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는 세종, 아버지는 문종, 할머니와 어머니는 모두 중전. 날 때부터 원손, 왕세손, 왕세자를 거쳐 12세에 왕위에 오른, 적통 중에서도 적통인 단종 이홍위는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가고,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그를 따르던 충신들은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고 가족들은 노비로 팔려갔다는 죄책감으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이홍위는 엄흥도를 만나며 무력한 왕에서 호랑이 왕으로 변화한다.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에서 이홍위 역을 맡은 박지훈 배우는 단연 2026년 한국 남자 배우의 발견이라 칭할 만하다. 「프로듀스 101」에서 아이돌로 데뷔했지만, 사실 박지훈 배우는 어린 시절부터 여의도에 있는 MTM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를 꿈꿨던 아역 배우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현장을 경험한 배우들은 뭔가 다른 게 있다’는 통설은 박지훈 배우에게 딱 들어맞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왕과 사는 남자」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그렇게 입을 모아 박지훈 배우를 칭찬하기 때문이다. 과연 박지훈 배우는 깊은 눈빛 하나만으로 수백 줄의 대사보다 더 깊은 감정을 전한다. 엄흥도 역을 맡은 유해진 배우는 “박지훈이 아닌 이홍위는 상상이 안 될 정도였다. 정말 많은 감정이 생기게 해 준 배우다. 좋은 배우이자 좋은 친구와 작품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했다”라고 극찬하기도. 작품을 쉬는, 이른바 ‘비수기’에 들어온 「왕과 사는 남자」에 출연하기 위해 샛노랗게 탈색한 머리도 다시 염색하고 15kg을 감량했으며, 선배들의 연기를 현장에서 흡수하듯 연기를 배우고 있다는, 현장의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연기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인정받은,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될 수밖에 없는 박지훈 배우를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장항준 감독님의 삼고초려 끝에 제안을 수락하셨다고요. 세 번이나 고사했다가 참여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비운의 왕 단종이라는, 그 어린 왕을 제 연기력으로 큰 스크린에 감정을 담아 표현해 낼 수 있을지가 첫 번째 걱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유해진 선배님과 붙는 씬이 많은데, 유해진 선배가 내는 에너지와 동등하게 제가 에너지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죠. 마지막 미팅 때 장항준 감독님이 “지훈아, 단종은 너여야만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마치 영화 한 편이 끝난 것처럼 감독님 말씀이 머리에 맴돌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에너지를 못 낼 건 뭐가 있어, 하는 자신감을 가지고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방송에서는 개그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데, 연출자로 만난 장항준 감독은 어떻던가요?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자 거장이시죠. 감독님이 현장에서 어떤 디렉션을 주실지 정말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그런데 배우가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해주시는, 정말 열려있는 감독님이셨어요. 디렉션도 배우가 납득할 수 있게끔 주셔서, 그런 부분에서 거장답다고 느꼈던 거 같아요. 사실 현장에서는 말수가 많지 않으셨어요. 생각보다 카리스마도 있었고요. 방송에서 보는 이미지는 제게는 아니었습니다. 역시 멋있으셨죠.
역사적 인물에 대한 해석이 어려웠을 거 같아요. 본인 만의 단종은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나요?
나약하지만은 않은 단종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궁 안에서 많은 걸 깨우쳤으면서도 유배를 당해 무기력하고 공허했을, 그런 부분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초반에 잡은 디테일은 목소리였습니다. 초반에는 호흡이 많이 섞여 있는 대사들을 내뱉었죠. 점차 범의 눈으로 성장해 나가면서는 조금 더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목소리 내려고 노력했죠. 사실 첫 목표는 체중 감량이었습니다(웃음).
감독님이 얼마나 살을 빼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셨나요?
살을 좀 빼야겠다고 말씀은 하셨는데, 구체적인 수치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제 욕심으로는 ‘말랐다’ 정도가 아니라 ‘뼈밖에 없다’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죠. 두 달 반 준비기간 동안 사과 한 조각 먹으면서 잠도 못 자고 대본만 주구장창 봤습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서 피폐한 삶을 살았죠. 그렇게 해서 15kg 정도를 감량했습니다.
평소 몸무게에서 그렇게 뺀 건가요?
