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랍 속 ‘습작’도 재활용 가능, 퇴고 믿고 일단 써 보자!
제48회 방송대문학상 공모전 접수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접수된 응모작은 6월 말 춘천우체국 소인이 찍힌 서○○ 학우의 작품들이다. 서 학우는 시, 단편소설, 에세이, 단편동화, 희곡/시나리오 다섯 장르 모두에 출품했다. 문학상 공모전 공고가 나간 이후 학우들의 문의 전화가 이어지고 있다. 개중에는 졸업한 학생인데 응모할 수 없냐는 문의에서부터 다섯 장르 모두 응모해도 되냐는 질문까지 다양하다. 학우들이 자주 묻는 질문은〈KNOU위클리〉제179호(2023.8.11.),「‘표절’ 주의하고 퇴고는 충분히 …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문학상 관련 자주 묻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weekly.knou.ac.kr/articles/view.do?artcUn=4038 참조). 요즘은 문학상을 운영하는 대학들이 몇 곳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 대학과 다른 특성을 지닌 방송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단 방송대문학상은 대학문학상 가운데서도 역사가 무척 깊다. 올해가 48회째니, 근 50년 가까이 문학상을 운영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많은 학우들이 재학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서 글쓰기 도전에 나섰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학상을 통해 문단에 진출한 학우들도 꽤나 많이 있다. 다른 대학과 달리 방송대문학상은 주요 문학 장르인 시, 단편소설 외에도 에세이, 단편동화, 희곡/시나리오 부문까지 영역을 확대했다는 점에서도 차별성을 보인다. 게다가 문학상 상금도 일반 장학금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금액이다. 시, 에세이, 단편동화, 희곡/시나리오 모두 당선작은 120만 원, 가작은 60만 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특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에는 200만 원의 상금이 걸려 있다. 가작은 80만 원이다. 문학상 응모작들은 대개 마감을 앞둔 8월 중순 이후 집중된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작품들이 이즈음 밀려든다는 의미다. 그러나 고심과 퇴고와 달리, 글쓰기에 도전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막차를 탄 작품도 있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도전해 보고 싶은데 망설여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글쓰기가 두려워서다. 그렇지만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먼저 도전해 당선의 영예를 안은 글쓰기 선배들의 조언을 참고하면 된다. 당선작 학우들이 말하는 비결 제47회 방송대문학상 시부문 당선을 거머쥔 정해숙 학우(농학과)는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9)를 추천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여기 다 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젊은 시인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와 릴케가 1903년부터 1908년까지 약 5년간 나눈 편지가 담겨 있다. 릴케는 이 편지에서 방황하는 젊은 시인의 막막한 물음에 현실적인 해답과 방향을 제시한다. 릴케의 첫 편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당신 삶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 깊은 곳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 당신이 자꾸만 바깥 세계만을 쳐다보고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은밀한 감정을 통해서나 답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에 대해 외부로부터 답을 얻으려 할 때처럼 당신의 발전에 심각한 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시는 외부 세계와 만나는 내면에서 빚어지는 언어 예술이다. 릴케는 ‘내면 깊은 곳’을 살펴보라고 말한다. “시는 질문이지 답이 아니다”라고 말한 정해숙 학우가 릴케 이 책을 권한 이유가 짐작된다. 제43회 방송대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작을 낸 이민권 학우(현재 경영학과)는 창작 활동을 할 때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먼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다. 그는 일단 원고지 70장을 무조건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글로 쓰지 않으면 작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고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퇴고’라고 확신한다. 퇴고라는 게 있기에, 처음 원고지를 가득 메워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퇴고 과정을 여러 번 거치다 보면, 어느새 작품이 예선을 통과하고, 가작이 되고, 당선작이 될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끝으로 그는 써 놓고 서랍에 넣어둔 옛 작품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포도주는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가 있다고 한다. 기존에 써 놓은 것, 어쩌면 수년 전에 습작으로 써 놓은 것을 꺼내어 다시 살펴본다면 의외로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작가의 생각과 사회의 분위기도 변하기 때문에 그 작품을 새롭게 맞이하게 된다.” 제47회 방송대문학상 에세이 부문에서 당선된 유승본 학우(현재 영어영문학과)는 좀더 구체적으로 귀띔했다. “에세이는 매우 포괄적인 장르다. 그래서 에세이에 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 다음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수필집을 읽어가면서 글의 주제와 핵심 단어, 구성과 표현 방식을 분석했다.” 방송대문학상 에세이 부문은 자유주제가 아니라 해마다 ‘특정’ 주제를 제시하는 제한된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유승본 학우도 이 점을 고려해 공모전에서 제시한 주제를 분석하고, 본인의 경험과 다른 사례들, 사회적 현상 등을 정리한 뒤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정보와 지식을 축적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주제를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역발상’을 시도했다. 그런 뒤 공감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며, 어디에 의미를 부여할지를 고민하며0, 본격적인 글쓰기에 나섰다. 물론 그 역시 이 모든 과정에서 기록과 분석, 구상 등을 ‘쓰고 다듬고 정리하기’를 생활화했다. 동화, 희곡 부문 심사위원들은? 단편동화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던 한 평론가는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아이의 목소리’로 동화를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교훈이나 특정한 메시지를 과도하게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동화를 쓸 때 어린이의 목소리를 앞지르는 교훈이나 메시지가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문학상 응모작의 경우,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장이나 메시지를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그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화는 어린이의 목소리가 얼마나 생생하게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힘이 갈린다. 