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식물성의 사유로 읽어낸 역사 속의 여성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 다들 만류했어요. 왜 잘사는 미국에서 눌러 살지, 못사는 한국으로 돌아가나 의아해했죠. 곧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그러나 전 풍요로운 미국에서 나 혼자 잘사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이 못하는 공부를 미국까지 와서 했으니 어떤 형태로든 고국으로 돌아가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최효안,『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마음산책, 2017) 중에서 집을 떠난 노라1947년 여의도 공항에서 가족들과 작별하고 혼자 미국행 노스웨스트 항공 비행기를 타고 떠난 여성이 있었다. 20세의 이혼녀 노라 노, 노명자(1928~)다. 그 누구도 그녀의 미국 유학길을 찬성하지 않았다. 아버지만이 딸의 앞길을 응원했을 뿐! 방송인 아버지와 아나운서 어머니 사이에서 10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노명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일제 치하에서 태어난 노명자가 경기여고 졸업반 재학 중이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부모님은 딸이 정신대에 끌려 갈 것을 두려워해 급하게 결혼을 시켰다. 신랑은 7세 연상의 일본군 장교인 신응균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포병 대위로서 일본에서 근무 중이었다. 신혼부부는 도쿄 인근 포술훈련소 장교 사택에 살림을 차렸지만 신랑은 곧바로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오키나와 전선으로 차출된 것이다. 어린 새댁은 귀국해 황해도 해주의 시댁으로 갔다. 출산한 시어머니를 대신해 대가족의 살림을 떠맡았다. 19세의 노명자가 잠시 친정에서 쉬고 있을 무렵 이혼을 요구하는 시댁의 편지를 받았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알 수 없어 죽었으리라 추정되는 아들의 보상금이 며느리에게 돌아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처사였다. 1년 후 남편은 살아 돌아오지만 결국 그들은 이혼하고, 남편과 시댁에 충실했던 어린 새댁은 회한만 가득 품은 채 이혼녀로 전락했다. 회한은 ‘분노’로 변하고 소녀는 스무 살 ‘어른’이 됐다. 시댁과 세상의 비아냥과 냉대는 그녀가 다시 일어설 힘이 됐다. 노명자는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가 되어 미국행을 실행했다. 올해 96세인 노라는 여전히 꼿꼿하고규칙적으로 일하는 현역이다. 그는 자신을 ‘철없는 건달’이라고 부른다. 분노는 그녀를 성장시켰고 철없음은 그녀를 안주하게 두지 않았다. 그녀의 내면은 옹골차고 무겁지만 변화의 물결에 자신을 둥둥 띄울 수 있는 ‘철없음’을 지녔다. 100세를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도 바다로 뛰어들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문주란이다.바람과 파도에 몸을 싣고미국에 도착한 노라는 로스엔젤레스 프랑크웨건테크니컬칼리지에서 패션디자인 공부와 병행해 의류 공장에서 일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옷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기능적으로 우수한 실용성을 갖춰야 함을 깨달았다. 2년의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 조국의 사정은 힘들었다. 여순사건 등 좌우 이념 대립이 심했고 가정적으로는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그녀는 귀국길에 올랐다. 가족을 돌봐야 했고 조국을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미국 패션교육을 받은 자신이 꼭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1년 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노라는 평생에 단 한 번 크게 후회했다. 자원봉사를 하는 야전병원에서 무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패션 대신 의학을 공부했어야 했다는 마음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노라는 퇴계로 의상실을 다시 오픈하는데 주 고객은 미군을 대상으로 공연하는 연예인들과 각종 연극과 쇼에 출연하는 가수와 배우들, 그리고 한국은행 간부 부인들이었다. 전쟁 통에도 사람들의 삶은 지속되고 문화와 예술은 죽지 않는다. 패션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휴전 후 연극과 영화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은 노라를 찾았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패션을 공부한 그녀의 감각과 창의성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노라는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신극협의회)과 호흡을 맞췄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위해 어머니의 최고급 벨벳치마를 가지고 햄릿 의상을 만드는 열정을 보였다.의상실이 자리잡히자 노라의 공부열은 다시 타올랐다. 이제는 파리연수였다. 1년여 프랑스어 공부를 마친 그녀는 1956년에 집 두 채 값의 연수비용을 손에 쥐고 파리 아카데미 쥘리엥으로 향했다. 노라는 반년 간의 연수기간 동안 스페인, 이태리, 스위스 등 유럽 전역을 오가며 그들의 문화를 체험했다. 가을에 서울로 돌아온 29세의 노라는 배우고 경험한 것을 한국 패션계에 적용하기 위한 고민을 거듭하고, 그 첫 발걸음으로 옷감의 국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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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ich***
    시대의 문주란으로 피어란 노라의 승전보가 아이같이 철없는 나에게 달려오는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자아 성찰과 실현이 맞물린 삶이 승리의 깃발로 나부끼는 추석 연휴 6-5일차, 기고를 정리하신 작가님과 더불어 감사합니다. 칠순 넘긴 방송대 늦깎이 일학년이 받는 귀한 선물, 고맙습니다.
    2023-10-02 06:39:19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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