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의 미로」(2006), 「셰이프 오브 워터」(2018) 등의 영화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생명체로 빚어냈던 크리처물의 대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평생의 숙원이었던 「프랑켄슈타인」 영화 작업을 마쳤다. 7살 어느 일요일 오후 TV에서 영화 「프랑켄슈타인」(감독 제임스 웨일, 1931)를 보고 “저게 내 메시아이자 예수!”라고 외쳤던 소년이 할리우드에서 두어 번의 제작 무산을 거쳐 환갑이 지나서야 넷플릭스에서 1,600억 원을 투자받아 필생의 프로젝트를 완성한 것이다.
똑똑하지만 이기적인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은 오스카 아이작이 맡아 광기와 공포감에 사로잡힌 인물을 연기했다. 델 토로 감독이 골상학과 해부학을 연구해 생기를 불어넣은 ‘피조물’(제이콥 엘로디)은 순수함에서 출발해 집요함을 향해 달려간다. 무한 재생능력을 갖췄다는 점이 원작과 다른 점.
“아이를 낳고서야 아버지를 이해했다”라는 감독의 자전적인 고백처럼 「프랑켄슈타인」에는 그가 전작부터 천착해온 ‘부자 관계’라는 주제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버지 남작과 프랑켄슈타인 관계에서는 둘의 욕망이 왜곡돼 교차하고,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 관계에서는 상호 파괴 속에서 화해를 꿈꾼다. 선장과 선원 그리고 국가(후원자)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확장하면 개인성의 부재 속에서 벌어지는 거래와 희생이, 세상과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윤리의 강요와 사회적 추방이 떠오른다.
부자 관계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더 잘 이해하려면, 감독 스스로 ‘쌍둥이’ 영화라 불렀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 넷플릭스)를 함께 보는 것도 좋은 독법이다. 피노키오와 제페토에게서 부자의 공존 가능성을, 시장과 아들의 강압적 관계에서 죽음이라는 비극을, 서커스 단장과 원숭이 스파차투라에게서는 소유물에 대한 착취와 해방 추구를, 신부와 신도 사이에서는 개인성의 억제와 복종이라는 조건부 수용의 모습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두 영화는 ‘쌍둥이’보다는 ‘짝패’로 분류할 수 있어 보인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