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현대 명저 106선 해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1995)는 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가 학문적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에는 구조주의가 ‘단 하나의 과학적인 인문학 방법론’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언어(야꼽슨), 친족관계(레비스트로스), 자본주의(알튀세), 대중문화(바르트), 무의식(라깡)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학문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른바 ‘구조’를 발견하고 기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의 불변성과 안정성이라는 구조주의의 믿음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면서 등장한다. ‘구조는 언제·어떻게 생겨나고 또 사라지는가?’ 구조의 발생과 소멸이라는 이 문제의식은 68혁명을 거치면서, 견고하던 권위주의 사회가 실은 극도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함축하고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더욱 증폭된다. 바로 이 시기에 질 들뢰즈는 대안적 정신분석가이자 실천적 활동가인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를 만난다. 두 사람은 모두 네 권의 책을 함께 썼는데,『안티 오이디푸스』(1972),『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1975),『천 개의 고원』(1980),『철학이란 무엇인가?』(1991)가 바로 그것이다. 그중『안티 오이디푸스』와『천 개의 고원』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공통의 부제를 지닌 하나의 연작이다. 이 책은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에 대한 고찰이자 그것이 굳어 멈춰버린 지점들을 진단하고 다시 흐르게 하려는 시도다. 이는 무의식, 존재, 언어, 기호, 신체, 얼굴, 문학, 정치, 개체화, 음악, 전쟁, 국가, 공간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여정으로, 각 고원을 오를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개념들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자본주의와 분열증’: 흐름의 철학이 연작은 현대 유럽철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 중 하나로, 한국어 번역본으로 1천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속에 존재·역사·무의식·정치·언어·신체·예술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담고 있다. 두 저작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아마도 ‘흐름’일 것이다. 흐름은 가변성과 유동성을 띠고 있어 여러 형식(코드)과 영역(영토)을 가로지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여러 종의 식물과 동물로 변신하며(코드상의 변화) 바다로, 대지로, 하늘로 퍼져나가는(영토상의 변화) 생명의 흐름. 지폐로, 디지털 정보로, 주식으로 바뀌면서(코드상의 변화) 지갑에서 은행을 거쳐 증권사로 이동하는(영토상의 변화) 가치의 흐름. 사실 우리는 코드와 영토라는 틀 안에서, 다시 말해 불변성과 안정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흐르지 않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일시적·잠정적으로만 그러하거나 우리의 지각이 그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예민하지 못할 때만 그러하다.『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흐름을 관리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를 유형학적으로 구별한다. 예컨대, 전제군주의 이름 아래 흐름을 중앙집권적·위계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야만 유형에 속하는 데 반해,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증폭시켜 ‘자본의 자기 증식’에 귀속시키는 사회는 문명(자본주의) 유형에 속한다. ‘자본주의와 분열증’라는 부제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전자는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흐름을 인위적인 통제 아래 묶어두려는 편집증적 경향을 띠는 데 반해, 후자는 흐름을 탈중심적·탈위계적으로 확산시키려는 분열증적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에 이르러, 이 두 경향은 리좀(rhizome)과 수목의 대립으로 변주된다. 수목은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개의 큰 줄기로, 다시 하나의 큰 줄기에서 여러 개의 작은 줄기로 뻗어나간다. 여기서 하나의 줄기가 갖는 위상과 가치는 뿌리라는 중심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그 중심이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리좀은 중심 없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리좀의 특정 부분이 갖는 위상과 가치는 그것이 번져나가는 양상에 따라 달라지며, 중심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부여한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대립적인 두 경향이 항상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는 하나의 정보에서 다른 하나의 정보로 자유롭게 나아가면서 리좀적으로 탐색한다. 하지만 그러한 탐색은 몇몇 플랫폼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 중심들에 의해 수목적으로 관리된다.『안티 오이디푸스』의 유형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력한 전제군주라도 통제할 수 없는 기술·정보·가치의 흐름은 항상 존재하며, 한때 혁명적이던 사상·문화·정치의 흐름이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수단이 돼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천 개의 고원』은 흐름의 가변성과 유동성에 대한 고찰이자 그것이 굳어 멈춰버린 지점들을 진단하고 다시 흐르게 하려는 시도다. 이는 무의식(2고원), 존재(3고원), 언어(4고원), 기호(5고원), 신체(6고원), 얼굴(7고원), 문학(8고원), 정치(9고원), 개체화(10고원), 음악(11고원), 전쟁(12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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