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제49회 방송대문학상

운수 좋은 날
신양섭


밤새 술 마시고 나란히 큰대자로 쭉 뻗은 그다음 날, 우리는 대학원 휴게실 소파에서 약속한 듯 같은 시간에 벌떡 일어났다. 이른 시간인데 마침 옆자리에 후배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얼른 폭탄선언을 했다.
“오늘부로 우리는 모든 영화를 같이 찍기로 했다. 연출도 같이하고 시나리오도 같이 쓴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기대했던 충격 효과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다. 하기야 그저께까지 구제할 길 없던 백수 노총각들이 뜬금없이 평생 공동 작업의 언약을 맺었으니 어리둥절하겠지. 태균과 나, 론도(論道)는 징그럽게 들리겠지만 이제 소울메이트가 되어 버렸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정말 깊숙이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말이다. 그렇게 안 하면 여러모로 갑갑해진다. 우리의 선택은 동성애와 아무 상관없는 37세 동갑내기, 두 이성애자 노총각의 불가피한 생존 전략이다. 바로 어제, 그 운수 좋은 날이 문제였지만 이 기괴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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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대학원 휴게실에서 ‘늙은이’로 통한다. 30대에 접어들자, 정신이 번쩍 들어 허겁지겁 논문을 쓰고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어느덧 박사 과정 5년 차라는 불편한 진실 또한 태균과 나에게 공통적이다. 언제부터인가 교수들이 먼저 감 잡고 슬슬 우리를 피하는 것 같다. 원래 공부 못 하는 애들이 오지랖 넓은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니던가? 우리는 만성적 답보 상태에 빠진 학업으로부터의 돌파구를 예술에서 찾고자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식으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잘만 되면 출세도 하고 학비도 벌 수 있다. 일거양득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랴? 이게 우리의 본성인 것인가? 몇 년 지나다 보니 이쪽에서도 우리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들이 되어 버렸다. 실력이 원숙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의미가 아니고 끝없는 좌절을 통해 닳고 닳은 노병이 되었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모든 게 낭만적으로 보였다. 보름이 멀다 하고 여기저기에서 신인을 발굴한다는 뉴스를 접할 수 있었고 시즌이 되면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용문을 마련해 주는 것은 말 그대로 풍요로운 ‘덤’이었다. 물론 우리들은 전공이 달랐기 때문에 지원 분야가 다르다. 영화과 대학원생인 내가 노리는 것이 단편 영화 공모전이라면 국문과 대학원생인 태균이가 사냥꾼 본능을 본격 발휘하는 쪽은 다름 아닌 신춘문예이다.

문제는 살인적인 경쟁률이다. 기본이 100 대 일이고 어떨 때는 일천 대 일도 넘어간다. 우리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여기저기 찔러보았지만, 어느 한 군데에서도 ‘숙명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연전연패의 기조는 흔들릴 줄 모르지만 태균과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루저 특유의 ‘느긋한 패배 의식’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에 내세웠던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자’라는 신조는 언제부터인가 ‘소심한 성실함보다는 심사위원 선생님들도 헷갈리게 만들 개성’으로 변해 갔다. 만성적 피로와 구분하기 어려운 우리들 특유의 집중력 부족 현상은 준비 기간 내내 이걸 시도하다 저걸로 바꾸고 그러다가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면서 결국 맨 처음의 ‘이것’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 백전노장들에게는 ‘당일치기’라는 보검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루저들은 허무하게 무너질 것 같지만 마지막이 되면 정체불명의 객기를 발휘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또다시 흩트려놓는다. 물론 대부분은 그 방식들이 전혀 정통파 적이지 않아서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 십중팔구 보잘것없지만 공모전처럼 성실함이 결정적 변수가 되지 못하는 문화에서는 혹시 모르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미련 없이 한 번 찔러는 본다’로 결론 내릴 수 있는 우리들의 기본 전략도 한 가지만은 유념한다. 그것은 어느 날 태균이가 고안한 소위 ‘2의 법칙’이다. 즉 ‘이틀 밤을 새우면 절대 안 된다’라는 격률이다. 즉 마감일 전날부터 잠 안 자고 계속 작업하려면 그 전날은 반드시 제대로 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만 잘 지킨다면 베테랑들에게 당일치기는 오히려 평소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변칙 테크닉의 진수이다. 진작에 없어져 버린 정신력을 대체할 수 있는 밀도 높은 도피 의식은 굳이 비유하자면 마라톤 경주에서 막판 200미터를 순식간에 질주, 관중들을 놀라게 하는 선수의 상황과 흡사하다. 물론 시청자들은 한 번 더 놀란다. 그 선수의 최종 성적이 고작 중하위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평생 시에 묶여 있던 시인과

