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시네마   「맨 끝줄 소년」에서 열패감 가득한 20년차 교수 연기한 최민식 배우

“12개 문단에 문장은 167개, 뭐라도 촘촘히 채워놨으니까 글이다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종이에는 문장이 없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어. 그저 온갖 상투적 표현에 싸구려 감상 그리고 남들의 문장을 그저 베껴다가 오려 붙여 넣은 거에 불과해. 자기가 뭘 쓰는지도 모르면서 줄줄이 뱉어놓은 거에 ‘쓰레기’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나한테 얘기를 해봐.” 생성형 인공지능(AI)의 광풍이 휩쓰는 대학가에서 여전히 출석부를 고집하고, 학생들 글쓰기 과제에 빨간펜을 죽죽 그으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허문오’ 교수(최민식)는 20년 전 출간한 단 한 편의 소설 이후 새로운 글을 쓰지 못하는 실패한 작가다. 그러던 그의 눈에 들어온 학생 ‘이강’. 늘 강의실 맨 끝줄에 앉는 그의 글에서 섬뜩한 재능을 발견한 허문오는 제자를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에 비밀스러운 개인 문학 수업을 제안한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심해 보이는 이강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수업이 진행될수록 허문오는 이강의 글에 더 집착하게 되는데…. 명불허전의 대배우 최민식이 「맨 끝줄 소년」(연출 김규태, 극본 장명우, 넷플릭스)에서 열패감에 사로잡힌, 괴팍하고 지질한 국문학과 교수 허문오 역으로 완벽하게 분했다. 스페인 원작 희곡에서 문학적인 부분을 덜어내고 한국식 서스펜스를 넣은 각색 시나리오를 단숨에 읽고 바로 출연을 확정 지었다. “욕망에 집착한 나약한 인간을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처럼 발가벗겨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최민식 배우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출연 이유로 “문학적인 작품이어서”라고 했는데, 반응들은 좀 살펴보셨나요?
처음엔 기대를 안 했어요. 여름에 공개하는 작품인데 「참교육」이나 「김부장」 같은 시원하게 나쁜 놈들 응징하는 거라 여름에 보기 좋잖아요. 그런데 「맨 끝줄 소년」은 어두운 구석이 많고, 불편하니 관객들이 좋아하실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힘이 분명 있었어요. 불편한 진실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민낯이랄까, 굴절된 욕망이 어디까지 부서지는가 하는. 또,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글을 통한 폭력이 혼재돼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도 있고, 여러 가지 생각할 지점이 많았던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 첫인상은 어땠나요?
김규태 감독이랑 장명우 작가가 각색을 아주 잘한 거 같더라고요. 「맨 끝줄 소년」 배경이 대학이라 저희끼리는 김규태 감독님을 총장님이라고 불렀는데요(웃음). 한 번에 시나리오를 다 읽고, 바로 오케이했습니다. 아주 흥분된 상태로 총장님이랑 작가를 바로 만났죠, 시청자가 좋아할지는 이차적인 문제였어요. 내가 너무 좋았으니까요.

원작이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이죠.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인 더 하우스」(2012)를 찍기도 했고요.
연극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일부러 다 안 읽고, 안 봤어요. 보면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전해 듣기로는 원작이 좀 더 문학적 색채가 짙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창작자의 창작 윤리와 관음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한국적 서스펜스라고 할까요? 인과에 관한 이야기가 추가된 거죠. 구업이라고 하죠? 말로 짓는 죄와 그로 인한 결과들인 겁니다. 나약하고, 욕망덩어리이고, 정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구조를 가진 한 인간이, 자신이 예전에 했는지 기억조차도 못 하는 말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 우리의 각색 포인트죠. 저는 거기에 동의했어요. 마냥 처음부터 끝까지 예술은 어떻고, 창작자의 윤리의식은 이렇고 하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졌겠죠(웃음).

