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나물 리뷰]는 ‘영화가 나에게 물었다’의 앞 글자를 딴 연재로 최근 개봉한 영화를 리뷰하는 기사다. 한 편의 영화에는 하나의 세상이 담겨 있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나물 리뷰]는 영화가 던지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정답은 없다. 백 명의 관객에게서 백 개의 영화평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기에. 세상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면서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띠우는 씨네마 레터.

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달성한 「국보」(감독 이상일)라는 영화가 11월 19일 국내 개봉했습니다. 흥행 기준 척도가 되는 천만 관객이라는 용어는 한국 관객에게는 17번이나 경험할 만큼 친숙하지만, 실사 영화를 기준으로 할 때 인구수가 한국의 두 배가 넘는 일본에서는 드뭅니다. 2003년 개봉한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감독 모토히로 카츠유키)가 1,260만 관객을 동원하며 실사 영화 관객 수 1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11월 10일 기준으로 1207만 관객을 돌파한 「국보」가 곧 1위에 등극할 것 같긴 합니다. 23년 만의 천만 실사 영화네요. 3시간에 달하는 174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일본 관객을 홀린 걸까요? [영나물]에서는 「국보」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야쿠자의 아들 vs 명문가의 아들
야쿠자의 아들이지만 가부키 배우를 꿈꾸던 소년 ‘키쿠오’(쿠로카와 소야)가 있습니다. 당대의 가부키 명문가의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 앞에서 서투른 공연을 선보였는데, 한지로는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챕니다. 그때 반대파 야쿠자들의 급습을 받고 키쿠오는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어린 아들마저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는 법. 한지로가 키쿠오를 그의 가문 소속 견습생으로 받아줍니다. 키쿠오는 등에 ‘올빼미 문신’(은혜를 갚는 동물이라는 의미)을 새기고 한지로를 스승 이상으로 따릅니다.

여기서 잠깐. 키쿠오의 아역 시절을 연기한 쿠로카와 소야는 「괴물」 [영나물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트릴 생각인가?」(<KNOU위클리 194호)에서 ‘미나토’ 역을 맡았던 배우인데요. 참 잘 자라준 거 같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코시야마 케이타츠)는 처음에 텃세를 부리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지만 곧 절친이 됩니다. 둘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점점 가부키 배우로 성장합니다. 성인이 돼 함께 연기한 ‘듀엣 공연’이 흥행하면서 스타의 자리에 오르죠. 그런데 키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 사이에 불안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키쿠오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한지로’라는 이름을 물려받을 사람은 피로 맺어진 아들 슌스케였으니까요. 견디지 못한 키쿠오가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너의 피를 한 컵 받아 마시는 거야”라고 말하며 둘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습니다.
그런데 키쿠오의 놀라운 무대를 본 슌스케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절망합니다. 신이 내린 재능에 무서우리만치 집요한 훈련이 합쳐진 키쿠오야말로 가문의 이름을 물려받을 진정한 후계자란 걸 알게 된 거죠. 그렇게 슌스케는 자취를 감춥니다. 키쿠오의 연인과 함께요. 10년을 기다리던 한지로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키쿠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키쿠오가 물려받은 이름의 무게를 인정하지 않죠. 아버지의 죽음 후에야 집으로 돌아온 슌스케는 자연스럽게 가문의 중심에 다시 섭니다. 이제는 키쿠오가 떠날 차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진한 피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요? 두 남자의 ‘국보’(인간문화재)를 향한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은 영화 내내 재능이 먼저인가, 혈통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실 「국보」는 볼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일본 전통극 가부키에 대해 이보다 더 자세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스크린에 구현해 냈기 때문입니다. 그냥 스쳐가는 정도의 소개가 아니라, 키쿠오와 슌스케 서사의 풍성한 배경으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먼저 둘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후타리 후지무스메(二人藤娘)」에서는 두 처녀가 등나무 정령으로 등장해 부질없는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기무스메(鷺娘)」는 하얀 기모노를 입은 처녀가 백로의 정령으로 등장해 이루지 못한 일편단심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극이고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소네자키 신주우(根崎心中)」는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결국 동반자살을 감행하는 내용이죠. 영화는 마치 가부키 무대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처럼 화려합니다. 인물의 심리에 따라 클로즈업과 전경샷을 유려하게 오가며 강한 조명으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이것 만으로 이상일 감독은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부키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자는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룰이죠. 17세기 가부키 극에서는 여배우도 무대에 올랐지만, 남자 배우들과의 염문설 등이 퍼지면서 아예 여배우의 존재를 무대에서 퇴출했다고 영화는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국보」가 흥미로워집니다. 키쿠오와 슌스케가 바로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자 배우인 ‘온나가타’(女形)로 키워진다는 점입니다.

키쿠오는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지우기 위해 내면의 남성성을 철저히 죽이고 무대에서 완벽한 여성으로 피어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가진 건 재능밖에 없는 키쿠오가 혈통과 가문이 중요한 가부키 세계에서 자신의 본류를 지우고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죠. 이런 설정으로 영화는 키쿠오가 왜 그토록 예술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그에게 국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합니다. 남배우가 재현하는 여성은 완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예술에서 어떤 의미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국보」는 인간 본질을 꿰뚫는 통찰과 함께 예술이 어떻게 인간을 성장시키고 초월하게 만드는지를 두 남자의 서사 안에 담아냈습니다.
영화에 오버랩된 재일교포 3세 감독의 쟁투
「국보」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요시다 슈이치가 3년 동안 가부키 분장실을 드나들며 체험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이상일 감독은 「악인」(2011), 「분노」(2017)에 이어 「국보」로 요시다 슈이치 작가와 세 번째 호흡을 맞췄죠.
이상일 감독은 데뷔작 「푸를 청」(1999)으로 피아필름페스티벌 4관왕을 차지하며 일찍이 주목받았습니다. 「훌라 걸스」(2007)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휩쓸며 대중성과 예술성까지 인정받았죠. 「악인」, 「분노」에 이어 「유랑의 달」(2023)에서는 인간 본질과 사회적 딜레마를 꿰뚫는 시선으로 세계 영화계의 찬사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주류 상업영화계보다는 독립영화계였죠.

그런 면에서 「국보」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키쿠오의 모습에서 이상일 감독의 자전적인 모습이 투영돼 보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이상일 감독은 재일교포 3세입니다. 3세대가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이름을 고수합니다. 이상일 감독은 경계인으로의 자신의 정체성과 어쩌면 일본 내에서 끝끝내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가장 일본적인 예술 장르 가부키에서 ‘온나가타’ 역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려 ‘악마와 계약한’ 키쿠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 일본 출품작으로 「국보」가 선정된 것이 그가 도달한 성취의 의미일까요? 늘 그렇듯 정답은 없습니다. 2025년을 마무리하는 12월, 극장에서 「국보」가 던지는 질문을 온전히 음미하시길!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