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드 스탈과 콩스탕이 생각했던 원칙들을
공유했지만 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달랐고,
개혁의 구체적인 주요 쟁점에
자유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생각도 달랐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반드시 다음의 질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주의(liberalism)는 자유(liberty/freedom)의 이념이며, 특히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정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은 자유주의의 역사 서술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근대적 개인의 자유에 관한 정치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라는 사상의 창시자라고 하면 17세기 영국 철학자 로크(John Locke)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국 지성사가들은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로크를 자유주의의 창시자로 보는 견해를 반박해왔다. 실제 대서양 양측의 영어권 지역에서 미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19세기 내내 로크가 자유주의 철학자나 이데올로그로 평가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로크가 자유주의 이념의 창시자 지위를 얻게 된 것은 18세기가 아닌 20세기 중반, 즉 냉전 초기였다.

왜 ‘잃어버린’ 역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영국으로부터,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온 서구 사상체계의 역사를 서술하는 일은 유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왜 ‘자유주의’ 혹은 ‘리버럴리즘’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초반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쓰인 이후에 점차 영국과 미국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일까? 오히려 반대로 영국에서 처음 사용된 후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된 것은 아닐까? 홉스나 로크, 혹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창안자로 널리 알려진 스미스(Adam Smith), 그리고 미국의 건국자들은 왜 스스로를 ‘리버럴(자유주의자)’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혹은 마찬가지로 이 ‘자유주의 창안자’들에 반대했던 당대인들은 왜 이들을 (마치 현대 미국에서 보수나 급진 진영에서 민주당 진영에 대해서 그렇게 하듯이) ‘리버럴’이라고 비난하지 않았을까? 현대의 우리가 리버럴리즘의 탄생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는 ‘리버럴리즘’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수 세기가 지난 후 유럽 대륙에서 이 말이 왜 유행하게 됐을까? 이미 수백 년간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발전·확립된 철학이 나중에야 적당한 이름을 찾게 된 것일까? 아니면 ‘리버럴리즘’이라는 말의 탄생 이면에 고유한 지적·정치적 사정이 있었을까?
역사학자 로젠블랫(Helena Rosenblatt)은『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2018, 국역본은 2023)를 통해 ‘상식적’ 자유주의 역사서술에 의해 실제 역사가 ‘가려져(lost)’ 있었다는 도발적 문제제기를 했다. 그를 비롯해 기존 자유주의 역사서술에 도전하고 있는 지성사 및 개념사 연구자들은 복원돼야 할 자유주의 역사의 다음과 같은 측면에 공통적으로 주목한다.
첫째, 자유주의는 명백하게 19세기적 현상이며 그 출발점은 유럽에서 ‘리버럴리즘’에 해당하는 각국의 신조어들이 등장한 시기다. 이들 연구자가 ‘리버럴리즘’이라는 당시의 신조어에 집중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는 이 말 자체에는 사실 자유를 뜻하는 ‘리버티’가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초의 라틴어 어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두 용어가 만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리버럴리즘’의 탄생은 ‘리버티’가 아닌 ‘리버럴리티(liberality)’에서 기인한다. ‘리버럴리티’ 혹은 라틴어 ‘리베랄리타스(liberalitas)’는 자유를 뜻하는 ‘리베르타스(libertas)’와 구별되는 별도의 윤리적 의미와 역사를 갖는 용어다. ‘관후함’으로 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너그럽고 관용적인 성품 혹은 덕성을 지칭해왔다. 인문학(liberal arts)이나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 등과 같은 용어 또한 모두 이러한 덕성을 갖추기 위한 학문 혹은 교육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둘째, 자유주의를 19세기 현상으로 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유주의가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파’를 의미하는 ‘리버럴’과 그 신조(信條)를 의미하는 ‘리버럴리즘’은 모두 프랑스혁명의 계몽·진보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전쟁의 폭력에 맞서려 했던 지식인과 정치인 당파, 그리고 그들의 이념을 부르는 명칭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명칭의 최초 탄생지 중 하나는 바로 1812년 에스파냐였다. 나폴레옹군의 침공을 피해 남부 항구도시 카디스에서 농성 중이었던 에스파냐 의회는 이때 유럽 최초의 자유주의 성문헌법인「에스파냐 왕국 헌법」을 공표하게 된다. 그런데 이 헌법의 제정과정에서 의회는 개혁적인 입헌군주제파와 보수적인 왕당파로 나뉘었다. 이때 개혁파는 자신들을 (‘자유파’보다는 ‘개명파’ 정도가 적당한) ‘리베랄레스(liberales)’라 칭하고, 왕당파를 (‘굴종파’라는 의미에서) ‘세르빌레스(serviles)’라고 불렀다. 그리고 ‘리베랄레스’의 신조라는 의미의 ‘리베랄리스모(liberalismo)’라는 단어도 이때부터 사용됐다.