 

참으로 ‘지질한’ 캐릭터인 허문오에는 어떻게 접근하셨어요?
정육점 고깃덩어리 같이 아예 발가벗겨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 차이는 잘 모르지겠지만, 일반 상식에는 반하는 걸 비정상이라고 하면요, 지식인이라면서요? 작가라면서요? 그런 것들이 배움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물론 배운 사람들이 세상을 리드하지만, 인격이 완성되지 않은 배운 사람들이 세상을 망치는 걸 우리는 많이 봤잖아요. 열패감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민낯을 발가벗겨 걸어두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이강은 누구냐(웃음)!

이강 역 배우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사흘 동안 하셨다고요.
그 나이 또래 배우들을 많이 봤어요. 최현욱 배우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말귀를 잘 알아들어요. 감독 디렉션에 잘 따르고, 작품 이해력도 뛰어났어요. 배우는 몸으로 표현이 안 되면 말짱 꽝인데, 표현까지 제대로 하면서 또 과감해야 할 부분에서는 주저함이 없으니까 준비를 많이 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대견했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나이 많은 배우 중에도 정신 500년 나간 친구들도 많거든요. 자기 역할에 대해 뭘 표현해야할지 정확히 인식하고, 목표가 뚜렷하면서 그걸 체화해서 몸으로 보여주는 게 능력입니다. 배우가 할 일이고요. 보셔서 아시잖아요. 너무 잘했어요. 저는 현욱이의 연기에 리시브만 잘하면 되겠구나, 이강이 깔아놓은 판에 잘 휘둘리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제목을 ‘맨 끝줄 소녀’로 하면 어땠을까?” 하는 농담도 하면서 친해졌어요(웃음). 인상적이었고 참 고마웠어요. 드라마의 한 축을 잡아주면서 자기 몫의 200%를 해냈잖아요. 선후배를 떠나서 카메라 앞에 서는 같은 동료 배우로서 얼마나 든든해요. 진짜 ‘맨 끝줄 소년’이 됐으니까요.

 

시험지 훔치고 교정 뛰어가는 장면에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정말 웃기더라고요(웃음).
점프, 장난 아니었죠(웃음). 거기 대구예요. 계명대에서 찍었는데, 정말 더웠어요. NG내지 말자, 세 테이크 넘어가면 ‘땡칠이’ 되어서 못 한다, 라는 심정으로 찍었습니다. 그래도 왕년에 뜀박질을 좀 해서, 두 번째 테이크에서 오케이 났어요. 사실 허문오가 이 드라마에서는 부정적 요소가 더 많잖아요. 어떻게 교수, 작가라는 사람이 저래? 하는. 인간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요. 그런데 악한 놈은 또 아니잖아요. 좋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는, 어찌 보면 예술가적인 면도 다분한 사람인데, 열패감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6부작을 끌고 가기에는 좀 어렵다고 봐서 총장님과 ‘약간 블랙코미디적 변화를 주자’고 상의했어요. 깔깔깔 재밌는 게 아니라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들이죠. 그런 것 중 하나가 시험지 빼돌렸다고 좋아하는 장면인데요. 나중에 부인에게 ‘뒤지게’ 혼나면서도 “근데 짜릿했어”라고 하잖아요. 애 같은 면도 있으면서, 교수로서 윤리의식은 온데간데없는 겁니다. 그저 일탈에 대한 해방감? 그거 하나만 봐도 허문오가 얼마나 취약한 인간인지 알 수 있죠. 그러니 이강이라는 한 청년에게도 쉽게 무너지는 거고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지 빼달라고 할 때 나가라고 해야죠. 근데 자기가 읽고 싶으니까 하잖아. 그러니까 ‘또라이’고요.

