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격동기에 뒤샹의 관심은 기존의 회화적 관습 대신 지각 너머 4차원의 공간을 환기시키는 예술의 시도에 집중됐다. 이후에도 뒤샹은 다양한 레디메이드 오브제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와해하려 했다.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개척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그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화가다. 2019년 그의 대표작과 실험적인 아카이브 150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0일 동안 전시되면서 국내에서도 뒤샹열풍이 불었다. 그의 사후 50년이 넘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뒤샹의 작품을 혁신적인 미술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1887년 7월 앙리 로베르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예술을 사랑하는 뒤샹의 가문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래로는 세 명의 여동생도 있다. 예술을 사랑했던 뒤샹 집안은 자녀 여섯 중에서 네 명이 예술가로 살았다. 뒤샹의 할아버지(Emil Nicolle)는 예술가로 살기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이자 판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할아버지의 작품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낸 마르셀 뒤샹은 중등학교시절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수학에 재능이 있었고, 체스에도 뛰어났다. 뒤샹은 1906년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생계를 위해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게재했다. 이시기 몽마르트에는 모딜리아니와 세베리니 등 여러 예술가들이 살았고, 근처에는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세탁선(Bateau-Lavoir, 화가들이 입주하면서 20세기 초 프랑스의 전위적인 미술운동의 중심지가 됐음)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곳은 프랑스의 현대미술이 탄생했던 장소로 지금은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파리의 중요한 관광지가 돼,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년)마르셀 뒤샹의 혁신적인 미술이자 스캔들을 일으키며 유명해진 첫 작품은 28회 앙데팡당(Salon des Independants)전에 출품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1912년)였다. 이 작품은 입체주의 미술로 다양한 시각에서 재평가돼 왔지만, 전시 개막일 전에 철거했던 그림이다. 뒤샹의 다양한 관심이 집약된 작품으로 영화와 고속촬영을 통해 인물의 움직임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는 계단을 내려가는 동작을 정지시키고 분리하면서 연속사진으로 움직임을 그린 회화적 방식이었다. 뒤샹은 이런 동작을 통해 고전적인 누드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주목한 뒤샹의 회화적 방식은 당대의 스캔들로 점화됐다. 이 시기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초기 입체주의(cubism) 미술운동이 분석적 입체주의 미술로 발전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 뒤샹은 마치 연속사진(motion picture)처럼 동작을 연결해 그린 그림으로 당시 입체주의 미술에 ‘미래주의(futurism)’미술을 결합했다. 이것은 프랑스를 거점으로 한 입체주의(공간-다시점)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미래주의(시간-속도)의 기법을 뒤섞은 결과였지만,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반감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12년 11월 뒤샹은 자신의 그림 4점을 뉴욕의 국제 현대미술전, 일명 ‘아모리 쇼(Amory Show)’에 출품한다. 당시 평론가인 줄리언 스트리트(Julian Street)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를 두고 ‘기와 공장의 폭발’이라고 묘사했는데, 이 평가가 아모리 쇼에서 스캔들의 중심이 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당 작품은 논란을 거듭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다른 도시에서 몇 번의 순회전시까지 이어졌다. 이런 유명세를 치르면서도 뒤샹은 조용히 도서관 사서 일을 하면서 작품 구상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미 군복무를 마쳤는데도 뒤샹은 징병검사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병약한 신체로 판정 나서 징병면제를 받았다. 1915년에 뉴욕으로 건너간 뒤샹은 전위미술 후원자인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의 집에서 머물며 뉴욕의 예술가·문인들과의 다양한 교류를 이어갔다. 이 무렵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로 유명세를 탔던 뒤샹은 각종 신문과 잡지의 인터뷰를 하면서 미술계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레디메이드 오브제, 「샘」뒤샹은 1917년 4월 10일부터 5월 6일까지 열린 ‘독립예술가협회’전에서 작품 배치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이 협회는 1884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독립미술가협회를 모델로 상을 수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연회비 6달러만 납부하면 모든 예술가가 참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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