자유주의는 혁명의 탄생지 프랑스에서도 혁명의 계몽·개혁정신을 계승하지만 공포정치와 나폴레옹의 권위주의 통치와 같은 혁명의 자기파괴 행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지식인과 정치인 서클로부터 탄생했다. 프랑스 최초의 자유주의자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제르맨 드 스탈(Germaine de Staël)과 그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뱅자맹 콩스탕(Benjamin Constant)이다. 두 사람은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자신들의 신조가 바로 ‘리베랄 원칙(les principe libéraux)’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들이 생각한 자유주의란 개인의 보편적 자유가 사회의 도덕적·물질적 진보와 선순환을 이룬다는 원칙을 전제한다. 하지만 동시에 정치가 민주주의(당시 식자층 절대다수가 부정적으로 본 정부형태)와 권위주의 두 극단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원리를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시 자유주의 저술가들에게 개인의 보편적 자유란 17~18세기 사회계약론자들이 생각했던 자연권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연권과 왕권신수설은 모두 혁명 이전 시대의 관념적·종교적 잔재로 혁명의 정치적 실패에 주된 책임이 있었다.
하나가 아닌 다수의 자유주의‘들’
셋째, 자유주의의 역사는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자유주의 전통의 역사가 아니라 다수의 자유주의‘들’(liberalisms)의 역사다.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드 스탈과 콩스탕이 생각했던 원칙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콩스탕은 19세기 초중반 가장 널리 읽힌『정치개혁론』의 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각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달랐고, 개혁의 구체적인 주요 쟁점들에 자유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각자의 생각도 달랐다. 당시에 보통선거란 남성보통선거를 의미했지만, 그러한 제한된 범위 안에서도 참정권을 확대할 것인가, 혹은 확대한다면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합의는 없었다. 또한 각국의 정치상황에 따라서 기존 왕정을 개혁하기 위해 봉기를 해야 할지, 혹은 타협을 해야 할지, 그리고 의회제 개혁 이후에도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을지, 왕당파 보수주의자들과 협력할지에 대해서도 통일된 자유주의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이라는 전유럽적 사건에 대한 대응과 성찰의 결과로 공통의 원칙을 도출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각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이 원칙에 따른 개혁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에서 분열과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내린 선택을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정당화해야만 했다. 단적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 지식인들과의 협력이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원칙을 해석한 반면에,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의 독일 내 영향력을 공세적으로 축소시키려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지지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 정당화했다.
1848년 혁명으로 무너진 7월 왕정 시기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 참여를 둘러싼 내부적 분열을 겪는다. 당시 프랑스 자유주의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기조(François Guizot)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동일한 자유주의 원칙을 공유했지만, 정부 참여와 정책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7월 왕정에 적극 참여한 기조는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에, 자유주의 야당에 남은 토크빌은 남성 노동자에게로 참정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대인들은 국가 개입이 없는 자유시장경제 정책을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혹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 부른다. 국제정치에서 자유주의는 국가 간의 관계를 국익과 국력의 제로섬 게임이 아닌 보편적 가치와 협력의 시각에서 보는 전통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는 19세기 자유주의의 현실에 그대로 투영될 수 없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이 쟁점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쟁들로부터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수많은 ‘~적 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