이 점을 꼭 명심하고 응모했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희곡/시나리오 부문 심사위원을 지낸 한 평론가도 희곡과 시나리오의 장르적 특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응모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희곡은 무대 위에 올라간 작품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예상하고 창작해야 한다. 시나리오 역시 촬영 환경을 감안해야 하고, 스크린으로 완성됐을 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계산하고 창작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예측 가능한 주제와 상황 설정은 작품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 그렇다면 방송대 재학 시절의 추억을 만들고, 본인의 내면에 꿈틀대는 글쓰기의 꿈을 외면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해 본다면 어떨까.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217호
최익현
2024-07-15 00:18
-
한국 패션계의 전설, 우아하고 묵직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 다들 만류했어요. 왜 잘사는 미국에서 눌러 살지, 못사는 한국으로 돌아가나 의아해했죠. 곧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러나 전 풍요로운 미국에서 나 혼자 잘사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이 못하는 공부를 미국까지 와서 했으니 어떤 형태로든 고국으로 돌아가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최효안,『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마음산책, 2017) 중에서 집을 떠난 노라 1947년 여의도 공항에서 가족들과 작별하고 혼자 미국행 노스웨스트 항공 비행기를 타고 떠난 여성이 있었다. 20세의 이혼녀 노라 노, 노명자(1928~)다. 그 누구도 그녀의 미국 유학길을 찬성하지 않았다. 아버지만이 딸의 앞길을 응원했을 뿐! 방송인 아버지와 아나운서 어머니 사이에서 10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노명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난 노명자가 경기여고 졸업반 재학 중이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부모님은 딸이 정신대에 끌려 갈 것을 두려워해 급하게 결혼을 시켰다. 신랑은 7세 연상의 일본군 장교인 신응균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포병 대위로서 일본에서 근무 중이었다. 신혼부부는 도쿄 인근 포술훈련소 장교 사택에 살림을 차렸지만 신랑은 곧바로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오키나와 전선으로 차출된 것이다. 어린 새댁은 귀국해 황해도 해주의 시댁으로 갔다. 출산한 시어머니를 대신해 대가족의 살림을 떠맡았다. 19세의 노명자가 잠시 친정에서 쉬고 있을 무렵 이혼을 요구하는 시댁의 편지를 받았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알 수 없어 죽었으리라 추정되는 아들의 보상금이 며느리에게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처사였다. 1년 후 남편은 살아 돌아오지만 결국 그들은 이혼하고, 남편과 시댁에 충실했던 어린 새댁은 회한만 가득 품은 채 이혼녀로 전락했다. 회한은 ‘분노’로 변하고 소녀는 스무 살 ‘어른’이 됐다. 시댁과 세상의 비아냥과 냉대는 그녀가 다시 일어설 힘이 됐다. 노명자는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가 되어 미국행을 실행했다. 올해 96세인 노라는 여전히 꼿꼿하고 규칙적으로 일하는 현역이다. 그는 자신을 ‘철없는 건달’이라고 부른다. 분노는 그녀를 성장시켰고 철없음은 그녀를 안주하게 두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은 옹골차고 무겁지만 변화의 물결에 자신을 둥둥 띄울 수 있는 ‘철없음’을 지녔다. 100세를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도 바다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문주란이다. 바람과 파도에 몸을 싣고 미국에 도착한 노라는 로스엔젤레스 프랑크웨건테크니컬칼리지에서 패션디자인 공부와 병행해 의류 공장에서 일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옷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기능적으로 우수한 실용성을 갖춰야 함을 깨달았다. 2년의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 조국의 사정은 힘들었다. 여순사건 등 좌우 이념 대립이 심했고 가정적으로는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녀는 귀국길에 올랐다. 가족을 돌봐야 했고 조국을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미국 패션교육을 받은 자신이 꼭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노라는 평생에 단 한 번 크게 후회했다. 자원봉사를 하는 야전병원에서 무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패션 대신 의학을 공부했어야 했다는 마음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노라는 퇴계로 의상실을 다시 오픈하는데 주 고객은 미군을 대상으로 공연하는 연예인들과 각종 연극과 쇼에 출연하는 가수와 배우들, 그리고 한국은행 간부 부인들이었다. 전쟁 통에도 사람들의 삶은 지속되고 문화와 예술은 죽지 않는다.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휴전 후 연극과 영화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은 노라를 찾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패션을 공부한 그녀의 감각과 창의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노라는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신극협의회)과 호흡을 맞췄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위해 어머니의 최고급 벨벳치마를 가지고 햄릿 의상을 만드는 열정을 보였다. 의상실이 자리잡히자 노라의 공부열은 다시 타올랐다. 이제는 파리연수였다. 1년여 프랑스어 공부를 마친 그녀는 1956년에 집 두 채 값의 연수비용을 손에 쥐고 파리 아카데미 쥘리엥으로 향했다. 노라는 반년 간의 연수기간 동안 스페인, 이태리, 스위스 등 유럽 전역을 오가며 그들의 문화를 체험했다. 가을에 서울로 돌아온 29세의 노라는 배우고 경험한 것을 한국 패션계에 적용하기 위한 고민을 거듭하고, 그 첫 발걸음으로 옷감의 국산화를 시작했다. 노라는 곧바로 1956년에 국산 모직 원단을 소재로 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노라의 비공식 패션쇼는 1953년에 개최됐다). 그녀의 행보는 계속 이어져 1950~60년대 은막 스타들의 의상을 전담했다. 최지희, 최은희, 진미령, 엄앵란, 조미령 등 최고 스타들의 코디네이터이자 멘토로 활약했다. 노라의 견문과 창의성은 1959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미스코리아 오현주의 샤프롱으로 활약하면서 인기상, 포토제닉상, 스피치상, 의상상을 수상하게 했다. 이후 국격을 높여주는 퍼스트 레이디의 의상 제작도 그녀의 몫이었다. 한강에 띄운 돛단배 노라의 매장이 서울의 중심 명동에 진출했을 무렵, 그녀는 조용히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만난 짐 핀클이었다. 그는 당시 미군 소령으로 부산병원에서 부상병과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패션을 공부한 것은 후회할 정도로 환자들을 애틋하게 돌보았던 노라와 한 생명이라도 더 살려내고자 노력했던 미국 군인은 그렇게 만났다. 짐 핀클은 10년 후 중령이 되어 한국에 부임하고 노라를 찾아와 청혼한다. 