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 삶을 말하다⑤

아첨하지 않고, 붙좇지 않고,
휩쓸려가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에 절대 가담하지
않는 의지와 자성(自省)
그 속에서 싹트는 시야말로,
마땅히 있어야 할 시라고
믿습니다

 

 

광주의 참극, 고향의 기억과 겹치다
한국의 시인 김지하 씨가 정권비판을 담은 장편 시 『오적』을 발표하고 구속되어 1974년, 사형판결을 받습니다. 나는 도쿄 스키야바시(?寄屋橋) 공원에서 작가 김석범 씨와 일본의 문인들과 함께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제주도 4·3사건’(1948)으로 권력의 횡포를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으로서 그 폭거를 방치할 수는 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측근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바로 허물어졌습니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1980년 5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짓밟았던 것입니다.
나는 10대 중반,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해방 후에는 활동가들과 근교의 농촌을 돌며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궁상을 접했습니다. 인연 깊은 광주의 참극을 나는 바다를 사이에 둔 일본에서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군이 민중에게 총구를 겨누는 모습에 제주도에서 목격한 도민학살이 겹쳐졌습니다. 그 날 밤 쓴 시가 「바래지는 시간 속에서」입니다(김 시인은 사건을 제재로 담아낸 시집 『광주시편』을 3년 후에 출판했다. 편집자주)

기억도 못 할 만큼 계절을 먹어치우고 / 터져 나왔던 여름의 내가 없다. / 어김없이 거기엔 언제나처럼 없는 것이다. / 광주는 진달래로 타올라 우렁찬 피의 외침이다.

광주사건을 선동했다는 명분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정치가 김대중 씨의 구명운동에도 암암리에 관여했습니다. 1987년 한국은 민주화되었지만, 그때까지 일본은 독재정권을 계속해서 지원했습니다. 지금, 전쟁 중의 일본군 위안부나 징용공 문제로 외교관계가 응어리져 있지만, 민중의 입을 막은 정권을 지지했던 일본의 정치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사히신문> 2019년 8월 6일(화), 12회차
사진은 1998년 양친의 묘소를 찾은 시인의 모습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더라도 한 길을(曲がりくねっても一本道)’은 김 시인이 좋아하는 말이다.
양친의 무덤 앞에 목 놓아 울었다
일본으로 건너온 약 반세기 동안에, 고향 제주도는 달보다 먼 곳이었습니다.
오사카의 한국총영사관 당국자로부터 귀국 권유를 받은 적은 있었습니다. 광주사건(1980년)에 항의하는 시집 발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방일 준비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 대신에 서울에서 출판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관헌에게 도민이 학살당했던 ‘제주 4·3사건’을 살아남은 자로서 독재정권이 하라는 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영삼 정권하인 1996년에 서울문학자대회에 초대받았을 때는 ‘다음 방한 시에는 한국 국적으로 바꾸겠다’는 계약서를 영사관으로부터 요청받았습니다. 조선적이었던 나는 주최자 측의 노력으로 참가할 수 있었지만, 행선지는 서울로 한정되었습니다.
4·3사건의 진상규명에 착수했던 김대중 대통령 정권하에서 나는 조선국적인 채로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1949년 도일한 이래 처음으로 제주도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희생된 동지들에게 들 낯이 없어 마음이 무거웠지만, 조카딸이 “어서 오세요” 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안아준 것이 나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갈퀴덩굴이 무성한 안속에 봉분을 얹은 무덤 두 개가 나란히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40년이나 된 양친의 무덤입니다.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한 해 한 번은 성묘를 하고 싶어서, 나는 200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이 해 취임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4·3사건을 ‘국가권력의 잘못’이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공식사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적색폭동’이라 비난하는 보수계의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자기가 희생자 유족임을 밝히지 않고 있는 유가족들이 수많이 있다는 것도, 독재정권의 압정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북관계가 보수정권하에서 융화로부터 대립으로 전환되었듯이, 언제 되돌려질지 모르니까요. 한국사회 분단의 상처는 그만큼 깊은 것입니다.
―<아사히신문> 2019년 8월 7일(수), 13회차

