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우리는 흔히 ‘밝은 메이지’라 불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봤습니다. 메이지 일본은 작고 가난했지만, 열강의 압력 속에서도 스스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낸 나라로 기억됐지요. 그러나 그 이야기가 밝게 빛날수록 그 광휘 바깥에 놓인 건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빛 속에서 메이지의 어떤 모습이 지워져 있었을까요.
이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1880년대 일본과 마주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메이지 일본을 떠올릴 때, 1860년대의 유신이나 1870년대의 세이난(西南) 전쟁, 혹은 1890년대의 청일전쟁은 비교적 선명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의 1880년대는 흐릿하지요. 굳이 말하자면 갑신정변 때 일본이 보인 발뺌, 또는 교과서에서 한 번쯤 접하는 ‘자유민권운동’ 정도가 떠오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민권운동이 문제입니다. 이름만 놓고 보면 자연스레 오늘날의 시민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같은 이미지가 떠오를 법합니다. 사츠마·조슈 번벌 정부의 전제적 통치에 맞서 의회 개설과 인민의 권리를 요구했다는 설명도 얼핏 그런 이미지에 부합하는 듯 들리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1880년대 일본에서 자유와 민권이라는 말은 우리가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안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유와 민권은 누구를 위한 말인가.
조선은 일본의 생존과 개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인가,
아니면 자기 운명을 지닌 하나의 정치적 주체인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1880년대 메이지 일본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메이지가 ‘성공담’으로 기억될수록
이런 질문은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왕도의 개』에 그려진 자유민권운동
앞서 살펴봤듯 유신은 정답을 정해두고 나아간 질서정연한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불분명한 가운데, 낡은 질서는 무너졌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지요. 이 혼란은 유신 후 바로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1880년대에 이르자 사람들은 존왕이니 양이니 하는 구호 대신 자유와 민권을 즐겨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향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자유는 의회와 헌법으로 상징되는 새 정치체제였고, 누군가에게는 세금과 고리대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외침이었습니다. 또 몇몇 청년들에게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이 한 몸 던지게끔 이끄는 대의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 어긋남을 한 청년의 눈을 통해 좇는 작품이 있습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왕도의 개(王道の狗)』(1998~2000년)입니다. 주인공 가노 슈스케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려 마음먹었지만, 정작 무엇이 옳은 길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메이지 초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가노에게 당시 자유민권운동은 그가 찾던 ‘올바른 길’로 이어질 실마리처럼 비쳤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단순치가 않았습니다. 조만간 그는 1884년의 ‘치치부(秩父)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근대화의 파고 속에서 치치부 농민들은 생사(生絲) 가격의 폭락과 무거운 세금, 그리고 고리대의 압박 속에서 더는 버티기 어려운 처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유란 추상적인 이념이기 전에, 빚 문서 더미와 굶주림, 고리대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내건 자유당이라면 자신들을 이 절박한 처지로부터 구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고대하던 도움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홀로 일어선 농민들은 스스로를 ‘곤민군’이라 칭하며 고리대업자의 집과 곳간을 습격하고, 빚 문서를 불태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벼랑 끝에 선 자신들의 삶을, 이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 했던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어긋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자유당 지도부가 말하던 자유와 치치부 농민들이 믿고 싶어 한 자유는 같은 말이면서, 또한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에게 자유는 ‘정치’의 언어였습니다. 반면 농민들에게 자유는 부채와 세금, 고리대에서 풀려나는 ‘삶’의 언어였습니다. 평소 두 자유는 같은 방향을 보는 듯했지만, 이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왕도의 개』는 이 균열의 한복판에 서게 된 주인공의 당혹감을 좇습니다. 자유당을 믿고 일어선 치치부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중앙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믿고 일어선 이들의 봉기를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렇게 일갈하지요. “지금은 몹시 중차대한 시기니라! 다가올 선거와 국회 개설에 대비해야 할 판국에, 고작 돈놀이 준 놈들을 쳐부수겠다며 들고 일어서다니!” 그들에겐 절박한 농민들의 몸부림이 ‘대세’를 어지럽히는 그저 ‘우매한 짓거리’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를 들으며 가노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런 자유민권이란 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인민을 위한다면서도 바로 그 인민의 절박함을 외면해 버리는 대의라면 그건 대체 누굴 위한 대의인가.