줄곧 카메라 속만 뚫어지게 응시했던 감독은

그 프레임 바깥이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여태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시와 카메라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호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터무니없이 단순한 통찰은 그러나 이렇게

 ‘시와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와 시’라는 명찰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스퍼트를 맹신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순간만큼은 제대로 발버둥을 치면서 분명히 예감하고 있는 불합격에 대한 보상 심리 기제를 미리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보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여튼 당일치기는 베테랑들에게는 백병전에서의 단도와 같다. 그 와중에 뜨듯한 커피를 두 시간에 한 잔씩 모두 다섯 잔 마시면 내 몸은 저절로 카페인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합법적인 도핑인 것이다. 그 효과는 정말 대단하다. 24시간이 넘게 말똥말똥한 상태가 유지된다. 그리고 마감 시간 직전까지 이상한 침착함이 내 몸의 피곤함을 잊게 해 준다. 기분이 꽤 괜찮다.  

지금이 밤 10시이고 모레 밤 자정이 마감이다. 아직 시간이 이틀 이상 남은 것이다. 물론 완전히 다른 공모전들이지만 우리 둘에게 이 점만은 공통적이다. 오랜 체험 끝에 태균과 나는 터득했다. 오늘은 무조건 푹 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의 강점이 빛을 발한다. 맥주 두 캔씩 마시면서 태균과 나는 숙면을 할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지난 10년간 대학원 휴게실을 운동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면서 건진 게 이것 딱 한 가지이다. 마감을 48시간 앞두고 푹 잘 수 있다는 것. 아니, 이건 정말 우리의 실력이다. 이를 위한 바로 그 필요조건, 즉 지금 대학원 휴게실의 그 긴 소파에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용의주도하게 확인한 바 있다. 이제 그 자리만 그냥 점하면 된다.