평생의 라이벌 김수훈 작가로 출연한 허준호 배우와의 투샷이 정말 인상적이더라고요.
우리는 척하면 착이죠, 뭐. 군대 후배기도 합니다. 의정부 306보충대에서 우리가 뽑았거든요(웃음). 처음엔 한동안 얼굴을 봤어요. 「천문」 이후 만난 건데 “이제 너도 많이 늙었다”이러면서요(웃음). 그래도 이 동네에서 얼쩡대니까 또 만나네? 이런 느낌이었죠. 준호랑은 딱히 뭐, 이제 알죠. 대충 리허설할 때 보면, 아, 그래? 오케이. 그렇게 스윽 하고 대사나 몸짓들이 어울리게 되는 거죠.

 

첫사랑 안은주 역을 김윤진 배우가 맡았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참 신기하게도 엊그저께 만난 사람들 같아요. 이 계통 사람들이라 그런 거 같아요. 사적인 이야기인데, 일 마치고 대리운전으로 집에 가는데, 기사님이 “잘 보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하고 말았는데, 신호에 걸린 상황에서 “저는 최민식 씨를 잘 압니다. 〇〇초등학교 나오셨죠? 민식아, 나 △△야”라길래 깜짝 놀라 보니, 단박에 그때 얼굴이 생각나더라고요.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진짜 친했거든요. 몇십년 만에 만난 거죠. “야, 우리 손주가 너랑 친구란 거 안 믿어”라길래 셀카도 찍고요. 그 친구랑은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꼈는데, 준호, 윤진이는 뭐 한 달 전에 본 것 같은 그런 묘한 기분이 있습니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 자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건가요(웃음)?
그럼요(웃음). 여자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인생을 살면서 꽂히는 사람이 있잫아요. 그런데 그게 오랜 잔영이 남는 사람이 있죠. 있을 수 있죠. 그런데 「맨 끝줄 소년」에서 허문오가 바라보는 은주에 대한 감정은, 김수훈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거 같아요. 만약 은주가 허문오에게 트라우마를 주지 않은 다른 괜찮은 사람의 부인이 됐다면, 행복을 빌어줄 수 있었겠죠. 근데 왜 하필이면 김수훈의 와이프가 된 거냐는 거죠. 그래서 현재 허문오의 마음은 사랑은 아니라 질투겠죠. ‘다른 놈도 아니고 김수훈이 내 여자까지 빼앗아 갔어’라고요. 은주가 자기 여자라고 확신하는 것부터 착각이잖아요. 얼마나 큰 피해망상인가요.

 

아내 조현숙 역을 맡은 진경 배우와 호흡은 어땠나요?
좋았어요. 처음에는 ‘차도녀’ 같을 줄 알았어요. 약간 깐깐한 선생님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살짝 경계했는데, 족보 캐보니 학교 후배더라고요(웃음). 세상에 그런 푼수 없듯이 대해줘서 고맙죠.

12년 동안 각방을 쓰다가 이강의 등장으로 합방하고, 이후 또 무시하기도 해요.
사랑했겠죠. 부부 관계는 말하자면 복잡해요. 습관처럼 살 바에 그냥 이혼하든가(웃음)! 근데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떠난다니 가지 말라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거 연기하면서도 이야, 허문오 너는 진짜 안 되겠다 하면서 연기를 하긴 했지만(웃음). 옛사랑에 집착하면서 김수훈에 대한 질투 때문에 그렇게 연연하잖아요. 그렇게 현재의 사랑에 대해 그렇게 방기하고, 무책임하다가 막상 깨지려고 하니 안달복달하고 불안해해요. 이 모든 장치가 허문오의 서사와 캐릭터를 그려나가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거죠. 그러나, 그걸 연기하는 제 입장은 어땠겠습니까? 내 진짜 허문오 옆에 있었으면, ‘너 일로 와봐’, 소주 한잔 주면서 ‘너 도대체 왜 그랬냐’ 하고 묻고 싶었다니까요(웃음). 많은 사람이 혐오하고 손가락질하는 캐릭터지만, 제가 몇 개월 그런 캐릭터로 살아 보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연민이 가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죠. 심성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어. ‘정신 차려라’고 말해주면서요.