노라는 남편을 따라 1965년 하와이에 정착했다. 다시금 미국으로 간 노라는 하와이에서 쇼룸을 구하고 매장을 열었다. 그녀는 방송에서 패션쇼를 하고 미스하와이 선발대회 심사위원과 하와이대 특별 강사로 초빙됐다. 16년 만에 다시 시작한 미국 생활에서 노라는 빠르게 인정받으며 성공했다. 남편과 하와이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으니 조국과 가족은 그녀의 마음을 놓아 주지 않았다. 결국 노라는 1966년에 결혼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의 대중문화는 급속히 발달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 미국과 유럽에서 가수로 활동하다 귀국한 윤복희에게 과감한 미니스커트를 입힌 것은 노라였다. 흰 칼라가 달린 검정색 미니원피스였다. 펄시스터즈에게는 섹시하면서 활동적인 판탈롱을 만들어 주었다. 미니스커트와 판탈롱은 여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잠깐 동안의 미국생활은 사업가로서의 그녀를 성장시켰다. 미국의 패션계는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노라에게는 기성복에 접근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었다. 많은 여성에게 옷을 맞춰 주면서 평균사이즈를 통계로 만들어 둔 자료였다. 노라의 기성복은 명동 미우만 백화점 매장에 전시됐고 출시 첫 날 매진됐다. 동시에 국산 원단을 향한 그녀의 집념 또한 거세어졌다. 1973년에 노라는 국산 고급 실크를 개발했다. 실크의 염색 과정에는 물에 씻어내는 작업이 필수인데, 당시에는 시스템이 미비했다. 노라는 한강에 돛단배를 띄우고 실크 원단을 매달아 배가 움직이면서 실크가 물에 씻기도록 했다. 1973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아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 박람회)에서 한국 패션사상 최초로 2만 달러 수출을 달성한다. 같은 해에 노라의 실크 드레스는 미국 뉴욕 삭스 백화점에 진출했다. 다음 해인 197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뉴욕에서 바이어 대상 패션쇼를 열었다. 뉴욕 맨하튼 플라자 호텔에서 ‘노라노 실크 패션쇼’가 개최된 것이다. 노라의 미국 시장 진출은 급물살을 탔다. 1979년이 되자 뉴욕 7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쇼룸을 열었고, 뉴욕 최고급 백화점인 메이시 백화점 1층 쇼윈도가 노라노 제품으로 도배됐다. 우아한 꽃, 묵직한 씨앗 노라 노의 인생은 문주란(文珠蘭)처럼 품위 있고 묵직하고 부력이 크다. 문주란은 희고 우아하고 그윽한 향이 나는 꽃을 피우는데, 모든 꽃이 한 꽃대에 모여서 핀다. 꽃이 지면 씨앗이 들어있는 씨방이 부풀기 시작하는데 꽃대가 버틸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오른다. 20여 개의 씨방 전부가 호두알 만하게 커지는 것이다. 꽃대가 쓰러지면 무거운 씨앗들은 경사진 모래사장을 굴러 바다로 들어간다. 문주란 씨앗은 무겁지만 희한하게 물에 잘 뜬다. 그래서 거센 바다의 힘을 빌려 남쪽의 육지에서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까지 온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근처의 토끼섬은 문주란 일색이다. 올해 96세인 노라는 여전히 꼿꼿하고 규칙적으로 일하는 현역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철없는 건달’이라고 부른다. 분노는 그녀를 성장시켰고 철없음은 그녀를 안주하게 두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은 옹골차고 무겁지만 변화의 물결에 자신을 둥둥 띄울 수 있는 ‘철없음’을 지녔다. 100세를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도 바다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문주란이다. 참고문헌 - 최효안,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 마음산책, 2017. - 노라노, 『노라 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황금나침반, 2007.
184호
최문형
2023-09-22 13:46
-
1분이 채 안 됐던 지진 … 그러나 계속되는 역사의 여진
1923년 9월 1일 토요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神奈川) 서부를 진원으로 하는 규모(magnitude) 7.9의 지진이 일본 수도권과 그 주변 지역을 40∼50초 정도 뒤흔들었다. 이른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이하 간토대지진)의 발생이다. 5개 현에서 당대 최고 진도(intensity)를 기록한 극심한 요동은 일단 멎었지만, 약 3분 후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규모 7.1∼7.6의 여진이 5차례 이상 이어졌다. 이로 인해 10만 채가 넘는 가옥이 무너지고 산간부에서는 토사 재해, 연안부에서는 쓰나미 피해가 초래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도시 지역의 대규모 화재였다.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던 제도(帝都) 도쿄는 장장 46시간 동안 이어진 화재로 시 면적의 약 44%가 소실됐다. 약 10만5천 명에 이르는 전체 사망자·행방불명자 가운데 9만여 명이 화재로 인해 희생됐고, 이 가운데 약 6만6천 명이 도쿄시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피해 총액은 당시 국가 예산의 4∼7배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토대지진이 불러온 가장 처참한 광경은 화마에 검게 그을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돼 무고한 사람을 거리낌없이 도륙하고 이를 은폐하면서 반성과죄의식조차 저버린 인간성의 말살 현장이었다. 그들은 간토대지진을 끝내 인재로 남기기로 선택했다. 지진은 끝이 아니라 군국주의라는 병리 현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강풍 타고 번진 불, 지옥을 만들다 왜 화재 피해가 그토록 컸을까? 점심 준비가 한창인 부엌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화재가 때마침 태풍의 여파로 불어닥친 강풍을 타고 시가지로 번졌다. 특히 스미다강(隅田川) 동쪽의 고토(江東) 지구는 거의 전역이 소실되고 최악의 비극을 연출하며 도쿄시 화재 사망자의 약 89%를 냈다. 해당 지구 혼조(本所)에 위치한 약 6만7천 제곱미터 면적의 육군 피복창 터에 피난민 4만여 명이 모여들었는데, 9월 1일 오후 4시경 사람과 가재도구가 뒤얽힌 그곳에 불꽃 회오리바람(旋風)이 휘몰아치면서 약 3만8천 명이 꼼짝없이 불에 타 죽는 흡사 ‘지옥’이 초래된 것이다. 당시 도쿄에는 근대적인 수도망과 소방설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송수관과 송전 시설의 파괴로 무용지물이 됐고, 경시청 등 관계 당국의 화재 피해, 전신·전화의 불통, 교통망의 단절로 컨트롤 타워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정보 파악과 초동 대처의 지연까지 겹쳤다. 이로써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고토 지구는 며칠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지옥’에서의 생존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불에 타 죽은 사람 중에는 (9월) 4일경까지 살아남은 자가 꽤 있었습니다. 화상을 입고 걸으면서, 대개 의식불명 상태에서 그저 무의식적으로 걸으면서 물! 물! 하고 연호하다 쓰러져 1, 2시간 후에 숨을 거둔 자가 4일경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피복창 터 주변에는 아직 2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골든타임 내에 도움의 손길은 거의 닿지 않았다. 이처럼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진 데는 도쿄 시내 병원의 약 64%가 피해를 입어 병상 수가 3분의 1로 감소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호대가 늦게 도착한 것이 문제였다. 