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에 대한 ‘예방적 통제’라는
위험 관리 패러다임은
인류의 생명 연장에 공헌했지만,
역설적으로 현대인을
건강과 질병 사이의 불안정한
경계선 위에서 평생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감시해야 하는
지속적인 경계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오늘날 우리의 몸은 더 이상 통증과 쇠약만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혈당, 콜레스테롤, 체질량지수, 갑상선 수치, 당화혈색소와 같은 숫자들이 몸의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권위 있는 언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현대 의학은 이런 수치들의 측정을 바탕으로 질병의 조기 발견과 장기적 예후 관리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숫자의 시대’는 몸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몸은 단지 아프고 낫는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측되고 비교되며 조정돼야 하는 대상으로 재구성됐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의학적 진보의 결과라기보다, 질병이란 무엇이며, 정상과 비정상은 어디서 구분되는지, 또 인간은 자신의 몸을 어떤 언어로 이해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인식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동물의 합성 능력 발견
19세기 전반, 생물학계에서는 식물은 무기물로부터 복잡한 화학 구조의 당을 합성하는 ‘창조적’ 장치인 반면, 동물은 섭취한 영양분을 분해하고 연소시키기만 하는 ‘파괴적’ 장치라는 이분법적 이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는 동물의 간이 스스로 당을 합성해 혈액으로 공급한다는 글리코겐(glycogen) 생성 기능을 밝혀냈다. 동물 역시 고도의 합성 능력을 갖춘 ‘능동적’ 존재임이 입증된 것이다. 이 발견의 의의는 대사 과정의 규명에 그치지 않는다. 베르나르는 간에 담즙을 ‘외부’로 분비하는 기능(외분비) 외에도, 생성된 당을 혈액이라는 ‘내부’로 방출하는 또 다른 기능이 있음에 주목했고, 이런 문제의식은 훗날 ‘내분비(sécrétion interne)’ 개념으로 정식화될 인식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후 내분비 개념은 브라운-세카르(Charles-Édouard Brown-Séquard)의 다소 논쟁적인 장기 요법(organotherapy) 실험 등을 거치며 해부학적 구조보다는 화학 작용과 원격 조절이라는 발상으로 점차 확장됐다. 1889년 민코프스키(Oskar Minkowski)와 메링(Joseph von Mering)이 췌장을 제거한 개에게서 당뇨병이 유발됨을 증명한 것도, 베일리스(William Maddock Bayliss)와 스탈링(Ernest Henry Starling)의 세크레틴(secretin) 연구를 바탕으로 1905년 ‘호르몬(hormone)’이라는 용어가 제시된 것도, 또 1921년 밴팅(Frederick Grant Banting), 베스트(Charles Best), 매클라우드(John James Rickard Macleod), 콜립(James Bertram Collip)으로 이어지는 연구진의 작업을 통해 인슐린(insulin)이 치료의 지평을 열게 된 역사적 성과도 모두 이 ‘내분비’라는 거대한 인식론적 지평 위에서 싹튼 것이다. 내분비계의 발견은 월터 캐넌(Walter Bradford Cannon)에 이르러 ‘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메커니즘으로 만개한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의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정교한 내부 분비망을 통해 스스로 ‘내부 환경(milieu intérieur)’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독립적 주체로 격상됐다.
내분비학과 새로운 패러다임
이와 더불어 의학의 언어도 달라졌다. 몸은 신경만이 아니라 화학적 신호를 통해서도 조정되는 존재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의학이 주로 눈에 보이는 구조와 병변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전달과 조절, 연결과 피드백(feedback)이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됐다. 이 변화는 ‘내분비학’이라는 한 분과의 성립을 넘어 근대 의학 전체의 인식론을 바꿔놓았다. 몸의 진실은 해부대 위의 형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오가는 신호와 대사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이 유지하는 평형 속에 있다는 이해가 자리 잡은 것이다.
