에 전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허리띠 졸라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말은 나를 자유롭게도, 동시에 무겁게도 했다. 정년이 보장된 직업을 내 발로 걷어차는 일. 그건 단순한 결단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선택이었고, 가정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이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 한 쪽이 따뜻해졌다. 아마 남편도 알고 있었으리라. 내가 복직하면 다시 시작될 피곤한 일상과, 잠 못 이루는 밤들, 눈치 보며 살아갈 나의 모습을. 남편의 말은 배려였고, 동시에 내 결정을 조금 더 담대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되었다.
안정적인 직장과 미래를 중시하는 주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공무원’이라는 길을 선택했었다. 부모님은 물론, 친구와 선배들도 모두 그 길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 길이 적성에 맞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일에 발을 들이고 나니, 반복적인 업무와 조직의 관성 속에서 내 마음은 점점 숨 막히듯 답답해졌다. 안정이라는 옷은 너무 크고 무거워, 나는 그 안에서 자꾸만 걸려 넘어지고 있었다. 6년이란 긴 휴직 끝에 결국 그만두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 운명이 아니라 선택에서 온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증명하듯, 공무원이라는 길을 내려놓았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나는 결국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나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도 이제 조금 컸고, 이제는 내게 맞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나는 교육에 관심이 많고,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 마음이 편안했고, 도서관에 가면 마음이 안정되었다. 전집보다 그림책 한 권 한 권을 직접 고르고 읽히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꼈다. 아이들과 독후활동을 즐기던 기억과, 어릴 적 국문학과를 꿈꾸던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래서 육아를 하며 틈틈이 독서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 했다. 마침 코로나 시기였기 때문에 실시간 줌수업으로 많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도서관 봉사활동부터 시작하며 그렇게 노력한 끝에 어느 날 학교 독서토론 강사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력도 전공도 없었기에, 시골 어느 학교라도 부르면 먼 거리라도 기꺼이 달려갔다. 많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었고 기간을 보장받은 안정적인 일도 아니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학생들이 수업을 재밌어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벅찬 감동이 올라왔고, 무너져가던 자존감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내 자녀들에게 읽어주던 책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읽어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마지막 수업 날, 직접 만든 수세미 한 뭉치를 건네며 “선생님, 아이가 너무 재미있었데요.”라고 말하던 학부모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알겠다. 나는 단순히 직업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나 자신을 찾았다. 아무리 안정적이고 안전한 길이라도, 내 적성과 맞지 않으면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쇼펜하우어가 부유한 상인의 길을 버리고 철학에 몰두했듯, 나도 결국 내게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졌다.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미쳤냐고 하시던 친정엄마는 이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시며 응원해주신다.
“생각해 보니 너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 놀이를 많이 하고, 동생도 직접 한글을 다 가르쳐주고 했던 게 생각난다. 넌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나는 이제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어 방송대 유아교육과에 편입했으며, 그토록 하고 싶었던 국문학과 복수전공도 하고 있다. 작은 용기의 선택이 나비효과처럼 내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바꾸었다. 내 인생을 바꾼 선택은 안정이 아닌, 용기였다. 그 용기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 삶을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채우게 했다. 아이들이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의 푸른 하늘을 떠올린다. 그 하늘은 여전히 나에게 숨 쉴 자유를 일깨워준다. 진정한 행복은 누군가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때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내 자녀들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남들이 정한 길만이 정답이 아님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선택할 용기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은 바로 나 자신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그 선택 이후로 나는 처음으로 숨을 쉬었고,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음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