정보의 혼선으로 구호대 활동이 스미다강 서쪽 도심부에 집중돼 있었고, 의료 활동을 지원해야 할 군대와 경찰 인력은 ‘경비’와 ‘치안 유지’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라는 등 조선인을 겨냥한 유언비어가 항간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페이크 뉴스는 민중에게 ‘사실’로 인식되고 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 거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던 신문과 잡지 매체는 뜬소문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와 증가하는 판매 부수 앞에서 사실 확인 ‘따위’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활자화된 ‘정보’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입소문과 삼엄한 경비 현장을 통해 기정사실화돼 위력과 속력을 더해갔다. 지진 발생 4년 전의 3·1 운동을 비롯한 항일 투쟁으로 이미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조선인에게 ‘테러범’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지진 발생 당일 밤부터 하루 만에 도쿄시 전역에 일반인 자경단이 조직돼 거의 모든 청·장년 남성이 거리에 나와 통행인을 조사했다. 조선인이나 수상한 자가 발견되면 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지만, 공공연하게 목을 베거나 총을 쏘거나 칼 또는 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 간토 전역에서 수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살육의 축제’, 공범이 된 공권력 ‘살육의 축제’의 제물이 된 것은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중국인과 심지어는 일본인도 포함됐다. 9월 6일, 시코쿠(四) 지방 가가와현(香川) 출신의 매약(賣藥) 행상단이 지바현(千葉) 후쿠다무라(福田村)에서 조선인으로 오인돼 9명이 살해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사망자 중에는 2∼6세 어린이 3명과 임산부도 있었다. ‘선량한’ 마을 주민은 일본어 발음과 말투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사냥’을 서슴지 않았고, 타 지역에서는 오키나와현(沖), 아키타현(秋田), 미에현(三重) 출신의 일본인도 ‘일본어 테스트’에 탈락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결국, 일본 민중에게 ‘타자’는 누구든 ‘조선인’이었다. 그런데 민간인에 의한 대학살에는 공권력이라는 강력한 공범이 있었다. 군과 경찰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경비 태세를 강화하고 조선인을 ‘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살상에 직접 가담하거나 조장했다. 가메이도()에서는 혼란에 편승해 ‘눈엣가시’였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10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사법성의 조사서에 따르면, 지진 후 입건된 조선인 형사사건 가운데 죄목이 분명한 것은 절도, 횡령, 장물 운반 등 15건에 불과했다. 지진 후 3개월간 도쿄시에서만 약 4천400건의 절도 사건이 발생한 것에 비춰볼 때, 조선인을 폭도로 규정한 유언비어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망상과 허상을 통해 구현한 20세기의 ‘관민일치’와 ‘민관협력’은 ‘문명국’ 일본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야만이라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발족하자마자 대학살을 주재하게 된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山本兵衛) 내각은 9월 5일부터 돌연 자국의 ‘우국 행위’가 외국에 보도될 것을 우려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선인 박해와 유언비어의 유포를 막는 한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학살된 조선인의 시체를 태우거나 묻은 것이다. 또 공권력에 의한 살육에는 면죄부를 부여하고 조선인 학살의 모든 책임을 민중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민중은 나라를 구하기라도 한 듯 자신의 학살 가담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풍경은 낯이 익다. 간토대지진의 경험이 군국주의 일본의 원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군은 간토대지진을 호기로 여겼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축의 영향으로 위신이 저하돼 있었지만, 지진 직후 9월 2일에 내려진 계엄령(정확히는 긴급칙령을 통한 계엄령 제9조 및 제14조의 적용) 아래 구호와 복구 작업에 투입되면서 존재감이 커진 것이다. 최정예 고노에사단은 이 기회에 국민에게 국방 및 군사사상을 보급할 것을 요한다고 보고했고, 문학가 사토 하루오(佐藤春夫)는 이에 화답하듯 재해 상황에서의 ‘군인의 위력’을 칭송하기도 했다. 군은 간토대지진 때의 일사불란한 방재(防災) 활동을 조명하고 전 국민을 방공(防空) 활동에 참여시키며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섰고,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차례로 일으키며 ‘살육의 축제’를 벌였다. 관민 합세해 조선인 학살을 경험한 일본인에게 난징대학살과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일련의 도쿄대공습으로 간토대지진의 불바다가 재현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망자도 마찬가지로 약 10만5천 명이었다. 지진, 군국주의라는 병리 현상의 시작 간토대지진은 두말할 것 없이 자연재해였다.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 문명과 인명이 속절없이 무너져야 했다. 화상과 골절에 더해 감염병도 어김없이 습격해 이질,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등의 환자가 전년 같은 기간의 약 2배로 늘었다. 그러나 간토대지진은 자연재해만으로 남지 않았다. 카뮈는『페스트』(1947)에서 감염병과는 달리 “지진은 크게 한번 흔들리고 나서 사망자와 생존자의 수만 세면 끝”이라고 했지만, 간토대지진은 그의 통찰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간토대지진이 불러온 가장 처참한 광경은 화마에 검게 그을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돼 무고한 사람을 거리낌 없이 도륙하고 이를 은폐하면서 반성과 죄의식조차 저버린 인간성의 말살 현장이었다. 그들은 간토대지진을 끝내 인재로 남기기로 선택했다. 지진은 끝이 아니라 군국주의라는 병리 현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022년, 도쿄도 ‘인권부’는 도쿄도인권플라자에서 이야마 유키(飯山由貴)의 개인전 부대사업으로 예정됐던 영상작품「In-Mates」를 검열하고 상연과 토크 기획을 중지시켰다.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사실’이라 발언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사수정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 무장한 도쿄도 ‘인권부’의 반인권적 행태는 도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매년 9월 1일 구 육군 피복창 터의 도립 요코아미초공원에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열리는데, 그는 도지사 당선 이듬해인 2017년부터 추도문 송부를 거부하고 있다. ‘극우의 대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太, 1932∼2022) 전 도쿄도지사도 감행하지 못한 일이다. ‘X’(구 트위터)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일본 민중의 글이 넘쳐난다. 1분이 채 안 됐던 간토대지진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183호
이규원
2023-09-15 11:35
-
절대왕정 확립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 폭식의 결과는?