제가 작품이 끝나서 비수기였거든요(웃음). 탈색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신나게 놀던 중이었어요. 그래서 촬영 때 감독님이랑 모든 배우들이 절 보고 놀라셨다고 하더라고요. 감량 후 현장으로 갔더니 감독님도 잘 빼왔다고 하셨고, 선배님들이 제게 집중한 이유 역시, 그런 모습을 보고 안 돼 보였던 거죠. 단종의 그런 느낌을 보여주고 에너지를 배우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감량해야 했습니다. 첫 촬영 날이 한명회(유지태)를 만나는 장면이었어요. 유지태 선배님이 걸어들어오는데 너무 무서워서 못 보겠는 거예요. 감독님께 너무 무섭다고 살짝 말씀드렸더니,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촬영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은 의도한 건 아니고 순간 감정에 몰입하다 보니 저절로 나온 건데요. 체중감량이 돼서 근육의 미세한 떨림도 잘 보인 거 같아요. 후반부에 한명회에게 소리칠 때, 크게 소리를 내야 하는데, 먹은 게 없는 상황에서 지르다 보니, 돌아나갈 때 핑 돌더라고요. 몸이 많이 힘들다는 걸 느낀 씬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먹방’도 의미 있는 장면이었던 거 같아요. 단절됐던 이홍위가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자신감을 찾게 되고, 왕위를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니까요.
사실 몸에 음식이 안 받는 상태까지 가버려서, 현장에서 뭘 먹으면 자꾸 게워 내더라고요.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날이 계속됐죠. 하나 기억나는 건, 다슬기국인데요. 염분이 확 들어오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거예요(웃음).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종은 체념하고 있다가도 마을 사람들과 만나며 다시 행복함을 느낍니다. 감정 균형을 잡기 어렵지 않았나요?
감정의 균형도 균형이지만, 촬영하면서 매일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했어요. 전날 이렇게 찍었으니, 오늘은 이렇게 해 볼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죠. 사실 저는 고민을 많이 하는 스타일 아니고, 현장에서 선배님들 연기를 보면서 흡수하는 편인데요. 점점 선배님들이랑 감정들을 쌓고 맞춰나가다 보니까 결국 후반부에 시너지가 터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연스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영화 후반부에 힘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영화 후반부에서는 그렇게 무서워하던 한명회에게 강하게 맞서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먹지는 못하니까 간간이 젤리, 초콜릿으로 버텼는데요.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이는 건 분장팀 아이디어 덕분이고요. 한명회가 “범의 눈이 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라고 하는 대사 이후에는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역시 적통성을 가진 왕이 맞았다는 걸요.
‘눈빛 연기’가 일품이더군요. 감독님, 배우들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하던데요.
음, 눈빛은 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눈빛 연기 씬 중에서 어떤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으세요?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이죠. 실제로 밤에 촬영했는데, 현장이 너무 고요했어요. 중요한 씬이란 걸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요. 촬영 날 유해진 선배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저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딱 알겠더라고요. 절 보면 터지시겠구나, 싶어서 재빨리 인사만 드리고 나왔죠. 리허설하는데 정말 많이 울었어요. 아들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는 심정이었어요. 제가 연기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유해진 선배님이 들어올 때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장면에서 선배님과 주고받은 강렬한 에너지는, 제가 살면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어요.

유해진 배우가 박지훈 배우를 극찬했던데, 박지훈 배우가 본 선배 유해진은 어떤 배우이던가요?
제가 어찌 감히 존경하는 선배님의 연기를 평가하겠어요. 연기 보면서 너무 감탄했죠. 선배님이 주는 에너지와 호흡에 대해서 매번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두 분의 에너지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현장에서 따로 한 것들이 있을까요?
말씀드렸지만, 저는 계획적으로 다가가거나 잘 보이려고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선배님에게 더 좋아 보였던 거 같아요. 빈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도움이 됐던 거 같고요. 차차 선배님과 강가 산책도 하고, 촬영장 걸어 올라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모르게 감정들이 작품과 함께 쌓여온 거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그렇게 큰 시너지가 난 것 같습니다. 뭔가 계획적으로 만들어간 관계는 아니고요.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이홍위 캐릭터가 더 입체적으로 표현된 거 같습니다. 연기 좀 한다 하는 배우들이 조연으로 많이 출연했는데, 어떠셨어요?
저도 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이홍위는 저 혼자서 만들어가야 하는 캐릭터라, 마을 사람들과 돈독해지는 건 그 이후의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유해진 배우와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갔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거 같아요.
애드리브 잘하는 배우들이 많은데, 박지훈 배우도 애드리브를 했나요?
