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우리는 함께 도전하는 방송대 부부

‘고학력 U턴’의 시대 방송대의 캠퍼스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과거 방송대가 대학 진학의 기회를 놓친 이들의 만학의 장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이미 대학 학위를 가진 고학력자들이 인생 2막 설계를 위해 다시 돌아오는 ‘학력 U턴’의 거점으로 진화한 것이다.
실제로 방송대 학우들의 최종 학력 분포는 지난 10년 새 극적인 반전을 보였다. 2015년 입학자의 절반 가까이(49.2%)를 차지했던 고졸 학력자는 2024년 30.4%로 줄어든 반면, 4년제 대졸 이상 입학자는 19.8%에서 36.6%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대학원 재학 이상 학력자 또한 6.2%에서 13.3%로 크게 늘었다. 바야흐로 ‘대졸자들의 방송대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통계의 가장 생생한 증거이자, 모범 사례가 바로 일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허인구(66)·배수경(63) 학우 부부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언론사 사장을 역임한 남편, 그리고 이화여대 전산과(현 컴퓨터공학과)를 나와 화가로 활동해 온 아내. 남부러울 것 없는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신입생’ 명찰을 단 이들 부부를 만나, 따로 또 같이 써 내려가는 유쾌한 도전기를 들어보았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늦깎이 신입생으로 함께 시작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부부가 함께 무언가를 한다면 공부를 추천하고 싶다”라는

그들의 말처럼, 방송대는 이제 단순한 학위 취득의 장을 넘어

중장년층의 자아실현을 위한

가장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고 있다.


“여보, 우리 학교 같이 다닐까?”
두 사람의 입학 전 삶은 각자의 분야에서 치열했다. 남편 허인구 학우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방송사에서 일해온 정통 언론인이다. 아내 배수경 학우는 이화여대 전산과를 졸업하고 회화 작가로서 전시 경력을 쌓아왔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즐길 법도 한 시기에, 부부는 왜 다시 험난한 학업의 길을 선택했을까. 시작은 아내 배수경 학우의 지적 호기심이었다.
“작년 말부터 일본 문화에 부쩍 관심이 생겼어요. 드라마나 영화, 여행을 통해 접하다 보니 언어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엔 독학하다가 주민센터 기초반을 갔는데, 일주일에 두 시간으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불현듯 방송대가 떠올랐고, 검색해 보니 ‘일본어학과’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포괄하는 ‘일본학과’가 있더군요. ‘바로 이거다!’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했죠.”
평생 언론인으로 사느라 외부 일정이 많았고, 특히 춘천 등 지방 근무로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던 허인구 학우에게 방송대는 아내와의 거리를 좁힐 절호의 기회였다.
“이제는 안사람과 뭔가를 함께하며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마침 아내가 일본어 공부와 방송대 입학을 결심했기에, 저도 이왕이면 같은 1학년 신입생으로 입학하기로 했죠. 등록 절차부터 교재 구매까지 모든 걸 아내가 챙겨줬습니다.”
오랜동안 조직사회의 틀속에서 일해온 남편과 화실에서 예술가의 삶을 살아온 아내. 궤적이 다른 두 사람이 ‘방송대 동기’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입학 초기인 1학기는 ‘학업’보다 부부 사이의 ‘조율’이 더 큰 과제였다.
가장 큰 난관은 온라인 학습 시스템이었다. 익숙지 않은 남편을 위해 배수경 학우는 매번 시스템 접속부터 과제 제출 방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했고, 이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공부 스타일도 정반대였다. 인문계 출신인 남편과 자연계 출신인 아내는 접근 방식부터 달랐다. 허인구 학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직장 문화가 밴 저는 수직적인 면이 있는데, 아내와 함께 공부하며 그런 ‘물’을 빼는 데 노력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서로 다른 점 때문에 갈등도 있었지만, 함께 공부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게 됐죠. 지금은 웬만한 건 다 극복하고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이 큽니다.”
배수경 학우 또한 “1학기는 둘 사이의 조율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은 가장 좋은 클래스메이트가 됐다”라고 귀띔했다.