 

간혹 연기에서 연극적 톤도 보이더라고요.
연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진짜 받았어요. 오랜만에 그런 느낌 받아서 좋았고요.

혹시 애드리브를 넣은 장면이 있었나요?
대본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글 자체가 콩나물 대가리, 그러니까 음표라고 생각했고, 저는 이 음표에 맞게끔 정확하게 연주하면 당연히 텐션이 유지되고, 빌드업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각색하거나 설정을 넣은 건 없어요. 빌드업시키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노력한 것도 없고요. 다른 때도 그랬지만, 이번만큼은 대본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텍스트 자체가 워낙 탄탄했으니까요. 한국식으로 원작에서보다 허문오의 추가된 서사나 라이벌 김수훈 그리고 첫사랑 은주와의 관계, 그걸 이용하는 이강으로 추가한 각색 의도도 명확했으니, 동기부여가 된 거죠.

 

특별히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면요.
허문오가 하도 지질해 가지고(웃음). 제 대사보다 김수훈 작가 대사가 오래 마음에 남았어요. “쓸 이야기가 없으면 안 써도 되지 않아? 그렇게 살아도 괜찮잖아”라는. 장명우 작가 다시 봤습니다.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 대사가 시사하는 바가 참 큰 거 같아요. 허문오가 김수훈에게 어설프게 다시 돌려주려다가 더 크게 얻어맞죠. 그 씬에서 준호가 너무 잘했고요.

시청자 반응 중에 “으악! 멈춰!”라는 말들이 많이 보이던데, 허문오는 끝끝내 왜 멈추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처음에 분명한 건 이강의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다는 거예요. 기존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는 다 허접했는데 이놈은 좀 달랐다는 거죠. 관음을 해? 그것도 친구를 가장해서 그 집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나름대로 캐치한 감정, 서사를 쓰는 모양새가 학생이 썼다고 볼 수 없었기에 궁금했던 거죠. 그러면서 문학 수업을 해서 선생으로서 가르쳐주는 것도 있었겠지만, 즐기고 싶었겠죠? 이강의 은밀한 관음적 행태 자체와 글을요. 그렇게 끌려서 즐기고 싶었던 마음이 분명 잇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작가적 양심과 교수로서의 양심으로 “관음하지 마라, 관찰만 하라고 그랬잖아. 작가는 그러면 안 된다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름 윤리의식을 가지고. 선 넘지 말라고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김수훈의 존재를 알고 난 뒤부터는 뚜껑이 날라겐 게 아닌가 싶어요. 도덕의식 같은 건 온데간데 없고, 일단 잠들어 잇던 복수심과 질투, 열패감이 한꺼번에 뒤섞인 거죠. 거기에 첫사랑까지. 넌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이야, 이강에게 받은 글이 다 너였어, 를 확인하는 순간 완전히 대환장 파티로 가는 거죠.

엔딩 장면에서 최현욱 배우가 “한 인간이 무너진 모습을 바스트샷 하나로 표현했다”라고 극찬하더라고요.
현욱이가요? 아이 고놈 참(웃음). 허문오는 이강이 다시 눈앞에 나타날 걸 꿈에도 몰랐을 거란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든 관객을 설득시켜야 하니, 배우 입장에서 그럴 때가 참 죽을 맛이에요.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 돼요. 어떻게 그렇게 무너져서 나왔냐고 질문하면, 이렇게 해서 무너뜨렸습니다, 라는 대답은 못하죠. 그렇지만 그게 배우로 제가 해야 할 일인 거죠. 훅, 하고 한번에 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 설정한 게 있습니다. 와이프가 떠나갔고, 대외적으로는 ‘쓰레기’가 되는 모진 일을 겪은 거잖아요. 그래서 심각하게 뭘 표현하기보다 뭔가 몰두해서 끄적이긴 하는데, 마른 멸치 먹으면서 하는 거죠. 그래서 소품팀한테 “참치캔이랑 소주 없니?” 하고 물어봤더니 “여기서 맥주 드시게요?” 하는 겁니다(웃음). 근데 총장님은 딱! 통한 거죠.