그 장면에서 사실 저는 대사를 그렇게 많이 하진 않았어요. 시나리오에 보면 ‘마을 사람들이 썰을 푼다’라고 되어 있어서, 뭐라 뭐라 대사를 하면 저는 “그러냐”, “그래” 정도로(웃음).
이홍위는 본인이 하는 선택은 없는 인물이었죠. 그러다 마지막에 아끼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처음 선택을 합니다. 그 씬은 어떻게 준비하셨어요?
사실 어떻게 준비하는 과정은 없었어요. 그냥 전에 찍었던 부분들을 회상하면서, 그 감정을 그대로 이어가려고 노력했죠. 실제로도 너무 아팠어요. 몸이 아팠다기보다는 마음이요. 만약 이 역사가 사실이라면,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일지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렇게 되면서 더 힘들어졌지만요.
이제 배우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연기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엄마 말로는, 어렸을 때 TV 나오는 사람들 보고 “아, 나도 저렇게 될래”라고 말했대요. 그때 여의도에 있던 MTM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연기를 시작한 거죠. 구체적으로 어떤 수업을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졸업하고 아역 배우로 활동하면서 하나 정말 감사하게 지금까지 느끼는 건, 카메라랑 많이 친해졌다는 거예요. 거부감이나 울렁증은 없는 거죠.
2006년 MBC 드라마 「주몽」이 첫 작품으로 나오던데, 올해가 벌써 데뷔 20주년이더라고요(웃음).
주변에서 아역부터 했다고 하니까 오래됐다고 하시는데, 그걸 데뷔작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웃음). 기준이 다 다르겠지만, 저는 주연으로 데뷔한 작품은 2019년 JTBC 드라마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사극이었네요.
그래도 오랜 시간 연기했는데 지칠 때는 없는지, 어떤 생각으로 배우 활동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편이라 지칠 여력이 잘 없는 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계속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는 이유도, 목표 지점이 없기 때문인 거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지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몸이 힘든 시절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배우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혹시 반복해서 보는 영화가 있나요?
「태극기 휘날리며」는 정말 서른 번은 본 거 같아요. 제가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형제의 브로맨스 케미스트리나, 결국 비극을 맞이하는 결말 같은 부분이 계속 남아요. 사실 저도 친형이 있어서 영화에 대입해 보기도 했거든요. 저런 상황에 부닥치면 형도 분명 저렇게 할 텐데, 형은 가고 내가 전장 한복판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직도 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영화죠.
배우로서 성장하는 발판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흡수력이 좀 빠른 편이에요. 현장에 준비해가기보다는 선배들의 연기를 보면서 배움을 얻습니다. 저런 걸 배워야지, 라고 하기보다는, 선배들의 호흡, 발성, 대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거 같아요.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쌓아가는 거 같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 같은 목표는 없어요.
그래도 「약한 영웅 class1」을 하면서는 귀여운 이미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잖아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얻고 싶은 건 없나요?
저는 이미 얻었습니다. 유해진, 유지태, 전미도, 장항준 그리고 스태프들(웃음). 선배님들을 얻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 너무나 만족하고 있고요. 연기로도 정말 많이 얻어가는 거 같아요. 와, 저렇게 하는구나 하면서 다시 한번 존경했던 영화입니다.
선배들을 너무 좋아하면서도 정작 먼저 다가가지는 않는 스타일이라니(웃음). 유해진 배우의 매력은 뭔가요?
이유 없이 끌려요(웃음). 그게 그냥 선배님이신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되게 형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버지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선배님 같기도 해요. 알게 모르게 되게 다가가고 싶은? 제가 그런 성격이 아닌데, 자꾸만 다가가고 싶은 선배님이죠. 유쾌하시고요. 제일 큰 건 개그 코드가 저랑 잘 맞았어요. 선배가 치는 아재개그가 너무 웃겼습니다(웃음).

최근 2년 정도는 연기에 몰입하셨는데요. 이제 가수 활동은 접으신 건가요?
아니요. 가수로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들도 많아서요(웃음). 곧 「프로듀스 101」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찍을 계획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예정입니다. 가수 활동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드린다는 의미가 될 것 같아요.
장항준 감독은 「왕과 사는 남자」를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라고 표현했는데요, 박지훈 배우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는 어떤 의미일까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면 좋겠어요. 사실 그보다도 너무 훌륭하신 선배님들을 얻어가는 작품이라 생각해서 그 이상의 값어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배우 박지훈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지 않은 작품이죠. 그에 대한 감사함이 있는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