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를 만나다

유럽사에서 ‘전간기’라 일컬어지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만큼

암울하게 묘사되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세계대전이

재발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마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국제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전 지구적 교류의 기틀은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17세기 종교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유럽사에서 ‘전간기’라 일컬어지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만큼 암울하게 묘사되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전간기를 ‘파국의 시대’로 규정했고, 마크 마조워는 전간기 유럽을 ‘암흑의 대륙’이라 명명했다.


세계대전 재발과 전체주의 발흥
전간기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후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두 차례의 혁명으로 붕괴된 제정 러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뒀던 영국도 흔들렸다. 국가 기반이 러시아 이상으로 취약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지도에서 사라졌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변화와 그에 대한 반응은 나라마다, 집단마다,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었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 중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대의에 공감을 표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군인은 두 배 이상인 2천만 명, 민간인은 네 배 이상인 4천500만 명이 희생됐다.


전간기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두 번째 이유는 전체주의 국가의 출현에서 찾을 수 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두 전체주의 국가의 부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계대전에 비해 한층 더 잔인하게 치러지게 된 까닭으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언급되기도 한다. 참호전이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상징한 것은 홀로코스트였다. 1929년 경제 대공황에 따른 극심한 혼란을 고려한다 해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체화한 전체주의는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요컨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세계대전이 재발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마저 무너졌던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논의를 주도한 것은 E. H. 카의 『20년의 위기, 1919~1939: 국제관계연구 입문』(1939)이었다. 국제정치학 분야의 손꼽히는 고전인 이 책에서 카는 전간기의 문제를 윌슨이 제안하고 영국 노동당 정부가 찬동했던 국제연맹을 정점으로 하는 이상주의의 득세에서 찾았다.


한편,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이끈 것은 단연코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951)이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간기 유럽을 집어삼킨 파멸적인 전체주의는 제2차 산업혁명과 대중민주주의의 폐해 속에서 자라났으며, 독일과 러시아같이 지리적인 이유로 해외 식민지 팽창이 어렵거나 뒤늦은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민족적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광활한 영토의 국가에서 만개했다. 아렌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압력이 이들 국가가 안고 있던 경제적·정치적 모순을 한꺼번에 분출시켰고, 윌슨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원칙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각인시킨 민족자결주의가 의도치 않게 전체주의의 발흥을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전간기에 대한 또 다른 관점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승전국에게나 패전국에게나 전간기는 치명적인 오판과 실수로 점철된 시기였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기초한 전간기 평화 체제에 대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공황 이후 전체주의 국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도발을 감행하는 1930년대 중반까지 또 다른 세계대전이 유럽에 조만간 닥칠 것이라고 예견한 이는 전무했다. 전간기의 좌절과 절망이 큰 것은 전간기의 도전과 희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또한 전간기의 고민과 노력이 없었다면 더 나은 국제사회를 향한 열망의 역사가 이처럼 풍부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은 여러 측면에서 시작과 끝이 너무나도 다른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발칸반도의 세력균형 문제가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문제로 비화되며 전쟁은 손쓸 새도 없이 장기전이 됐고, 이로 인한 피해와 충격은 당대의 상상을 크게 넘어섰다.


1917년 2월, 로마노프 왕조가 총력전의 압력 속에서 폭발한 대중 시위에 무너진 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의 지속 여부였다. 러시아 임시정부는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싸우는 동시에 병합이나 배상 없는 조속한 평화를 협상국에 요청하는 이중적인 방안을 취했다. 두 달 뒤인 1917년 4월에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멕시코와의 비밀협상에 분노한 미국이 협상국과 함께 싸우기로 선포했다. 러시아공화국과 미국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협상 간 전쟁이 아니라 민주국가 대 전제국가 간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윌슨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복도 지배도 아닙니다. 우리는 배상을 원하지도 우리의 희생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라고 공언했다. 같은 해 10월, 볼셰비키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평화포고」로 윌슨의 연설에 화답했다. 레닌에게도 정의로운 평화란 배상과 병합이 없는 평화였다. 제국주의를 전쟁의 원인으로 꼽은 레닌은 주민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합병된 모든 영토를 즉시 반환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윌슨조차도 레닌의 즉각적인 종전 제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낙담한 레닌이 두 달 뒤인 12월 독일과 단독으로 휴전협정을 맺고 협상국 진영에서 이탈하자, 윌슨은 항전 의지를 다지고 사기 진작을 위해 이듬해 1월 미국의 전쟁 목표를 구체적으로 담은 「14개조 평화 원칙」을 천명했다.


