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드라마와 교육 현실

우리가 이 드라마를 통해 고민해야 할 것은
체벌의 찬반이 아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교육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민주사회 안에서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어느 날 졸업한 제자가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메시지를 열어 보니 뜻밖에도 드라마 「참교육」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작중 ‘나화진’ 선생님의 이름을 보고 문득 이름이 비슷한 ‘나세진’ 선생님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 메시지 덕분에 나 역시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며 몰입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런데 몇 편을 보고 나니, 제자의 연락이 단순한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드라마 속 질문들이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할까?
드라마 「참교육」을 한 편씩 시청할 때마다 안타까웠던 점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이 학교를 장악하고 한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야기, 친구들을 마약에 중독시켜 이익을 얻거나 도박에 빠뜨리는 이야기, 약한 친구를 착취하는 이야기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자신이 얻는 유·무형의 이익에 밀려나 있었다. 학생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억울함과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외면하는 태도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졌을까. 나는 답을 드라마 속에서 찾아보았다. 성취 지상주의, 왜곡된 경쟁, SNS가 만든 익명성,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진 교육 현장이 그것이다. 먼저 성취 지상주의를 살펴보자.
드라마에서는 아이의 행복보다 의대 진학을 우선하는 부모의 모습이 등장한다. 의대 진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이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상황에서도 자녀를 책상 앞으로 밀어붙이는 태도다. 아이는 어른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 아이의 고통을 먼저 살피기보다 목표를 앞세우는 어른의 모습은, 사람보다 목표를 앞세우는 삶의 태도를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다. 공감은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목표가 대화를 대신하는 순간, 아이는 타인의 고통에도 점차 무감각해질 수 있다.
성취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사회는 경쟁의 의미마저 바꿔 놓는다. 경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선의의 경쟁은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이 사람보다 결과를 우선하는 풍토와 결합할 때, 타인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일, 때로는 나에게 유리한 일이 된다. 친구가 시험을 망치거나 결석하는 일이 안타까움의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때, 경쟁은 성장이 아니라 공감의 파괴자가 된다.
스마트폰으로 빚어지는 익명성도 중요한 요인이다. 예전에는 상대방의 표정이나 목소리, 눈을 보며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지금은 댓글 하나, 채팅방에서의 한마디, SNS 게시물 하나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내가 던진 말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즉각 느끼기 어려워졌다. 스마트폰 세상에서는 화면만 닫으면 끝이다. 상대방의 표정도, 눈물도, 침묵도 보이지 않는다. 고통은 추상화되고, 가해자는 ‘장난이었다, 재미로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네 행동은 잘못됐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멈추고 바로 잡아보자’라고 말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진 교육 현장에서 더욱 깊어진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만이 아니다. 무엇이 그른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부끄러움을 깨닫는 과정도 교육에 포함된다. 교사가 그것을 가르치는 일조차 두려워하는 구조 속에서 공감의 결핍은 더욱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

교사들은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가
지난해에 『착한 교사 포기하기』를 쓰는 내내 필자가 가장 많이 목소리를 낸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다른 에피소드에는 극적인 과장이 느껴졌지만, 5화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드라마로 옮겨 놓은 듯했다. 재미있게 보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던 이유는,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아플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도 있다. 평소 친구들을 괴롭히던 한 학생이 결국 친구를 폭행했고, 담임 교사는 보호자에게 상황을 알리며 피해 학생 측이 대화를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보호자는 자신의 아이만 탓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고, 오히려 피해 학생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드라마 속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제지하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 무조건 우리 아이 편을 들어 달라는 요구,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 근거 없는 아동학대 신고, 허락 없이  교실에 들어오는 일, 감정적 대응 끝에 이어지는 보복성 학교폭력 신고. 모두 실제 교육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물론 대다수의 학부모님은 학교를 신뢰하고 교사의 교육활동을 존중한다. 문제는 일부의 과도한 민원이 학교 전체를 위축시키고, 그 부담을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구조에 있었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학교를 떠난 교사도 있었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교사도 있었다. 이런 비극이 있고난 뒤에야 비로소 대책이 하나둘 마련되기 시작했다. 학교를 떠난 선생님들이 계셨을 때, 이런 논의가 시작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 감독관은 이런 문제를 ‘거울 치료’라는 통쾌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사는 때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판타지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절박함을 보여 준다. 교사가 무너진 자리에는 결국 학생들의 배움과 교실의 안전도 함께 무너진다.

