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 삶을 말하다 ③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지만, 제주도에서처럼 생명의 위협은 없으니 다행스러웠습니다. 다만, 양친을 두고 달아났다는 가책이 나날이 커져서, 민족단체 활동가가 되었고 폐쇄되었던 조선 소학교의 재건에도 관여했습니다.  양친을 두고 탈출, 이승에서의 이별제주도 앞바다 외딴 섬을 심야에 떠나, 어스름이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에 고토열도(五島列島, 나가사키 현)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일본의 영해에 들어섰다고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암선의 엔진이 멈추었습니다. 호우로 기관실까지 물이 찼던 것입니다. 나란히 달리는 한국 경비정도 보였습니다. 다행히 배는 일본의 영해를 표류하였고 천운으로 배의 엔진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한국 쪽으로 흘러갔다면, 내가 ‘자이니치’를 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아버지와 친척,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겼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목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있는 수를 다 동원하여 제주도에서 나를 탈출시키려고 애썼습니다. 서치라이트가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조달된 작은 어선을 타고 제주도를 빠져나와 일본으로 가는 암선이 온다는, 바위로 된 작은 무인도를 향했습니다. 밤을 틈타 작은 배에 올라탈 때,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말아 달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 이렇게 말한 아버지는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일본에 온 것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다. 결국 한국에서 온 암선은 일본으로 가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북조선으로도 지금은 가고 싶지 않다. 한국에서 하나뿐인 어머니가 미라인 채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 간행된 장편시집 『니가타』에서이승만의 반공독재정권이 계속되던 한국에서 ‘빨갱이 도망자’를 아들로 둔 부모님의 삶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재회를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1957년, 어머니는 그로부터 3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나이든 부모를 버리고 ‘4·3’으로부터 도망친 나는 일본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나의 ‘자이니치’는 죄 많은 나날의 연속이기도 합니다.―<아사히신문>, 2019년 7월 25일(목), 6회차이카이노(猪飼野), 없어도 있는 마을이카이노(지금의 大阪市 生野?), 히가시나리구(東成?)에는, 한국에서도 없어져 버린 생활풍속이 민족유산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주거지이며 그 원류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1949년 6월, 이카이노에 도착한 나는 초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공장은 바로 폐업이 되어 이사를 했고 ‘닭 토나리(鷄舍長屋)’라 불리는 공동화장실 옆 판잣집 단칸방의 동거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지만, 제주도에서처럼 생명의 위협은 없으니 다행스러웠습니다. 다만, 양친을 두고 달아났다는 가책이 나날이 커져서, 민족단체 활동가가 되었고 폐쇄되었던 조선 소학교의 재건에도 관여했습니다. 이카이노 일대에서 십 년여를 살았는데, 제주도와 연이 있는 사람이 사는 일도 많아서, 고향에서 본 적 있는 사람도 곧잘 만나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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