왕조 국가 시대에 기존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경우 그 까닭은 대개 구정권의 부패나 내부 갈등에 있었다. 기근이나 흉년으로 민심이 떠나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기도 한다. 15세기 중엽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년)에서 패배한 영국은 농민폭동으로 매일같이 끔찍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두고 요크가(家)와 랭커스터가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이름하여 장미전쟁(1455~1485년)이다. 요크가는 흰 장미를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랭커스터가는 빨간 장미를 가문의 문장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들 간의 전쟁을 장미전쟁이라 부른다. 요크가의 리처드 3세가 우위에 있을 때, 노르망디로 피신해 있던 랭커스터계의 헨리 튜더가 1485년 망명지로부터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30일 리처드군과 보즈워스 필드(Bosworth Field)에서 마주쳤다. 이 전투의 승패는 헨리의 모친과 재혼한 랭커셔의 영주 스탠리 경이 의붓아들인 헨리 튜더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정됐다. 리처드는 용감하게 맞섰으나 결국 전사하고 그가 전투 중에 쓰고 있던 왕관은 관목 숲속에 떨어졌다. 이를 찾아내 스탠리가 직접 헨리의 머리에 얹어주면서 장미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가 헨리 7세(1457~1509년)로 신생 튜더왕조 최초의 왕으로 즉위했다. 헨리 8세는 이 외래 식물이 너무 맛있어 한 자리에서 스무 개를 먹었다. 그는 고구마에 최음 성분이 있다고 믿어 늘 곁에 두고 자주 먹었다고 한다. 이후 고구마는 후대 왕들에게도 정력의 비결로 사랑받으며 영국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중앙집권체제 강화, 결혼은 여섯 번 권력의 정점에 선 지도자의 유형을 무인형과 문인형으로 구별하다면, 헨리 7세는 무사 기질의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중세의 왕들처럼 신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자리를 함께하며 전투에서 앞장서는 용감한 기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신하들과 멀리 떨어진 신비로운 존재로서의 전제군주였다. 한편으로는 재물에 욕심이 많았고 따라서 귀족들로부터 재화를 긁어모을 정도로 축재에 관심이 큰 탐욕 군주였다. 헨리 8세(1491~1547년)는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했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18세되는 해였다. 그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1547)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1547년)이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성격적인 결함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종교개혁, 군주정치의 구현, 빈민과 실직자를 구제한 것 등은 치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해 왕세자가 됐다.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 영국 양국 간의 명예와 동맹을 위해 정략결혼을 재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세에 형수인 캐서린과 결혼해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결혼한 지 20년 만에 별거했다. 그리고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혼인 무효화를 허락하지 않아 로마 교황청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영국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1536년과 1539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스스로 영국교회인 성공회(聖公會)의 수장이 됐다. 영국 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했다. 그리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한 권리 침해이며 강요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파문시킨 교황의 조치에 대항했다. 이로써 영국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영국 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본격적인 영국의 종교개혁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애증의 변주가 심했던 르네상스적 인물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한 헨리 8세는 다혈질의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애증의 변주가 심해 상대를 불안하게 만든다. 캐서린과 앤, 두 명의 왕비를 처형하고 두 명의 왕비와는 이혼했으며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 시종과 공신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했다. 한편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그의 궁정은 화려하면서도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이며 작가이자 시인이었다. 그가 대관식 직후 부왕을 위해 작곡한 영국민요 Pastime with Good Company(The Kynges Ballade)는 영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자 주사위 선수였다.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청년 시절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신앙심이 투철했다. 일찍이 마틴 루터를 비판한 일곱 성사의 변론(Defence of the Seven Sacraments)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영국교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다. 1531년 헨리 8세는 빈민 구제를 위한 법령인 헨리 8세 칙령을 선포한다. 공식적인 명칭은 건장한 부랑인과 거지의 처벌을 위한 법률로 헨리 8세의 칙령 또는 헨리 구빈법이라 한다. 노동 불능의 노인이나 빈민의 구호 신청을 조사하고, 빈민과 걸인의 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관리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칙령은 빈민들에게는 지나친 통제를, 걸인이나 부랑자에게는 잔인한 처벌을 가하는 근거가 됐다. 1536년 헨리 8세는 다시 1536년 빈민 법령(The Statute of 1536)을 제정해 성공회의 각 교구 단위로 노동 불능의 빈민과 장애인들의 수를 파악해 이들을 구제하고 노동 가능한 자에게는 취업 지원을 하는 한편, 무차별 혜택과 생활비 지급은 금지하도록 했다. 중세 시대 영국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농업생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영아사망률이 그 어느 곳보다 높았다. 이런 영국에 감자보다 먼저 들어온 것이 고구마였다. 1492년 황금을 찾아 인도로 간다던 콜럼버스와 그의 탐험대가 대서양을 건너다 오늘날의 카리브해 일대의 섬에 당도해 원주민들이 식용으로 먹는 특이한 식물을 발견해서 스페인 궁정에 바치면서 고구마가 유럽인의 사랑을 받는 외래식품이 됐다. 영국에 유입된 시기는 헨리 8세가 왕이 된 1509년 전후로 보인다. 그는 이 외래 식물이 너무 맛있어 한 자리에서 스무 개를 먹었다고 한다. 헨리 8세는 고구마에 최음 성분이 있다고 믿어 늘 곁에 두고 자주 먹었다고 한다. 이후 고구마는 후대 왕들에게도 정력의 비결로 사랑받으며 영국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는 전형적인 영국 식사부터 이국적인 음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즐겼다. 구운 비버의 꼬리를 포함해 백조, 고래, 공작 요리를 좋아했으며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가리지 않고 고기는 다 좋아했다. 사냥을 무척 좋아했던 헨리 8세가 어느 날 윈저성 부근에서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게 됐다. 길을 찾다가 우연히 레딩에 이르게 된 헨리 8세는 대수도원장으로부터 ‘loin’ 요리로 식사대접을 받았다. 헨리 8세의 엄청난 식욕에 감탄한 수도원장은 “전하의 위대한 위장에 1,000점을 주고 싶사옵니다”라고 말했다가 불경죄로 타워성으로 끌려갔고, 헨리 8세는 맛있게 먹었던 그 소고기에 ‘Sir’ 작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등심이 영어로 ‘sirloin’이다. 고통 느낄 때마다 음식으로 위로받아 사실 헨리 8세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지 않았다. 건장한 체격에 활동적이었던 그는 무슨 음식이든 잘 먹었다. 문제는 양이었다. 구운 고기를 즐기고, 빵을 많이 먹고, 달콤한 후식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아온지라 극심한 스트레스로 그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힘들었다. 우울증과 통풍이 그를 괴롭혔다. 고통을 느낄 때마다 음식으로 위로를 받았다. 하루에 13끼를 먹는 날도 있었다. 만인의 찬탄을 받던 멋진 몸매는 나이가 들며 비대해지고 그럴수록 우울증은 심해졌다. 단 음식으로 아픔을 잊으려 했다. 말년에 이르러 몸집이 매우 비대해져 움직이려면 특별히 발명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1536년 마상 경기 도중 입은 다리 부상으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상처마저 곪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죽음이 앞당겨졌으며, 급기야 부왕의 제90회 생일날인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서거했다. 그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수도사들! 수도사들! 수도사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윈저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됐다. 그가 죽은 후 10년 이내에 그의 자식 세 명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들(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세 명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182호
연호탁
2023-09-08 11:13
-
물리학자에서 독일 연방총리로 … 세기의 지도자가 된 힘은?