친구는 이게 좋다. 서로 자화자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감이 더 좋다. 술과 잠의 위력 그리고 내일부터 시작될 커피의 향연을 예감하는 황홀함 속에서 갑자기 없던 여유가 생긴다.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오랜만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뜻밖의 아이디어들이 생기려고 한다.   
“야, 론도야. 이틀이면 정말 무한한 시간이다. 글이 좋은 게 뭔지 알아? 공식적으로 페이크가 가능하다는 거야. 따로 글로 변론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 자체가 글이니까.”
“태균아. 넌 좋겠다. 그래도 시 공모전이니까, 그냥 적당히 거짓말한다고 혼나지는 않잖아? 난 달라. 손수 만들어야 한다고. 몸으로 때워서. 단편 영화가 말이 15분 단편이지, 어휴, 암만 미니멀하게 만든다고 해도 최소한 뭔가는 찍어서 보여줘야 하잖아. 큰일 났다. 어떡하지? 무슨 비책 없을까? 여태까지 한 게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아까 다 엎었어. 새로 시작해야 하거든.”
“근데 이상하다. 아까는 시 쓴다고 한 줄 한 줄 쥐어짜는 게 정말 싫었는데. 체력도 다 방전되고. 그런데 그것 참 묘하네. 지금은 내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왜 남의 머리 깎아주려니까 아이디어가 샘솟지? 그런데 그거 아니? 너 스스로 지금 답을 말했잖아. 바로 그 킬러 콘셉트.”“뭔 소리야?”
“바로 그거지, 미니멀리즘. 가능한 한 작게. 가능한 한 적게. 그리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태균아, 그러니까 내 작업의 진짜 필요한 그 지름길이 너한텐 바로 보인다 이 말이지? 남의 일이라서 부담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 역(逆)도....”
“물론 성립하지. 내가 며칠 동안 끙끙대면서 씨름하는 걸 네가 손쉽게 풀어줄 수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어?”
“야, 이런 게 있었구나. 이걸 여태 왜 몰랐지? 정신이 번쩍 드네. 이번에는 정말 네 말대로 단순하게 생각해 볼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그러면 일단 오늘 푹 자고 내일 론도 영화감독이 태균 시인의 글을 한 번 미니멀하게 감수한다. 그리고 그 시간에 시인은 감독님 콘티를 단순화시켜 준다. 그리고 직접 무비 카메라를 들고 한 번 나가보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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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대로 푹 자고 일어난 우리들은 어제 술 취한 김에 장난삼아 얘기했던 그 문제의 미니멀리즘을 진지하게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냉철하게 말하자면 어차피 우왕좌왕하다 마감을 앞두고 원점으로 돌아간 현 상황에서 이 단순함의 미학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태균아. 그래, 쉽게 생각하자. 미니멀하게. 답이 바로 우리 곁에 있잖아. 그냥 손을 쭉 뻗으면 우릴 기쁘게 맞이하는 거야, 그렇지?”
“문제는 각론이지. 말하자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단순함의 미학을 실천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야.”
“어제 정말 너한테 한 수 배웠다. 그래, 모든 걸 가장 원초적인 데서부터 쉽게 바꿔버리는 거야.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어제 우리가 합의를 봤지? 네가 내 시 써주고 내가 너 영화 찍어주고. 논리가 너무 과격한가?”
“이왕 확실하게 사고 치려면 무식하게 밀고 나가자. 야, 우리 제목부터 똑같이 하자. 방향만 정반대로 바꾸고.”
“그렇다면 영화와 시? 시와 영화?”
“그건 좀 그렇고. 시는 괜찮은데 영화는 좀 아니지?”
“론도야, 묘안이 하나 있다. 내가 너 대신 ‘시와 카메라’라는 제목으로 15분 단편 찍고 너는 날 위해서 ‘카메라와 시’로 시 한 편 쓰는 거야. 뭔가 정말 새로울 것이다.”
“야, 좋다. 그래야 우리의 노력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시키지? 중간에 너든 나든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이쪽에도 붙이고 또 살짝 바꿔서 저쪽에도 끼워놓고.”

그날 우리는 정말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시와 카메라’와 ‘카메라와 시’가 우리 사고의 이정표가 되자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평생 시에 묶여 있던 시인과 줄곧 카메라 속만 뚫어지게 응시했던 감독은 그 프레임 바깥이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여태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시와 카메라는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호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터무니없이 단순한 통찰은 그러나 이렇게 ‘시와 카메라’ 그리고 ‘카메라와 시’라는 명찰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각자 본격적으로 남의 길을 가기 앞서서 우리는 거듭 다짐했다. 가능한 한 일인칭 주관적 시점에 기반한다, 그리고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단순하게 묘사한다. 시인 태균이는 카메라로, 영화감독 론도는 글로. 이러한 세부 지침을 마련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 모두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 배워 온 미니멀리즘의 진수, 즉 육하원칙이다. 언제? 어디서? 바로 지금 여기서. 누가? 내가. 무엇을? 세상을. 어떻게? 가능한 한 간명하고 진솔하게. 왜? 그러면 기쁘잖아. 세상을 한 번쯤 분명하고 단순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그런데 태균이는 한술 더 떠서 무비 카메라도 필요 없고 그냥 핸드폰으로 찍겠다고 객기를 부렸다. 그래야 현장감이 난다나? 그렇게 하면 B 무비 특유의 생경함이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 더 호감을 준단다. 태균이의 한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 와중에 이 친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내 핸드폰까지 여분으로 갖고 가는 치밀함을 과시했다. 이럴 때는 정말 믿음직한 녀석이다. 