국제주의 운동이 남긴 유산
제1차 세계대전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련이 퇴장하면서 윌슨이 이끄는 미국에 의해 마무리됐다. 윌슨이 원했던 것은 ‘승리 없는 평화’였으나 수년에 걸친 처절한 싸움 뒤에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윌슨은 외교정책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와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자신하며 대서양을 건넜지만, 파리 강화 회의는 신외교의 외피를 입은 구외교의 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국제주의 운동은 윌슨 덕분에 베르사유 조약의 서두를 장식하게 된 국제연맹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통해 새로운 번성기를 맞이했다.


미국은 국제연맹의 집단안보 체제에 따른 주권 제한을 우려한 상원의 반대로 불참했지만, 국제연맹은 영국을 비롯한 42개국이 국가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해 참여한 역사상 최초의 국제기구였다. 주지하듯, 국제연맹의 핵심 목표는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이었다. 그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 공동체의 확대와 심화였으며, 전자에서와 달리 후자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다. 전간기 국제연맹을 통해 활성화된 국제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 본격화된 국제정치의 세계화는 훨씬 더디게 이뤄졌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국제연맹 산하 첫 전문 기관으로 설치된 국제노동기구를 꼽을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의 정관은 베르사유 조약의 일부로 조인됐고, 국제노동기구는 국제연맹과 함께 탄생했다. 국제연맹의 목표가 보편적인 평화의 구축이라면, 이는 사회 정의가 구현돼야만 가능하며, 사회 정의는 전 세계적으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 조건이 확립돼야 이룩할 수 있었다.


여성운동과 노예제 폐지 운동, 난민 보호 운동과 같은 인도주의 활동도 국제연맹과 국제노동기구의 창립과 더불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베르사유 조약 제7조 국제연맹 규약은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연맹 및 국제연맹 예하 조직의 모든 직책에 대한 성적 차별을 공식적으로 철폐했다. 직위와 임금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했으나, 국제연맹 사무국 소속 직원의 절반가량이 여성일 정도로 여성운동은 국제연맹을 기반으로 한 국제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다.


가장 오래된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 중 하나인 노예제 폐지 운동 또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에는 노예 협약이 국제연맹 조약으로 추가돼 회원국만 아니라 회원국과 상업 및 산업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노예제와 노예무역의 폐지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국제연맹은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300만 명에 달하는 동유럽 무국적 난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국제연맹은 국제노동기구와 함께 산하 조직으로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를 설치하고, 난민 여권을 발행해 이들이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영국에 기반을 둔 국제법협회는 국제법 위반, 특히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 권한 마련을 시도했다. 국제법협회는 전쟁범죄를 개별 국가 간 문제가 아니라 국제 공동체의 문제로, 즉 인류에 대한 범죄로 인식할 것을 설득했고, 국제연맹을 통해 이의 법제화를 도모했다.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연맹은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식민지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위임통치령위원회가 설립됐고, 위임통치령의 상황에 대한 공개적인 감시와 평가를 통해 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사회를 향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도한 뒤 국제주의 운동에 뛰어든 수많은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활동가의 여론 속에서 국제연맹은 국가이익으로 분절된 구외교의 세계를 인류애와 정의로 연결된 신외교의 세계로 바꿔 나갔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20년 동안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짧게나마 꽃피웠던 국제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당연시하는 전 지구적 교류의 기틀은 이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외교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역사학 선언』『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유럽사 속의 전쟁』등을 번역했으며,『정치학 방법론』등의 편저를 냈다. 국제관계사, 국제정치경제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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