과제는 ‘마이 웨이’, 목표는 ‘함께’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공부 방식이다. ‘부부니까 과제도 같이 하겠지?’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배수경 학우는 공부는 각자 스타일대로, 전혀 터치없이 스스로 한다고 말했다.
“과제물 작성할 때요? 각자 따로 하고 상대방 것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제 것만 보기도 벅차서요(웃음). 저는 도움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자기 것은 자기 의지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철저히 ‘마이 웨이’입니다.”
허인구 학우 역시 “어떤 과제인지 기본적인 얘기만 나누고 내용은 완전히 각자 준비한다”면서도, “과제 제출 방법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아내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런 ‘따로 또 같이’ 전략은 성적에서도 빛을 발했다. 지난 1학기, 배수경 학우는 이과 출신이어서 역사 관련 과목을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허인구 학우는 단어를 자꾸 잊어버려서 어학을 공부에 힘이 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성적을 받았다고 활짝 웃었다. 둘 다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은 비밀 아닌 비밀.
배수경·허인구 학우는 “특히 늦은 나이에 공부하다 보면 귀찮거나 나태해지기 쉬운데 때로는 서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때로는 서로를 격려해가며 힘을 얻게 된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두 사람의 ‘환상 케미’가 정점을 찍은 건 지난 ‘총장배 일본학 경시대회’였다. 1학년만 출전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객석에서 학우들의 환호가 터져 나올 만큼 완벽한 조화를 보여줬다. 결과는? 부부가 총장상을 거머쥐었는데, 경시대회 참가는 전적으로 아내 배수경 학우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은 홈페이지 공지 사항을 잘 안 봐요. (웃음) 신입생에게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남편과 함께라면 더 편안할 것 같아 도전했는데 뜻밖의 큰상을 받았지 뭐예요.”
준비 과정은 ‘아내의 기획’과 ‘남편의 수행’으로 이뤄졌다. 배 학우가 대본의 역할을 정하고 각자 암기할 분량을 배분하면, 남편은 군말 없이 따랐다. 목소리가 크고 씩씩한 남편과 조용한 아내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허인구 학우는 “처음엔 아내가 주도하고 제가 따라갔지만, 점차 서로를 보완하며 자연스럽게 리듬이 맞아갔다”며 “부부가 함께하다 보니 갈등보다는 강점이 더 많았다”라고 말했다. 배수경 학우는 이를 두고 “40년 긴 세월 함께한 ‘시간의 힘’ 같다”라고 표현했다.

“학과 더 신설하고, 스터디도 더 지원했으면”
직접 경험해 본 방송대는 어떤 곳일까. 언론계에 몸담고 있었던 허인구 학우는 방송대에 대한 좋은 평판을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입학 후 직접 체험해 보니 그 확신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10~20대부터 은퇴 후 90대까지, 대한민국의 ‘인생 전주기 교육시스템’을 갖춘 곳이 방송대입니다. 막상 입학해 보니 교수진과 교육 체계가 생각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무엇보다 학우들의 열정이 대단합니다. 서로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학내 분위기가 정말 좋아요. 매료될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다.
“부부에게는 같은 목표를 정해놓고 함께 뭔가를 한다는 게 중요하기도 하면서 참 좋은 것 같아요. 누군가 부부가 함께 무얼 하는 게 좋겠냐고 물어온다면 공부를 추천하고 싶어요.”
물론 바라는 점도 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직장인 학우들을 위해 저녁 시간대 스터디 그룹에 대한 학교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교수님들의 대면 특강이나 줌 특강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언론에서 잔뼈가 굵어선지 “졸업한 동문과 재학생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방송대만의 상징적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조언도 놓치지 않았다.
배수경 학우는 인생 후반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학과 개설을 제안했다. “인생 후반을 새로이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예술이나 문화 등 더 다양한 분야의 학과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좀 더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학생이 되어 꿈꾸는 내일
방송대에서의 1년은 이들 부부에게 단순한 지식 습득 그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이제 1학년 과정을 마쳤지만, 배수경 학우는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의 전공인 그림과 문학, 일본학을 접목할 구체적인 길을 모색하겠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어떤 것을 이뤄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공부하면서 능력이 올라가면 하고 싶은 무언가가 분명 생길 거라 믿어요. 방송대 대학원에서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요.”
허인구 학우는 지난 1년 방송대에서 공부해온 것도 모두 아내 덕분이라며 대학원까지도 줄곧 함께하고 싶어 했다.
부부는 함께 낭만적인 계획도 생각하고 있다. 졸업 후에 둘이 함께 일본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을 일주하며 ‘부부 역사문화 탐방’을 떠나는 것이다. “일본어는 아직 더디지만, 수업을 통해 일본 사회 전반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고 있거든요. 졸업하면 아내와 함께 일본 전역을 돌며 마음에 드는 곳에서 ‘몇 달 살기’도 해보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 허인구 학우는 평소 좌우명인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과 함께 중학교 1학년 때 직접 만들었다는 한문 구절을 소개했다. ‘후일심 만사성(後一心 萬事成)’. 뒤늦게라도 한마음이 되면 만사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늦깎이 신입생으로 함께 시작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부부가 함께 무언가를 한다면 공부를 추천하고 싶다”라는 그들의 말처럼, 방송대는 이제 단순한 학위 취득의 장을 넘어 중장년층의 자아실현을 위한 가장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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