이제 나는 바통을 물려받아서 태균이 대신 태균이 시를 써 본다. 여태까지 작업한 것을 한번 쭉 읽어 보니 안 나오는 생각을 억지로 글로 쥐어짠 듯 작위적이었고 도대체 자기 생각을 전개하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이제 난 눈 딱 감고 그냥 내 맘대로 완전히 새롭게 판을 짜기로 했다. 그렇다면 시인인 내가 이제 카메라를 들고 ‘세계’에 대해 ‘관(觀)’ 즉 ‘바라봄’을 여기저기 투사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너무 나가면 안 된다. 미니멀리즘은 단출함이 생명이다. 느리게 걷고 차분히 바라보자.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시인으로서 내 시선을 스스로 관조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스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바로 그 ‘자기 반영성’이 아니겠는가? 20세기 초반 전위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뭐였던가? 거울로 자기 모습 바라보는 것이었잖아? 혁명가가 된다는 발상이 저 높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말 희한하다. 남의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도대체 내가 이렇게 시를 좋아했던가? 태균에게 훈수를 두다가 자기 최면에 걸린 것 같다.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난 게임 아바타 특유의 ‘붕붕 떠다니는 경쾌함’으로 우리의 미니멀리즘을 하나하나 실천해 갔다. 전체가 세 부분으로 단출하게 구성된 신작(新作) 시 첫 장에서 난 배회하는 시선으로 세계를 둘러보았다. 어디? 가능한 한 가까운 곳. 즉 여기 대학원 휴게실에서 학교 후문으로 나가면 바로 나타나는 그 언덕길의 자그마한 꽃밭을 묘사했다. 사실상 내 시선의 운동감 그 자체를 그냥 막연하면서도 차분하게 서술해 본 셈이다. 그리고 2장에서는 거기서 가장 추상화시키기 좋을 대상에 시인의 내면으로서의 카메라 시선을 고정하고 그 표면과 이면을 스케치해 보았다. 말이 표현이지, 그냥 명사와 형용사를 적절히 섞어 가면서 추상적으로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장에서는 카메라를 180도 돌려서 내 얼굴을 비추는 것처럼 그 순간의 희로애락을 전보 치듯 툭툭 몇 마디 글자로 옮겨 보았다. 마치 논문 키워드 몇 개를 나열한 식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 쓴 후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생각하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뽑는데 저기서 태균이가 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도 거의 내 콘셉트를 그대로 실천했다. 학교 앞 언덕길 내려가면서 느린 속도로(그렇지. 미니멀리즘은 절대로 느린 속도여야 한다)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어디를 찍으면 쉽게 될 것인지 고민했단다. 그 순간 하이데거가 고흐의 농부 신발 그림에 관해 쓴 글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 위대한 철학자는 여기서 세상의 진정한 존재 법칙을 논했다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논하면 어디든지 얼추 다 통한다. 마침, 그때 도대체 사람이 사는지, 아닌지도 모호한 단층 건물의 계단 상단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여성 단화 한 짝이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서서히 시선을 고정하고 3분 정도 찍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태균이는 카메라 움직임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아주 느리게 조금씩 움직여가는 영리함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은 꼭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미니멀리즘의 법칙을 잊지 않았다. 카메라, 아니 핸드폰을 천천히 180도 돌리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 간 것이 있다. 만약 자기 얼굴이 비치면 이 영화를 남이 대신 만들어준 것이 들통나잖아? 그래서 얼른 한 손으로 미리 준비했던 또 다른 핸드폰을 집어서 반대쪽으로 들어 올리고 그것을 정면에서 찍는 것으로 촬영을 마무리했단다. 하여튼 노병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법을 부릴 줄 안다.