왕도를 찾던 한 청년의 기이한 행적
가노의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곧이어 그는 1885년, 자유민권운동의 급진파였던 오이 겐타로와 그 일파가 조선으로 건너가 개화파를 지원하고, 큰 소동을 일으키려다 사전에 검거된 ‘오사카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명분은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돕자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훨씬 복잡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 뒤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일본 정부는 청나라와의 충돌을 피하려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자유민권운동의 일부 급진파는 이 상황을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염원하던 국회 개설의 약속을 받아낸 뒤 목표가 흐려지면서 당내의 조바심이 커지자, 그들은 조선 문제야말로 일본 국내 정치를 다시금 뒤흔들어 볼 기회라 판단했던 겁니다. 조선에 건너가 개화파를 돕고, 수구파 요인을 암살하는 등 큰 사건을 일으켜 정국을 뒤흔든다, 그러면 일본 국내 여론이 격앙되고, 번벌 정부의 무능이 드러나 국내 개혁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리라. 이것이 그들의 구상이었습니다.
가노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돕는다는 말과 일본 국내 정치를 뒤흔든다는 말이 대체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조선에서 사건을 일으켜 일본의 민심을 자극하겠다는 발상은 결국 조선을 일본 정치의 도구로 삼겠다는 말이었으니까요. 가노는 그런 계획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는 ‘대세’에 결국 휩쓸려 들어갑니다.

정말로 조선을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것일까요? 오사카 사건의 공판에서, 주동자 오이 자신이 이렇게 속내를 밝힙니다. 조선을 ‘미끼’로 삼았다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일본과 중국, 곧 아시아를 개량하기 위하여 조선을 이용하려는 뜻도 얼마간 그 속에 포함돼 있었다”라고. 이 한마디에 이번 회차의 문제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는 ‘돕는다’와 ‘이용한다’, 독립이라는 명분과 개량이라는 목표, 조선의 장래와 일본의 국내 개혁이 한데 뒤섞여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오이는 조선을 해치려 한 게 아니라 조선 독립당을 돕는 일이 동양 전체의 장래를 바꾸는 길이라고 믿었노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믿음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선의에서라 한들 상대를 수단으로 삼는 구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결국 조선은 나름의 정치적 주체로 존중받기보다, 그저 일본 인민의 침체된 기운을 일으키고, 일본의 개혁을 촉발하기 위한 계기, 혹은 자극제처럼 여겨졌던 셈입니다.
여기서『왕도의 개』라는 독특한 제목이 다시 떠오릅니다. ‘왕도’란 대체 무엇일까요? 작품 속 어느 인물은 왕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고 산 사람을 봉양하며 죽은 이를 장사 지내는 데 아쉬움이 없게 하는 정치라고. 너무 소박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왕도란 그저 거창한 구호로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편안히 해 주고, 이를 위해 타인을 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거나 하지 않는 그런 바른길이어야 할 터입니다.
사실, 패도는 노골적인 악의의 얼굴로 찾아오거나 하지 않습니다. 때론 자유의 이름으로, 때론 독립을 돕겠다는 우정의 이름으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동양 전체의 장래를 바꾸겠다는 대의의 이름을 앞세우며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럴듯한 명분 아래에서 누군가의 삶이 제 목적을 위한 발판처럼 쓰이는 순간, 그런 ‘왕도’는 이미 패도의 논리와 맞닿을 터입니다. 의문 속에서도 가노가 끝내 과격파와 함께했던 까닭은 아마 제대로 된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가 몸담게 된 계획은, 이름뿐인 왕도가 얼마나 쉽게 패도의 길로 미끄러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을 따름입니다.
‘성공담’이 지워버린 질문들
이렇게 보면 ‘밝은 메이지’의 서사 속에서 지워진 건 그저 몇몇 어두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건 그 시대 안에 실제로 존재했던 갈등과 선택지였습니다. 자유와 민권은 누구를 위한 말인가. 조선은 일본의 생존과 개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인가, 아니면 자기 운명을 지닌 하나의 정치적 주체인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1880년대 메이지 일본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메이지가 ‘성공담’으로 기억될수록 이런 질문은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자유민권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선구적인 움직임으로 정리되고, 치치부 농민들의 절박한 자유는 주변의 소요로 희미해지며, 조선을 일본 내부 개혁의 계기로 삼으려 했던 발상은 동양의 장래를 걱정한 이상주의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아래서 충돌하던 실제 삶과 욕망은 잘 보이지 않게 됐지요.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원래 그런 시대였다고.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 약자는 먹히고, 살아남자면 다른 나라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다들 그렇게 생각했으니 지금 와서 너무 쉽게 말해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분명 그 시대의 압력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다음 질문이 필요합니다. ‘시대가 그랬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설명해 주고, 또 무엇을 감추는 말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