 

말씀하신 「참교육」, 「김부장」 같은 작품과는 복수의 결이 달라요. 오히려 「올드보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시나리오 보며 연기하면서도 솔직히 「올드보이」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보니 비슷한 면이 있네요. 그때도 그놈의 세 치 혓바닥을 잘못 놀려서 그 설레발을 쳤는데, 이번에도 뻐꾸기 잘못 날려서 애한테 인수분해가 되는 거잖아요(웃음). 그런 평들을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40년 넘게 현역 배우로 활발하게 연기하고 계시는데, 혹시 달라진 부분이 있을까요?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아요. 그런데 욕망은 더 끓는 거 같아요. 허문오처럼요. 좋은 작품 하고 싶은 욕망인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조금 알 거 같아요.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더 좋은 이야기로 더 많은 작품을 하면 좋겠어요.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고요.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배우님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사람에 대한 탐구가 있는 이야기는 다 좋아요. 그렇다고 해서, 오락적인 기능이 다분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좀 더 다양하게 하고 싶다는 거죠.

연기도 열심이신데, 홍보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시더라고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거든요. 「파묘」 때 너무 고마웠어요. 코로나19가 지나고 극장에 관객이 꽉 찬 모습을 봤는데, 눈이 돌아가더라고요. 극장 다 망했다, 했는데, 너무 감사한 거죠. 그런데 문화가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면 박수 쳤는데, 이제는 관객들이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와요. 배우들이랑 사진도 찍고요. 아니, 극장에 사람들이 온다면야, 그 사진 못 찍겠어요? 어떤 사명 의식이 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 모습이 너무 고마웠던 거고, 사진 찍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후배들한테 욕을 많이 먹긴 했습니다. “형이 그렇게 하면 우린 너무 어렵다”고 하길래 “야, 인마, 넌 그게 어렵냐?”라고(웃음). 의도한 건 아니고, 기분이 너무 좋았을 뿐인데, 어느 순간 그렇게 돼버렸네요(웃음).

2년 전 「파묘」 인터뷰에서 “멜로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마음은 여전하세요?
젊은 친구들의 낯 간지러운 연애 이야기라기보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이 해석하는 사랑, 용기 없음, 그런 이야기요. 예를 들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외국에서 중년의 사랑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굉장히 감동적이거든요. 불륜이나 도덕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사랑의 감정이란 게 과연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 좀 더 파고 들어가 보고 싶어요. 거 마지막에 비가 막 내리는데, 차 문고리에 손잡는 그 장면, 너무 가슴 아프잖아요. 메릴 스트립이 박차고 나가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차에 탈 때, 박수쳐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감당해야 할 어마어마한 미래가 있잖아요. 남편, 자식은 또 무슨 죄고요. 그런데 그걸 하는 거잖아요. 그걸 저런 불륜드라마!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그런 근본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하나 해보고 싶은 건 있어요. 우리나라 단편소설을 각색해서 재해석하는 작업이요. 이번에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 「맨 끝줄 소년」을 한국식 드라마로 하면서 느낀 건데요, 고전을 되돌아보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겠다 싶었어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라는 희곡을 우리 시각에서 해석해 보자는 거죠. 원작 배경은 술, 재즈, 마약으로 점철된 미국 뉴올리언스인데,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6·25전쟁 이후 혼돈의 시대에 동두천 미군기지에서 블랑쉬 뒤부아가 있고, 거기 바에 스탠딩 마이크로 스텔라를 만나러 오는 동생 이렇게 우리 한국적 실정에 맞게 원작을 각색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투자가, 안 되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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