우리는 서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과연 남의 머리를 깎아줄 때 우리는 천재적인 이발사가 되는 것일까? 한편으론 왠지 억울했다. 왜 몇 년 동안 바보 같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 멍청한 은자의 생활을 고집했을까? 마침,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도 엄습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 노병들의 낙관주의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여러 성현이 말씀하셨지. 오늘 만족할 것을 가지고 지금 불만족스러워한다면 바로 그것이 불경한 거야. 그래, 됐다. 그냥 이걸 좀 다듬고 내일 제출하자. 그리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심전심? 그 깊은 메시지를 어찌 우리가 모르겠는가? 내일도 도와줘! 나도 도와줄게! 정말 대담한 애프터서비스가 아닌가? 이보다 더 높은 고객 만족도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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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반전이다. 우리는 마감을 하루 앞두고 무려 8시간이나 푹 잘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을 말이다. 평소 실력을 보자면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최종적으로 합의한다. 끝까지 너를 지켜줄게! 멜로드라마가 따로 없을 정도이다. 루저들은 자기 합리화에 빼어난 소질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 깊은 뜻도 모르면서 평소에 엘리트주의라고 목청껏 거부했던 작가주의가 이제 우리들의 새로운 신조가 되었다. 그래, 진정한 창작에는 공동 작업이란 없다. 우리도 이제 진정한 작가가 되어 보자. 혹시 모르지. 먼 훗날 우리의 이름 세 글자가 판테온의 신전에 등재될지. 옥에 티라면 그 작가가 내가 아니라 남이라는 것. 본의 아니게 명의를 도용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머피의 법칙이 그렇게 잔인무도하지는 않다는걸. 설마가 설마 좋은 쪽으로 사람을 잡겠냐? 엉킬 것마저 없는 루저들에게 일이 더 이상 꼬여 봐야 그게 그거지,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그냥 밀고 나간다. 태균이는 끝까지 론도 영화의 섀도 작가가 되는 것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론도는 태균이의 시를 끝까지 책임진다.

우리는 머피의 인간적 자비를 철석같이 믿는다. 나쁜 일은 꼭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결국 세계는 망할 것이다? 아니다. 이 우연의 신은 필연성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게 카오스가 되면 그냥 그렇게 놔두지 거기서 또 희한하게 일이 꼬이게 할 정도로 자상한 분이 아니시다. 설마 우리 응모작이 당선되겠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그래, 만에 하나, 둘 중의 한 명이 뽑힌다고 치자. 그거야말로 행복한 고민이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서 누군가 상대의 지시를 하달받는 아바타가 된다면? 아, 이런 고민은 생각 자체만으로도 정말 배부른, 아니 황홀한 고민이다.
 
사실 여기에 가설 차원의 함정이 하나 숨어 있긴 하다. 그러나 태균과 나, 그 둘 중 누구도 이 부분을 언급 안 하고 넘어갔다. 태균이도 알았을까? 몰랐을까? 정말 이건 불가능에 수렴하는 상황이긴 한데.... 만약 둘 다 ‘그것’이 된다면? 그러니까 론도 작 단편 영화 「시와 카메라」와 태균 작 시 「카메라와 시」가 동시에 당선된다면? 그래서 정말 놀랍게도 여기에서마저 머피가 우리들의 뒤통수를 심하게 때린다면? 이건 좀 문제가 복잡해진다. 설마.... 나는 호기심과 홀가분함, 막연한 그리움과 공포심이 짜릿하게 교차하는 것을 직감하면서 그냥 이 점을 말 안 하고 넘어갔다. 태균이도 마찬가지였을까? 

