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질병과 세계사

1923년 9월 1일 토요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神奈川) 서부를 진원으로 하는 규모(magnitude) 7.9의 지진이 일본 수도권과 그 주변 지역을 40∼50초 정도 뒤흔들었다. 이른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이하 간토대지진)의 발생이다. 5개 현에서 당대 최고 진도(intensity)를 기록한 극심한 요동은 일단 멎었지만, 약 3분 후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규모 7.1∼7.6의 여진이 5차례 이상 이어졌다. 이로 인해 10만 채가 넘는 가옥이 무너지고 산간부에서는 토사 재해, 연안부에서는 쓰나미 피해가 초래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도쿄와 요코하마를 비롯한 도시 지역의 대규모 화재였다.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던 제도(帝都) 도쿄는 장장 46시간 동안 이어진 화재로 시 면적의 약 44%가 소실됐다. 약 10만5천 명에 이르는 전체 사망자·행방불명자 가운데 9만여 명이 화재로 인해 희생됐고, 이 가운데 약 6만6천 명이 도쿄시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피해 총액은 당시 국가 예산의 4∼7배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간토대지진이 불러온 가장 처참한 광경은 화마에 검게 그을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돼 무고한 사람을 거리낌없이 도륙하고 이를 은폐하면서 반성과죄의식조차 저버린인간성의 말살 현장이었다. 그들은 간토대지진을 끝내 인재로 남기기로 선택했다. 지진은 끝이 아니라 군국주의라는 병리 현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강풍 타고 번진 불, 지옥을 만들다왜 화재 피해가 그토록 컸을까? 점심 준비가 한창인 부엌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화재가 때마침 태풍의 여파로 불어닥친 강풍을 타고 시가지로 번졌다. 특히 스미다강(隅田川) 동쪽의 고토(江東) 지구는 거의 전역이 소실되고 최악의 비극을 연출하며 도쿄시 화재 사망자의 약 89%를 냈다. 해당 지구 혼조(本所)에 위치한 약 6만7천 제곱미터 면적의 육군 피복창 터에 피난민 4만여 명이 모여들었는데, 9월 1일 오후 4시경 사람과 가재도구가 뒤얽힌 그곳에 불꽃 회오리바람(旋風)이 휘몰아치면서 약 3만8천 명이 꼼짝없이 불에 타 죽는 흡사 ‘지옥’이 초래된 것이다. 당시 도쿄에는 근대적인 수도망과 소방설비가 갖춰져 있었지만, 송수관과 송전 시설의 파괴로 무용지물이 됐고, 경시청 등 관계 당국의 화재 피해, 전신·전화의 불통, 교통망의 단절로 컨트롤 타워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정보 파악과 초동 대처의 지연까지 겹쳤다. 이로써 극심한 피해를 입은 고토 지구는 며칠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지옥’에서의 생존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불에 타 죽은 사람 중에는 (9월) 4일경까지 살아남은 자가 꽤 있었습니다. 화상을 입고 걸으면서, 대개 의식불명 상태에서 그저 무의식적으로 걸으면서 물! 물! 하고 연호하다 쓰러져 1, 2시간 후에 숨을 거둔 자가 4일경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피복창 터 주변에는 아직 2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골든타임 내에 도움의 손길은 거의 닿지 않았다. 이처럼 의료 공백 사태가 벌어진 데는 도쿄 시내 병원의 약 64%가 피해를 입어 병상 수가 3분의 1로 감소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구호대가 늦게 도착한 것이 문제였다. 정보의 혼선으로 구호대 활동이 스미다강 서쪽 도심부에 집중돼 있었고, 의료 활동을 지원해야 할 군대와 경찰 인력은 ‘경비’와 ‘치안 유지’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라는 등 조선인을 겨냥한 유언비어가 항간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러한 페이크 뉴스는 민중에게 ‘사실’로 인식되고 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 거의 유일한 정보원이었던 신문과 잡지 매체는 뜬소문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와 증가하는 판매 부수 앞에서 사실 확인 ‘따위’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활자화된 ‘정보’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입소문과 삼엄한 경비 현장을 통해 기정사실화돼 위력과 속력을 더해갔다. 지진 발생 4년 전의 3·1 운동을 비롯한 항일 투쟁으로 이미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조선인에게 ‘테러범’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지진 발생 당일 밤부터 하루 만에 도쿄시 전역에 일반인 자경단이 조직돼 거의 모든 청·장년 남성이 거리에 나와 통행인을 조사했다. 조선인이나 수상한 자가 발견되면 폭행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지만, 공공연하게 목을 베거나 총을 쏘거나 칼 또는 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 간토 전역에서 수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살육의 축제’, 공범이 된 공권력‘살육의 축제’의 제물이 된 것은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중국인과 심지어는 일본인도 포함됐다. 9월 6일, 시코쿠(四) 지방 가가와현(香川) 출신의 매약(賣藥) 행상단이 지바현(千葉) 후쿠다무라(福田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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