‘매’는 교육의 수단일 수 있는가
드라마 「참교육」이 가장 큰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무력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악인들을 단죄하는 장면에서 흔히 ‘사이다’라고 표현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실제로 일부 국가에서는 심각한 학교폭력에 한해 제한적인 체벌을 징계 수단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는 한 교사를 성추행범으로 몰아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한 학생을 바로잡기 위해 회초리를 드는 교사가 등장한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빼든 것이다. 그 선택은 드라마 속에서 정당한 교육적 결단으로 묘사되며 교권보호국 감독관의 지지까지 받는다. 하지만 그 회초리가 학생을 바로 세우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체벌은 원칙적으로 허용돼서는 안 된다.
사실 가르칠 교(敎) 자에는 회초리를 뜻하는 ‘복’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이를 글자 그대로 ‘때리며 가르친다’고 이해하기보다는, ‘가르침에는 엄격함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읽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교사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도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 체벌권은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와도 같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조차 그 힘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물리적 두려움과 공포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면, 교사의 교육적 전문성 역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필자 역시 드라마와 같은 일을 겪는다고 상상하면, 이성을 잃을 만큼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에 등장한 사건들은 그동안 제도권 안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서이초 교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릴 당시, 많은 교사들은 자신들의 절박함이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시청한 교사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교권보호국에 더욱 대리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사들이 원하는 것은 매가 아니다. 아이를 지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서와, 교사가 교육활동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와 문화의 형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드라마를 통해 고민해야 할 것은 체벌의 찬반이 아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교육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민주사회 안에서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선량한 학생들이 가해자를 피해 다니지 않고, 가해 학생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교사들 역시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은 채 소신 있게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다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과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는 분명 두려운 존재다. 하지만 「참교육」을 보는 내내 필자가 더욱 두렵게 느낀 존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들의 고통과 학교의 혼란마저 정치적 계산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드라마 속 정치인 황기태는 유력 대권 주자인 최강석 장관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학생이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조차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재료가 될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의도, 아이들의 회복도, 학교의 정상화도 아니다. 오직 정치적 승패뿐이다.
하지만 교육은 정쟁의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 교육은 특정 정당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영역이 아니며,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도 아니다. 정치인이 선거를 바라본다면, 교육은 한 세대를 바라본다. 교육은 한 세대를 길러내는 장기적인 공공의 책무이므로, 선거 결과나 정쟁에 따라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되며, 정책의 효과와 학생의 성장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물론 교육학의 사조를 살펴보면 교육을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과 진보적 관점이 존재하며, 이러한 논쟁은 교육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하지만 공교육 정상화의 문제를 정당 간의 유불리나 진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학교폭력, 교권, 기초학력, 학생의 안전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다.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은 어느 한 진영의 승패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교육부가 좋은 정책을 펼쳐 국민에게 인정받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정권이 바뀌더라도 좋은 정책은 진영 논리에 따라 폐기되지 않고, 충분한 검토와 합의를 거쳐 계승되기를 바란다. 반대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 제안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 교육 정책의 실패는 결국 학생들과 학교가 가장 먼저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정치가 설득과 타협의 영역이 아니라 상대를 무너뜨리는 전쟁처럼 여겨질 때가 많아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한 가지 의미 있는 장면을 보여 준다. 같은 진영의 인사라 하더라도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비리를 묵과하지 않는 최강석 장관의 모습이다. 현실에서도 교육만큼은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공교육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무심함을 돌아본 끝에, 교사로서의 목소리를 글로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천하고 있다. 그 실천의 하나가 『착한 교사 포기하기』(방송대출판문화원 지식의날개)다.


2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