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의 특징은 ‘학위 그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하는 ‘사제동행’도 그중 하나다. 도쿄대 명예교수인 다케다 하루히토(武田晴人)의『재벌의 시대』(해남, 2026)를 번역한 정진성 일본학과 명예교수와 김영희·지계문 원우(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의 작업이 눈길을 끄는 이유다.
정진성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는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의 ‘일본의 비즈니스 히스토리’ 강의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한 것이 시작이었다. 정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도 ‘재벌’이 주요 테마였던 만큼 학생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웠다. 학생들의 발제 역시 한국 재벌의 상황을 염두에 둔 내용이 많았다. 이러한 열의를 보며 이 책을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 충분히 의미 있겠다고 확신했다”라고 전했다.
방송대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정진성 명예교수와 김영희·지계문 원우가
뜻을 모아 다케다 하루히토의 명저『재벌의 시대』를 번역 출간했다.
강의실에서 시작된 ‘사제동행’의 결실로 탄생한 이 책은,
일본 재벌의 탄생부터 해체까지 80년 흥망사를 통해
오늘날 한국 대기업 구조를 되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대학원 강의 교재로 쓰였던 ‘원서’
번역 작업은 당시 강의를 수강했던 김영희·지계문 원우가 맡았고, 정 교수가 번역본을 여러 차례 검토하며 함께 수정·보완해 우리글로 다듬어냈다. 1995년 출간된『재벌의 시대』는 1993년 가을 저자가 세타가야(世田谷) 시민대학에서 15회에 걸쳐 진행한 ‘일본 재벌사’ 강연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원서에는 구어체적 서술이나 주술 관계가 어색한 부분이 더러 있었다. 이에 공동 번역자들은 독자들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을 가다듬으면서도, 원서 특유의 강연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저본으로 사용한 책은 가도카와 소피아 문고판(2020)이다. 책의 부제는 ‘일본 재벌의 패권·전향·해체의 역사’이며, 정가는 3만 원이다.
물론 ‘재벌’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논란과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기존에도 관련 도서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186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를 대상으로 재벌과 전후 기업집단 연구의 정수를 보여주는『일본경제의 발전과 기업집단』(하시모토 쥬로·다케다 하루히토 편저, 장현준·권혁태 옮김, 오름, 1997), 에도 시대부터 고도성장기까지의 경영사 전반을 다루며 재벌에 관한 비중 있는 기술을 담은『일본의 경영사』(미야모토 외 지음, 정진성 옮김, 한울, 2001), 일본의 재벌 해체 과정과 한국 재벌의 구조적 문제점을 비교 분석하며 경제 민주화를 위한 소유·경영 구조 개편을 주장한『일본의 재벌해체』(T.A.비손 외, 최정표 편저, 비봉출판사, 1993)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재벌의 시대’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등 강력한 가족 경영을 토대로 성장한 금융 및 산업 대기업들이 일본 경제를 지배했던 시기를 뜻한다. 이 시기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해,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독점 기업들을 해체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탄생 후 80여 년간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일본 경제발전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경제는 ‘재벌의 시대’였다. 이 책에 ‘재벌의 시대’라는 제목을 붙인 까닭은, 일본의 재벌이 역사적 존재로서 일정한 조건하에서 비로소 존재 의의를 인정받았고 특정 시대에 한해 빛을 발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 책은 재벌의 탄생부터 해체까지 총 15장에 걸쳐 통사적으로 다룬다. 흐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 시대(1868~1912): 봉건제도 종식 후, 정부가 국영 기업들을 특정 가문에 헐값으로 매각하면서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의 재벌이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호황기(1914~1918): 재벌들은 산업 생산량, 시장 점유율, 금융 및 중화학 공업 분야에 대한 지배력을 대폭 확대했다.
1930년대 군국화 시기: ‘4대 재벌(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은 군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을 가속화했다.
1946년 점령기: 연합군 당국은 일본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지주회사들을 전격 해체했다.
계열(케이레츠, 系列)로의 진화: 전후 사업 네트워크는 족벌 독점 구조를 대체하며 현대적인 기업집단 형태로 진화했다.
한국 기업집단에 주는 타산지석의 교훈
번역에 참여한 지계문 원우는 “오늘날 한국의 대기업과 기업집단을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배경 중 하나인 일본 재벌을 함께 살펴봐아야 한다.『재벌의 시대』는 거대 기업집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일본 경제의 형성과 변화를 조망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기업 시스템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라고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일본 재벌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면 에도 시대의 거상인 ‘호상(豪商)’과, 메이지 시대 정부와의 밀착 관계 속에서 성장한 ‘정상(政商)’이라는 두 축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이 책은 일본 재벌이 단순한 부유층 상인 집단이 아니라, 시대 흐름을 읽고 산업과 금융을 기반으로 성장한 새로운 기업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재벌은 단순한 ‘부자의 집합체’가 아닌, 금융·제조업·무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국가 경제를 움직인 하나의 경제 시스템이었다.”
눈 밝은 독자라면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며 한일 재벌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자연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일 재벌 모두 주식회사 제도를 기반으로 지주회사를 핵심에 두는 기업 조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를 지탱하는 제도적·역사적 조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창업자 가문이 자녀들을 자회사 수장에 앉히고 직접 경영을 지휘하지만, 일본은 동족이 경영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전문경영인 등용을 중시해 왔다. 이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기업 경영의 핵심 과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대목이다.”
정진성 교수는 이 책의 장점의 하나로 “종종 기존의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역사를 그 이론으로써 재단하려는 시도의 오류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저자는 제7장에서 ‘주식회사에서의 소유와 분산이 전문경영자의 권한을 가져와 이른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고 하는 기존의 설명에 대해, 이것은 1930년대의 미국 상황을 배경으로 한 가설로서, 일본 재벌에서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미국 기업과는 전혀 다른 문맥에서 나타난 것임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즉, 일본 재벌에서는 재벌 동족의 ‘총유제’라고 하는 특수한 공동재산 소유제와 상급 종업원에게 경영을 위임하는 전통과 같은 일본에 독특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문경영자의 발언권의 강화가 실현됐다는 것이다.
독서를 돕는 알찬 역주와 연표
그럼에도 번역진은 이 책이 학술서임에도 ‘읽을거리’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후루카와 재벌과 스즈키 상점의 파탄 과정(제8·9장), 달러 매입을 둘러싼 정부와 미쓰이 재벌 간의 숨 막히는 줄다리기(제11장) 등은 소설 못지않은 긴장감과 재미를 선사한다.
비록 구어체로 기술됐으나 기업 전략과 조직 구조 등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일반 독자가 선뜻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해 정진성 교수는 “근대 일본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더욱 어렵게 느낄 수 있다”라며, “한국어판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충실한 역주를 달고, 책 끝에 재벌 관련 연표를 수록해 시대적 배경과 사건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