“당은 혼자서 걷는 법을 배워야 하고, 앞으로는 헬무트 콜과 같은 백전노장 없이도 정치적 라이벌 과의 싸움을 헤쳐나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당은 사춘기를 맞은 아이처럼 집으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하고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게르트 랑구트 글, 이수연 외 옮김,『앙겔라 메르켈』(2005) 중에서 32세에 동독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 2021년 겨울, 군악대가 연주하는「넌 컬러필름을 잊었어」라는 동독 가수의 노래를 끝으로 송별행사의 여운을 남기며 밝은 얼굴로 퇴장하는 여걸이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세계적 지도자 앙겔라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 1954~ )이다. 큼직한 재킷에 활동적인 바지, 편한 단화와 화장기 없는 얼굴에 퍼지는 소녀의 미소로 통일독일을 이끌어 온 최초의 여성 총리다. 그는 4년 연속(2006~2009) 포보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올랐고, 2015년 타임즈가 뽑은 ‘올해의 인물’이었다. 통일 독일이 힘들 때 총리가 되어 16년(2005~2021)간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가꾼 그는, 지지율 80%라는 국민의 압도적 사랑과 신뢰를 뒤로 하고 홀가분하게 자리를 떠났다. 조용하게 보이지만 힘이 넘치는 그의 리더십은 연방독일이 국내외의시련과 문제를헤치고 나가는 데 동력이 됐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그를 서슴지 않고 ‘무티(엄마)’라고 부른다. 냉철한 판단력과 간결한 말을 즐겨 쓰지만 어떤 이견도 다 소화해내는 그의 식물적인 피토크롬 근성은 깨끗하고 강한 독일을 키워냈다. 그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는 서독 함부르크 출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인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한창 빠져나오던 시절, 카스너 목사는 동독의 복음화를 위해 부인과 함께 동독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2녀 1남을 두었는데 장녀가 앙겔라다. 1949년 독일은 분단되고 앙겔라가 7세가 되던 1961년에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됐다. 이전에는 앙겔라가 서독의 사촌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장벽 설치 후에는 소포만이 허용됐다. 앙겔라는 서독으로부터 책과 청바지와 파카 등 자유시장경제의 라이프스타일을 소포로 받았다. 공산주의 동독 정권은 교회를 박해했고 아버지 카스너 목사는 ‘사회주의 안의 교회’를 결의하며 체제에 순응했다. 아버지는 동독 내에서 종교계 유력인사였다. 탬플린에서 신학교 설립 임무를 맡았으며 고아원을 겸한 장애우 학교를 운영했다. 그 덕분에 자녀들은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헤를린트 카스너는 서독에서 영어와 라틴어 교사였으나 동독 이주 후에는 목사의 아내여서 일할 수 없게 됐다. 그녀는 삼남매를 유치원에 보내지 않고 돌보고 가르쳤다. 아이들의 모든 일상을 소통하며 감정적 의지처가 되어 주었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강조했다. 학창 시절 앙겔라는 근면하고 신중한 우등생이었다. 앙겔라는 고등학생 시절 자유독일청년단 단원이 되어 활동했다. 앙겔라는 이성과 자제심이 돋보이는 학생이었다. 체육시간에 다이빙을 해야 했는데, 그는 다이빙대 위에 45분 동안이나 서 있었다. 수업시간이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결심을 했고 다이빙에 성공했다. 1973년에는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진학했다. 평소 제일 낮은 점수를 받은 물리학을 선택해 도전했는데 졸업시험에서 1등을 했다. 석사학위 취득 후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32세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정치활동에 나선 것은 35세(1989)에 민주약진(Demokratischer Aufbruch, DA)에 가입하고 대변인이 되면서부터다. 피토크롬 리더십과 인권에 대한 순정 동독에서 개신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베를린 연구소에서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던 조용하고 침착한 여성학자가 어떻게 연방독일의 총리가 되어 격동의 21세기를 헤쳐 나가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독일 통일 31주년 기념식 연설 속에 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도전에 대한 해답을 찾고 우리의 미래를 구체화하는 것은 이제 다음 정부의 몫이다.” 메르켈 총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왔고 총리가 됐으며, 총리직을 수행했는지 알 수 있는 간명한 발언이다. 그는 도전을 정확히 인지했고 과학자의 시각으로 그것을 분석했다. 분석결과는 해답으로 도출된다. 그렇게 그는 한걸음 씩 앞으로 나아갔다. 결과는 그의 재임 기간 중 나타난 수치가 입증한다. 경제성장률의 가파른 상승과 실업률의 급격한 감소다. 도전은 환경으로부터 온다. 생명체가 살아간다는 것은 외부의 도전에 대응하는 시시각각의 결단이다. 조용하고 강인한 식물에는 피토크롬 단백질이 내장되어 있는데 식물의 생존에 필수 장치이고 요소다. 앙겔라 메르켈은 이 피토크롬 단백질을 가졌다. 피토크롬은 자연환경 중 식물에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햇빛에 민감하게 반응해 식물의 생존을 도모한다. 피토크롬은 빛을 흡수할 때 일어나는 분자 내 변화를 세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효소의 활성화와 효소 생합성 유도, 색소 합성, 포자와 종자의 발아 촉진, 꽃눈 분화의 촉진과 억제 등을 관장한다. 앙겔라도 그랬다. 그는 국제환경에 민감하게 대처했다. 재임 중인 2013년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방문해 희생자에게 사죄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여덟 차례나 방문해 나치 독일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식물적 본능으로 포용과 상생을 실현한 일도 많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이 발생했을 때, 그는 주고 또 주는 식물적 본능으로 100만 명의 난민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우리가 국경에서 거부한다면 독일은 더 이상 나의 조국이 아니다”라는 성명과 함께였다. 그렇게 인도주의 국가 독일의 힘을 보여 주었다. 인권과 인도주의에 대한 그의 순정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메르켈 총리는 홍콩과 소수민족 탄압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에 강력하게 반발해 왔다. 하지만 그의 피토크롬 단백질은 생존과 성장을 추구했다. 따라서 중국과의 경제협력은 강화를 거듭했다. 재임 중 13차례 중국을 방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4년 연속 독일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그는 퇴임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 “러시아의 침공은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이자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역사의 심각한 단절이다. 야만적인 침략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유럽연합과 미국, 나토가 수행하는 노력을 지지한다”는 요지였다. 사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전 총리는 친러파 인사로 불리기도 했다. 학창 시절 러시아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고 동독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을 정도로 러시아어 구사에 능숙하다. 인도주의 입장에서 러시아를 비난한 앙겔라지만 같은 이유로 그는 러시아에 정중하게 사과했다. 