당뇨는 이런 전환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질환이다. 근대 초기까지 이 질환은 무엇보다도 갈증, 소모, 다뇨, 쇠약처럼 환자가 몸으로 겪는 증상을 중심으로 이해됐다. 동아시아의 ‘소갈(消渴)’ 개념이든, 서양 의학에서의 초기 ‘당뇨(diabetes)’ 개념이든, 병의 실체는 우선 고통의 경험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17세기 이후 환자 오줌의 ‘단맛’이 중요하게 인식됐고(diabetes mellitus),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단맛의 실체가 당, 더 정확히는 포도당이라는 사실이 규명됐다. 질병은 더 이상 다뇨나 쇠약 자체가 아니라, 특정 물질의 이상이라는 관점에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진단의 중심은 환자의 호소에서 실험실의 판독으로 이동했다. 이제 질병은 얼마나 괴로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얼마나 측정되는가의 문제로 바뀌었다. 당뇨가 특정 기관과 대사 경로의 이상으로 설명됨에 따라 치료의 표적도 훨씬 정교해졌다. 이는 분명히 의학의 진보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의 의미를 환자의 체감보다 계측 가능한 수치 속에서 찾게 됐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만성질환이 자각 증상보다 먼저 검사표 위에서 발견되는 현실은 바로 이런 역사적 재편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현대 의학과 진정한 치유의 간극
과거 제1형 당뇨병은 발병 후 단기간에 환자를 극심한 영양실조와 혼수상태로 몰아넣어 결국 사망케 하는 불치병이었다. 그러나 인슐린의 도입으로 질병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에서 평생에 걸쳐 통제해야 하는 ‘관리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생존의 기적은 환자에게 새로운 차원의 무거운 의무를 지웠다. 췌장 베타세포의 내분비 체계가 작동하지 않으므로 외부로부터 호르몬을 주입해 항상성을 조절해야만 했다. 매일 주사기를 들고 자신의 혈당치와 섭취할 열량을 계산하는 ‘의료적 주체’가 됨으로써 환자의 일상은 철저히 의료화됐다.
이런 전환은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과거 ‘소갈’은 체내의 열이 진액을 말려버리는 전신적 불균형 현상으로 해석됐고, 치료는 갈증이라는 주관적 고통을 덜어주는 데 집중됐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20세기 전반 근대 의학의 유입과 더불어 ‘소갈’은 점차 혈당과 요당으로 판정되는 ‘당뇨’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치료의 목표는 혈액과 소변의 당분을 없애기 위한 엄격한 영양 관리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환자들 역시 자신의 병을 몸의 ‘괴로움’이 아닌 ‘포도당의 농도’라는 객관적 척도로 재인식하도록 훈련받았다.
수치 중심의 의학은 20세기 후반 진단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결합해 더욱 정밀해졌다. 이제 현대 의학은 환자가 쇠약감이나 갈증을 느끼기 전, 즉 병적 변화가 미세하게 시작되는 분자적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개입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공복혈당장애’ 같은 미세한 수치적 기준에 따라 예비 환자로 분류된다. 질병의 정의가 ‘현재 체감하는 고통’에서 ‘미래에 발생할 위험’으로 이동한 것이다. 질병은 보이지 않는 위험 인자로 추상화됐고, 의료의 최우선 과제는 그 수치를 정상 범위로 억제하는 ‘예방적 통제’가 됐다. 이 위험 관리 패러다임은 인류의 생명 연장에 공헌했지만, 역설적으로 현대인을 건강과 질병 사이의 불안정한 경계선 위에서 평생 자신의 신체 데이터를 감시해야 하는 지속적인 경계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최근 스마트폰과 연동되는 연속혈당측정기(CGM: continuous glucose monitoring) 등 웨어러블 기기의 보급은 몸의 데이터화를 일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편입시켰다. 피부에 부착된 센서는 5분 단위로 혈당을 측정해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한때 실험실의 전문 지식에 속하던 내부 환경의 변화가 이제는 개인의 일상 속 디지털 데이터로 상시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이 허기지다고 느끼는 주관적 감각보다 화면의 데이터를 더 신뢰하게 된다. 몸이 보내는 직관적 느낌은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되며 기계가 측정한 수치만이 우월한 권위를 부여받는다. 기계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서는 ‘내 몸’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 타자화를 겪는 것이다.
근대 의학이 항상성 기전을 밝혀내고 이를 수치로 환산해 질병을 통제하게 된 것은 분명한 성취다. 지표화된 의학의 언어는 질병을 객관화하고 보편적 치료법을 개발해 무수한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숫자라도 살아 숨 쉬는 몸의 생생한 체감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 당화혈색소가 똑같이 7.0%라도 두 환자가 매일 견뎌내는 피로감, 바늘에 대한 거부감, 합병증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질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질병은 대사 이상인 동시에 한 인간의 고유한 삶이 훼손되고 재구성되는 실존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 의학이 마주한 과제는 객관적 측정치의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면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경험을 다시 치유의 언어 속으로 복원하는 일이다. 질병이 파편화된 수치로 해체됐다가 진료실에서 환자의 고유한 삶의 서사와 조화롭게 결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숫자에 대한 맹신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치유’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숫자는 치료의 방향을 가리키지만, 치료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환자가 살아내는 시간의 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