시인의 사명
제주도 4·3사건, 한국전쟁, 자이니치 문제, 광주사건, 남과 북으로 나뉜 두 개의 조국. 내가 시의 제재로 삼아온 것은 사적인 정감 표출에 뛰어나게 무게를 두는 일본 시단과는 동떨어진, 권역 밖의 시였습니다.
지방에서 글을 쓰는 나에게도 각지에서 시집이 도착하는데, 평화헌법에 어울리지 않게 된 사회 실태에 생각을 기울이는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대단히 평온하게, 개인사에 관한 심정이나 자기 내면과의 대화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레이와의 새 시대가 열렸지만,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 등, 간과해온 사태가 그대로 이어지니 염려스러운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얼마나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냥 지나치거나 거저 보내버리고만 있는 사항들에 생각을 작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아첨하지 않고, 붙좇지 않고, 휩쓸려가지 않으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에 절대 가담하지 않는 의지와 자성(自省). 그 속에서 싹트는 시야말로, 마땅히 있어야 할 시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전사건’이 있었던 후쿠시마 출신이며 지난 8년 동일본 대지진을 제재로 시를 써온 와고 료이치(和合亮一) 씨에게 강한 공감과 시적 연대를 느낍니다.
나는 다카미준 상(高見順賞) 수상식 때문에 도쿄로 향하는 신칸센 안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만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재난과 원전 피해를 제재로 한 연작시를 썼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 바람에 휘청이는 발버둥을 보았습니다. / 신들이 숨기고 온 하늘 밖의 불을 / 편리물로 대신한 인지(人智)의 교만을, / 대낮을 무색케 해온 불야성의 / 언제 다할지 모르는 허식의 낭비를, / 저 문명의 두려움 모르는 퇴폐를.
―「밤의 깊이를 함께」 중에서

(김 시인은 2018년, 지진 후에 쓴 작품을 모아 시집 『背中の地圖』에 수록했다. 편집자주) 작년 2월에 심부전으로 입원하여 인생도 이것으로 끝나는구나 싶어 허둥지둥 정리했습니다. 혼자 발버둥질 쳐서라도 원전 문제는 계속 신경 써야 한다고, 핵무기 문제와도 관련지어 마음먹었습니다.
―<아사히신문> 2019년 8월 8일(목), 14회차

그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과거도
조국의 분단으로 흘린 눈물도 말라 버릴 만큼 세월이 지났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나서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나라로 귀일(歸一)한 바가 없습니다. 애오라지 남북교류만이라도 이루어지고 삼팔선을 넘어 사람들이 오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재일동포는 고국의 동포보다 먼저 민족융화를 도모해온 존재이기도 합니다. 부모형제나 친척 간에도 남북 어느 쪽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를 드러내고 말다툼을 하곤 했지만 그래도 ‘한 곳’을 함께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상과 신조가 달라도 관혼상제의 자리를 같이했고 함께 술을 나눠 왔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남북교류’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북을 한 시야에 거두어 볼 수 있는 자이니치는 고국의 동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먼저 알기도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점을 넓힐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남북 간에 다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서는 안 됩니다. 일본인 여러분도 거기에 관여하지 않은 채, 일본이 변해 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도 나이 먹은 나이지만, 외딴 섬이나 산속 오지 작은 소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면서 시를 쓰고 싶었던 기억은 지금도 빛바래지 않습니다. 대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느긋느긋 지내면서 배우고 싶었지요.
젊을 때 폐쇄되었던 오사카 이쿠노의 조선소학교 재건에 참여했는데, 매일 아침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민족조직 활동으로 학교를 떠날 때 아이들이 얼마나 매달렸는지요. 그 나름대로 아깝기도 한 나의 과거라고 할까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인생은 짧고, 일생은 잡다하니 길다고.
―<아사히신문> 2019년 8월 9일(금), 15회차

 

김시종: 1929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49년에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어로 시작과 비평 활동을 했으며, 윤동주 등 식민지 조선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해 왔다. 오사카문학학교 특별 고문으로 있다. 잃어버린 계절』로 다카미준 상, 조선과 일본을 살다』로 오사라기지로 상을 수상했다.
구술정리: 나카노 아키라(中野晃)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번역: 김석희 경희대 연구교수·일문학


* '재일조선인 김시종, 삶을 말하다'는 이번 5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KNOU위클리에 게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김시종 선생님, 나카노 아키라 <아사히신문> 논설위원님, 번역을 맡아주신 김석희 교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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