나치의 소련 침공 80주년을 맞아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전화를 했던 것이다. 과학자 무티(Mutti, 엄마)의 승리 햇빛의 양과 질에 따라 자유자재로 태세를 바꾸는 피토크롬의 위력은 국내 정치에서도 거침없이 발휘됐다. 그는 1989년 결성된 민주약진(DA)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대변인이 됐다. 1990년 민주 선거로 성립된 동독의 데 메지에르 정권에서도 정부 부대변인을 맡았으며, 모스크바에서의 회담 내내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민주약진은 기민당과 합쳤으며 12월에 앙겔라는 하원의원이 됐다. 1991년 1월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때 그는 ‘콜의 양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관으로서 그는 낙태와 양성평등 문제,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 보호법 개정을 실행했다. 1992년에는 기민당 부당수직에 재선됐고, 1994년에 환경부 장관이 되어 유엔 기후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베를린 협약을 이끌었다. 1998년 11월에는 기민당의 당수가 되어 2000년 4월부터 보수 정당인 기민당의 대표로 활동했다. 1999년 겨울 기민당의 암거래 헌금이 발각되자 앙겔라는 정치적 아버지인 헬무트 콜 전 총리와 미련 없이 헤어졌고, 2000년 비밀 헌금 문제로 기민당 볼프강 쇼이블레 대표가 물러나자 후임 대표로 취임했다. 메르켈 총리가 오랫동안 총리직을 유지한 것은 정치색이 전혀 다른 당과의 대연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과의 연정은 무늬만 연정이 아니고 내각의 중요한 자리를 사민당 사람들로 채운 실질상 연정이다. 의견이 다른 당과의 연정에는 길고 긴 토론과 협상의 시간이 따른다. 그는 2박 3일의 릴레이회의 동안 침묵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일에 집중하고 모두의 생각을 모아 그 결과만을 발표했다. 조용하게 보이지만 힘이 넘치는 그의 리더십은 연방독일이 국내외의 시련과 문제를 헤치고 나가는데 동력이 됐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그를 서슴지 않고 ‘무티(엄마)’라고 부른다. 냉철한 판단력과 간결한 말을 즐겨 쓰지만 어떤 이견도 다 소화해내는 그의 식물적인 피토크롬 근성은 깨끗하고 강한 독일을 키워냈다. 그는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의 시간이다.” 메르켈 총리는 식물의 핵심 단백질인 피토크롬으로 읽어내야 할 인물이다. 참고문헌 - 게르트 랑구트 지음, 이수연 외 옮김,『앙겔라 메르켈』, 이레, 2005. - 니콜 슐라이 지음, 서경홍 옮김,『앙겔라 메르켈』, 문학사상, 2006. - 마리옹 반 렌테르겜 지음, 김지현 옮김,『메르켈: 세계를 화해시킨 글로벌 무티』, 한길사, 2022. - 우르줄라 바이덴펠트 지음, 박종대 옮김,『앙겔라 메르켈: 독일을 바꾼 16년의 기록』, 사람의집, 2022.
180호
최문형
2023-08-25 13:03
-
천 개의 개념이 담긴 미래 철학의 도구상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1995)는 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가 학문적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에는 구조주의가 ‘단 하나의 과학적인 인문학 방법론’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언어(야꼽슨), 친족관계(레비스트로스), 자본주의(알튀세), 대중문화(바르트), 무의식(라깡)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학문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른바 ‘구조’를 발견하고 기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의 불변성과 안정성이라는 구조주의의 믿음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면서 등장한다. ‘구조는 언제·어떻게 생겨나고 또 사라지는가?’ 구조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 문제의식은 68혁명을 거치면서, 견고하던 권위주의 사회가 실은 극도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함축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더욱 증폭된다. 바로 이 시기에 질 들뢰즈는 대안적 정신분석가이자 실천적 활동가인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를 만난다. 두 사람은 모두 네 권의 책을 함께 썼는데,『안티 오이디푸스』(1972),『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1975),『천 개의 고원』(1980),『철학이란 무엇인가?』(1991)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안티 오이디푸스』와『천 개의 고원』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공통의 부제를 지닌 하나의 연작이다. 이 책은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에 대한 고찰이자 그것이 굳어 멈춰버린 지점들을 진단하고 다시 흐르게 하려는 시도다. 이는 무의식, 존재, 언어, 기호, 신체, 얼굴, 문학, 정치, 개체화, 음악, 전쟁, 국가, 공간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여정으로, 각 고원을 오를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개념들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자본주의와 분열증’: 흐름의 철학 이 연작은 현대 유럽철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 중 하나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1천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속에 존재·역사·무의식·정치·언어·신체·예술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담고 있다. 두 저작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아마도 ‘흐름’일 것이다. 흐름은 가변성과 유동성을 띠고 있어 여러 형식(코드)과 영역(영토)을 가로지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여러 종의 식물과 동물로 변신하며(코드상의 변화) 바다로, 대지로, 하늘로 퍼져나가는(영토상의 변화) 생명의 흐름. 지폐로, 디지털 정보로, 주식으로 바뀌면서(코드상의 변화) 지갑에서 은행을 거쳐 증권사로 이동하는(영토상의 변화) 가치의 흐름. 사실 우리는 코드와 영토라는 틀 안에서, 다시 말해 불변성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흐르지 않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일시적·잠정적으로만 그러하거나 우리의 지각이 그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예민하지 못할 때만 그러하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흐름을 관리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를 유형학적으로 구별한다. 예컨대, 전제군주의 이름 아래 흐름을 중앙집권적·위계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야만 유형에 속하는 데 반해,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증폭시켜 ‘자본의 자기 증식’에 귀속시키는 사회는 문명(자본주의) 유형에 속한다. ‘자본주의와 분열증’라는 부제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전자는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흐름을 인위적인 통제 아래 묶어두려는 편집증적 경향을 띠는 데 반해, 후자는 흐름을 탈중심적·탈위계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분열증적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에 이르러, 이 두 경향은 리좀(rhizome)과 수목의 대립으로 변주된다. 