그날 마무리 작업을 할 때 육하원칙의 ‘어디서’가 우리의 심기를 좀 괴롭혔다. 생각해 보시라! 마감 당일 국문과 대학원 ‘늙은이’ 태균이가 같은 노병, 론도의 자리에서 영화 편집을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될까? 이건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니다. 우리는 임기응변 모드로 전환했다. 핵심은 우리의 범상치 않은 청각이다. 시각적으로 타인들에게 별다른 위압감을 선사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우리들은 피식자(被食者) 특유의 예민한 청각을 타고났다. 특히 뭔가 혼날 만한 짓을 저지를 땐 늘 문을 살짝 열어 놓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아주 미세한 발걸음의 기척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히 지금 편집실은 우리 빼놓고 아무도 없다. 그래서 국문과 태균이는 영화과 론도의 PC에서 엄정하게 편집 작업을 한다. 그리고 옆 컴퓨터에서 론도는 태균 명의의 작가적 시상을 하나하나 그 투명한 형식미로 조탁한다. 마치 「타짜」 영화에서 이지적 용모의 아저씨에게 장물아비로서의 쓰라린 과거는 그냥 로맨틱한 추억일 뿐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예리한 견제구를 던진 건 후배 상욱이와 지만이다. 그러나 워낙 민활한 주자인 우리들은 얘네들이 편집실에 들어올 때면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고 어느새 여유롭게 제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정중동의 진수이다.
“태균이 형, 놀러 왔구나. 오늘 신춘문예 마감 아니야?”
론도가 자기 자리에서 PC를 다루는 척 시뮬레이션하면 태균은 너스레를 떤다.
“노병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마침, 아이디어가 바닥날 때 론도의 예리한 편집 감각은 나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다시 그들이 물러가면 우리는 기민하게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식으로 결국 작업을 마무리했다. 마감 시간을 무려 2시간이나 남기고 말이다. 또다시 ‘2의 법칙’이다. ‘늘 평소에 성실하여라. 그래서 마감을 두 시간 앞두고 미련 없이 최종본을 제출하는 여유로움을 늘 간직하라!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다.’ 대놓고 바꿔치기를 해서 그런지 모종의 윤리의식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괜찮다. 헷갈릴 때는 서슴없이 그 단어 앞에 ‘메타’를 써 붙이라고 인문학 선생님이 강조하지 않았던가? 뭔가 께름칙할 때야말로 자기 비판적 성찰이 활성화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희로애락은 본래 뒤엉켜져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언행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창조적인 현대인이라는 방증이란다. 자신에게 메타 성찰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눈 지그시 감는 시뮬레이션을 서로에게 시연하면서 같은 시, 같은 분, 같은 초에 ‘최종 제출’ 버튼을 누르는 끈끈한 동지애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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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원 휴게실은 풀뿌리 인민주의의 온상이다. 헐벗은 자들, 심지어 일신상의 고민으로 폐인이 된 사람들에게 이 20평의 공간은 말 그대로 오아시스다. 그런데 이곳이 오늘처럼 공모전 발표 날짜가 겹치는 날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함과 숙연함의 장소로 돌변한다. 여기서 수많은 루저들은 꿈보다는 맷집을 길러 왔다. 그래서 여기서 각별하게 유념해야 할 상용어와 금지어가 있다. 전자는 ‘낙법부터 배워라!’라는 것이다. 유도 입문자들이 처음 몇 달 동안 올바로 쓰러지는 법만 배운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스포츠 덕목, 즉 ‘다치지 말라!’가 실천될 수 있다. 사실 여기 구성원들은 저절로 다음과 같은 희한한 역설을 진작에 깨달았다. ‘실력을 길러서 공모전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 공모전을 통해서 실력을 기르는 것이 맞다.’ 그러면 도대체 당선은 어느 세월에 되냐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추론해 낸 여덟 자의 금지어를 재구성할 수 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이것이다. ‘차라리 로또를 하지.’

발표 당일 오후, 네 시와 다섯 시 사이는 우리의 공동체 의식이 거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수준으로 급상승하는 시간이다. 일전에 어느 선배는 그 시간을 서글픈 골든 타임이라고 명명했었다. 당선이라는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기적이 될 때 후배들이 무슨 말들을 하게 될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익숙한, 수천 번 시뮬레이션했던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와! 형, 대박이다. 약속했지? 등단하면 우리 평생 책임져 준다고.”
안타깝지만 이런 일들은 내가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신화의 범주에 속할 뿐이다. 늘 가능태로만 존재하는 시나리오.

