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기억이 없습니다.
조교로 일했던 대학의 교수가 됐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르치고
연구했으며, 부족한 저를 믿고 지지해준
학생 여러분을 만났죠.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한다는 게 수학적으로는 극히
낮은 확률일 테니 일종의 기적 아닐까요?”
지난 8월 11부터 3일간 대학본부 본관 5층에선 이례적으로 바자회가 열렸다. 컴퓨터과학과 손진곤 교수가 연구실에 소장하던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도서와 음반이 전시된 자리였다. 손 교수의 애장품들을 무상 또는 소액으로 ‘득템’할 수 있었던 바자회의 수익금은 모두 대학발전기금으로 기부됐다. 퇴임을 앞둔 그가 바자회를 통해 연구실에 남은 추억의 흔적을 말끔히 정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손 교수가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밝힌 소회를 들었다.
이현구 기자 zuibm@knou.ac.kr

교수로 부임하신 지 만 35년이 되셨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시겠습니다
사실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건 그보다 오래됐습니다. 1991년 3월에 방송대 전자계산학과(현 컴퓨터과학과) 교수로 임용됐는데, 몇 해 전인 1986년 5월부터 약 2년 동안 방송대 전자계산소(현 교육정보화본부) 조교로 일했었거든요. 함께 퇴임하는 프랑스언어문화학과 이용철 교수가 동료 조교였고요. 그 시절과 비교하면 방송대는 위상 면에서나 내실 면에서나 모두 놀랄 만큼 발전했습니다.
방송대 원격교육 시스템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크게 기여’했는지는 모르겠고(웃음) 여러 가지 노력은 했죠. 1996년과 1997년에는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술개발사업과제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는데, 보고서 제목이 「방송정보를 이용한 VOD 학습관」이었습니다. 방송대 컴퓨터과학과 곽덕훈 명예교수님이 연구책임자였고, 현재 고려사이버대학교 총장인 이원규 박사가 동료였죠. VOD(video on demand), 즉 주문형 비디오 개념을 원격교육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였는데, 초고속 통신망의 도입과 보편화 이전에 교육의 미래를 그려본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IBM 본사가 방송대에 네트워크 서버 2대를 기증하면서까지 이 연구를 자사의 글로벌 홍보에 활용했을 만큼, 이 연구는 선구적인 사례였어요.
그 이후의 연구와 활동도 궁금합니다
방송대 원격교육 시스템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연구를 꼽자면 「방송대 콘텐츠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방송대 평가제도 개선을 위한 멀티미디어 강의 수강 확인 시스템 개발」, 「인공지능 기반의 방송대 상담 챗봇 서비스 도입에 관한 연구」 등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모두 학내 공동 연구였고 제가 연구책임자였죠. 그 밖에도 국내외 학술지에 다수의 연구 논문을 게재했고, 여러 학회의 임원이나 정부 산하기관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교육 시스템 개선과 관련된 연구나 제안에 대해 반발은 없었나요
많은 분들이 뜻을 같이하고 도와주셨지만, 반대하는 분도 물론 있었죠. 하나만 예를 들면, 제가 언급한 연구 중 하나에선 평가체제 개선을 제안했습니다. 성적을 매기는 데 중간평가와 기말평가 결과만 반영했는데,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형성평가 결과도 반영하자는 것이었죠. 내부적으로도 ‘컴퓨터가 없거나 인터넷이 안 되는 학생은 어쩌란 말이냐’라는 반대 의견이 나왔어요. 하지만 라디오나 TV로 강의를 송출하던 시기에도 물리적 여건상 강의를 듣지 못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또 강의 수강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시험만 치르는 학생이 의외로 많은데, 원격고등교육의 취지를 살리고 교수자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선 강의를 꼭 듣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어요. 현재 형성평가·중간평가·기말평가 결과를 2:3:5 비율로 반영하는 평가체제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반대 의견 역시 새로운 시도로 인한 부작용을 예측하고 면밀히 검토하는 데 꼭 필요한 목소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퇴임을 앞두고도 인공지능(AI) 관련 특강이나 집필 등으로 무척 바쁘셨더군요
작년의 AI 특강은 공식적인 프로그램은 아니었고, 시의성을 고려해 조금 급하게 진행했었습니다. 아쉬움은 남지만 후배 교수들과 서울지역대학, 조교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죠. 많은 학생들이 AI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맹신에 빠져있는 것 같아 이 새로운 도구를 학업에 활용하도록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올봄에 출간한 『수학을 다시 시작할 결심』도 AI와 관련이 있어요. AI가 발전해갈수록 인간의 창조력과 비판적 사고, 협력과 소통은 더욱 중요해질 텐데, 수학은 특히 비판적 사고나 창조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이니까요. 그 책의 부제인 ‘AI로 이어지는 생각의 기술’도 이런 관점을 반영한 것입니다.

고려대 수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전산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그리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웃음). 고등학교 때까지는 스스로가 머리도 좋고 수학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오니 저보다 훨씬 뛰어난 친구들이 많더군요. 뇌성마비를 이겨내고 모교의 교수가 돼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라 불리기도 한 황윤성 교수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1984년에 고려대에 전자계산학과(현 컴퓨터학과)가 신설됐고,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며 전산학이라는 낯선 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는 PC가 보편화되기 한참 전이었어요.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컴퓨터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수학과 컴퓨터과학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컴퓨터나 AI의 아버지로 불리는 튜링이나 노이만도 모두 수학자였어요. 아무튼 대학원에 간 후부터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신조로 삼았습니다. 나 자신은 조금 어리석은 사람일지 모르나 한 우물을 파다 보면 뭔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공(愚公)까진 맞는 듯하지만 이산(移山)에 대해선 자신이 없군요. 제가 옮긴 것은 산은커녕 모래알 한 줌밖에 안 될 수도 있으니까요.
방송대의 AI 관련 교양과목 신설, AI 튜터 개발 등 최근 동향은 교수님의 지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AI라는 시대적 조류를 거부할 수 없으니까요. 제가 그런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실현될지 무척 궁금합니다. 특히 신설된 교양과목은 저도 들어보고 싶군요.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최근 사례를 보면 ‘특이점(singularity)’이 눈앞에 온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요.
재직 기간의 특별한 추억이나 향후 계획이 있다면요
특별했던 일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친애하는 동료 교수들과 함께했던 여행, 강원지역대학장 시절 스승의 날에 50대 여성 학생이 건네준 옥수수와 감자, 국제 학회에서 제가 발표한 논문으로 수상했을 때, 방송대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했던 공연 이벤트, 방송대 대학원에서 지도한 첫 제자가 첫 번째 논문을 발표했을 때 …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기억이 없습니다.
한편으론 방송대에서 경험한 모든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아요. 대학에서 수학을 배우다 좌절했지만 컴퓨터과학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았고, 조교로 일했던 방송대라는 원격교육기관의 교수가 돼 정년을 눈앞에 두게 됐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르치고 연구했고, 부족한 저를 믿고 지지해준 학생 여러분을 만났죠.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한다는 게 수학적으로는 극히 낮은 확률일 테니 일종의 기적 아닐까요? 외부 기관에서 맡은 활동이 일부 남아있지만 퇴임 후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차차 생각해봐야겠네요. 저는 곧 떠나지만 여러분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앞으로의 여정을 만들어가시길 빕니다.
▶ 관련 기사 「‘연구실 장서’ 나눔, 수익금은 대학 발전기금으로!」 (https://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6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