수목은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개의 큰 줄기로, 다시 하나의 큰 줄기에서 여러 개의 작은 줄기로 뻗어나간다. 여기서 하나의 줄기가 갖는 위상과 가치는 뿌리라는 중심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그 중심이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리좀은 중심 없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리좀의 특정 부분이 갖는 위상과 가치는 그것이 번져나가는 양상에 따라 달라지며, 중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부여한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대립적인 두 경향이 항상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는 하나의 정보에서 다른 하나의 정보로 자유롭게 나아가면서 리좀적으로 탐색한다. 하지만 그러한 탐색은 몇몇 플랫폼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 중심들에 의해 수목적으로 관리된다.『안티 오이디푸스』의 유형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력한 전제군주라도 통제할 수 없는 기술·정보·가치의 흐름은 항상 존재하며, 한때 혁명적이던 사상·문화·정치의 흐름이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수단이 돼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천 개의 고원』은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에 대한 고찰이자 그것이 굳어 멈춰버린 지점들을 진단하고 다시 흐르게 하려는 시도다. 이는 무의식(2고원), 존재(3고원), 언어(4고원), 기호(5고원), 신체(6고원), 얼굴(7고원), 문학(8고원), 정치(9고원), 개체화(10고원), 음악(11고원), 전쟁(12고원), 국가(13고원), 공간(14고원)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여정으로, 각 고원을 오를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개념들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고원들의 리좀적 구성,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책은 서론과 결론 사이에 열네 개의 고원을 담고 있지만, 결론에서 정점에 이르는 일반적인 책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서론은 책 전체의 형태를 시사하는 ‘리좀’이라는 방법론적인 장이고 결론은 몇몇 핵심 개념들에 대한 해설이며, 그 외의 모든 고원들은 상당한 독립성을 띤다. 특히 주목할 것은 많은 고원들이 저마다 독특한 서술방식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서론에서는 두 저자가 직접 저술 의도를 표명하지만, 2고원은 프로이트의 환자인 늑대 인간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연극적인 도입부로 시작해서 그의 사례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나아간다. 3고원에서는 챌린저 교수라는 주인공이 장황한 강연을 진행하다 몸이 액체로 변해 사라져버리는 소설적인 기법이 활용되고, 10고원은 ‘신학자의 회상’,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등 짧은 단편들의 연쇄로 이뤄져 있다. 일찍이『차이와 반복』(1968)의 머리말에서 들뢰즈는 연극과 영화 등을 참고해서 새로운 철학적 표현 수단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천 개의 고원』은 이를 위한 다채롭고 창의적인 시도들을 보여준다. 저자들이 말하듯이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어느 고원에서 출발해도 좋으며, 하나의 고원에서 다른 하나의 고원으로 나아가면서(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른 저작이나 그들이 언급하는 다른 철학자·예술가·과학자·언어학자·역사학자 등의 저작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산맥을 리좀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형이상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3고원의 존재론에서 출발해서 6고원의 신체론을 거쳐 10고원의 개체화론으로 나아갈 수 있고,『안티 오이디푸스』의 사회 유형학에 익숙한 독자라면 12고원의 전쟁론과 13고원의 국가론을 묶어서 함께 읽어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3고원과 10고원에 주목할 것을 권하고 싶은데, 이 책 전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고원인 만큼 여러 다른 고원들을 조망하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본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천 개의 고원』처럼 엄청난 분량에다 다방면의 지식을 담고 있는 저작을 번역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자체로 하나의 큰 성과로 간주해야 한다. 다만 이 책의 경우 여러 번역자들의 원고를 한 사람이 다듬은 것으로, 번역이 고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원문을 참고할 수 있는 독자라면 그렇게 할 것을 권하고 싶다. 함께 읽을 만한 책 들뢰즈는 철학사가·미학자·철학자로서, 가타리는 정신분석가·정치적 실천가·생태철학자로서 많은 책을 출판했고 대부분 국내에 번역돼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학술적 인용이 가능한 번역은 많지 않아 독자들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들뢰즈 사상의 정수를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모든 철학사 연구를 집약시킨 책이자 그것들을 뒤틀고 변형시켜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이상학으로 빚어낸 책이기도 하다. 여기서 들뢰즈는 당대의 물리학·생물학·정신분석·예술 등이 도달한 높이를 가늠하면서 그것들을 아우르는 생성의 형이상학을 제시하는데, 차이와 반복은 그 형이상학을 지탱하는 두 원리에 해당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첫 번째 저작이자『천 개의 고원』의 숨은 반쪽이라는 점에서,『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의 중요성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정신분석 비판에 국한되지 않는다. 푸코에 따르면, 이 책은 오히려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정신분석가들, 파시즘이라는 세 적을 겨냥한다. 여기서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파시즘만이 아니라 그런 파시즘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우리 안의 파시즘도 함께 일컫는다. 『디알로그』(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지음, 허희정 옮김, 동문선, 2021)는『안티 오이디푸스』와『천 개의 고원』 사이에 발표된 대담집으로, 두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철학사 연구, 가타리와의 만남, 영미문학,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의 솔직한 생각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리좀, 다양체, 명령어, 소수성, 전쟁 기계, 도주선, 되기 등 그의 주요 개념에 대한 간명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다. 들뢰즈의 사상에 처음 접근하는 독자를 위해서는『들뢰즈, 유동의 철학』(우노 구니이치 지음, 박철은 옮김, 그린비, 2022)을 권할 수 있다. 저자인 우노 구이니치는 들뢰즈의 제자이자 일본의 들뢰즈 수용을 주도한 인물로, 그의 사상이 전개되는 과정을 충실히 뒤따르면서 철학사적 영향 관계에 대한 간략한 지도를 제공한다. 어린 들뢰즈의 철학적 재능에 대한 일화나 대안적 정신분석가로서 가타리가 느꼈던 문제의식 등을 함께 담고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179호
성기현
2023-08-12 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