이날, 이때만 이 공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백색 소음을 관통한 것은 태균이의 핸드폰이다. 난 지금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마침, 이 자리를 같이해주던 십여 명의 후배들의 눈빛은 글쎄 뭐라고 표현할까? 놀라움과 설렘, 간절함? 아니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야 전체가 다 설명될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찰나의 백일몽일 수 있다는 그 고밀도의 개연성,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실망에 대한 본능적 공포감이었다.
“네, 네, X태균 본인입니다.. 네, 제 생년월일은...”
수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태균이를 보면서 나는 이제 그 말을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는 순간에 과거의 모든 일들이 쏜살같이 내 머릿속을 지나가 버린다는 것.

그 자리에 남은 후배들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면서 서로 어떻게 말문을 열지 망설이는데 그 순간, 또 다른 벨 소리가 울렸다. 내 핸드폰이었다. 그렇다. 같은 내용의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나 또한 그 공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그때 과연 어디를 쳐다보고 있었을까? 벽에 걸려 있는 아날로그 시계를 응시했다고 한다. 이상하게 인상을 쓰면서 말이다. 한 후배가 그렇게 회고한 바이다.

태균과 나는 복도의 자판기 앞 공간에서 각자 통화를 마치자 곧바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노병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들이 당도할 때 본능적으로 쑥스러움과 민망함을 느낄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상황이 복잡해졌음을 직감한다. 머피는 정말 대단하다. 그분은 우연성의 귀천을 안 가리시는구나. 하필 요렇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은 우리는 즉석에서 도원결의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영화 <파계>에서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주인공들처럼 이 실존의 비밀을 무덤까지 같이 가지고 가기로 서로 다짐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나는 당장 오늘 꼭 필요한 실천 명제를 도출했다. 지금 곧바로 대학원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서 승전보를 알리고 다 같이 기뻐 날뛰자. 그러기 위해서 이 결과에 집중하고 ‘지난겨울에 일어난 일’을 까맣게 잊자. 들통나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이다. 후배들이 자꾸 복잡하게 질문하면 낭패다.
“그게 지금 쉽지 않을 텐데.”
태균이 주저하자 내가 지혜로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 우리의 미니멀 전략은 가능한 한 빠르게 모두를 술 취하게 만드는 것.”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들을 둘러대면서 후배들을 다 데리고 호프집으로 직행했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이었다. 대낮에 이미 중국 음식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라는 궁색한 변명에 우리 착한 후배들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야릇한 저의가 담겨 있을 줄 걔네가 상상이나 했겠냐?

디스토피아로만 존재했던 꿈의 향연에서 우리들은 루저 특유의 침착함과 강인함을 지킬 줄 안다. 지금은 그냥 미니멀 콘셉트가 필요하다. 오늘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빨리 이 순간의 기쁨들을 필름이 끊길 때까지 쭉 이어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연속 편집이 요구된다는 것. 동시에 지혜로운 우리는 한 가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즉 다음의 금지어가 오늘 좌중에서 절대 언급되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브로맨스’이다. 어차피 우리들은 내일 당장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누가 ‘비범한 당선작’이라고 평가한 이번 당선작의 배경을 궁금해할 때, 아니면 어느 영화마니아나 문학 지망생들이 느닷없이 표창을 날릴 때,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갑자기 어느 날 대학교 교수님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심층 면접하자고 제안해 올 때....

결론은 이렇다. 태균과 론도는 서로에게 정말 아바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주인의 인격을 가상현실 속에서 어쩌면 더 충실하게 대변하는 대리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 아마도 그때 술기운의 황홀함 속에서도 우리는 이 점을 깊게 인식했을 것이다. 들통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서로를 알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혹시 생길 수 있는 재난 상황에 대해 선수를 치기 위해 우리는 당장 다음날 「아바타」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공동 연출하고 시나리오도 같이 쓴다고 후배들에게 선언했다.
아, 그래! 한 가지 또 기억에 남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는 그 문제의 회식 자리에서 필름이 끊기기 전에 남은 담배 한 개비라도 더 피우려고 골목길로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무슨 일인지 감정이 북받쳐 서로 포옹했다. 어쩌면 눈물이 흐르려고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는 이번에는 찰리 채플린 선배님을 인용하면서 떠듬떠듬 복창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둘 사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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