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프리즘]

펜더믹 선언은 코로나19로 이제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험과 혐오는 코타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한국과 오랑시의 자원보건대가 만나야 한다.

 

 

결국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에 대해 펜더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흡사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희생시켰던 중세의 페스트를 연상하게 한다. 페스트는 카뮈에 의해 1940년대 알제리 오랑시에서 재현됐다. 
쥐들이 거리에서 죽었다. 뒤이어 사람들도 죽어 나갔다. 도지사는 담당공무원에게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자’고 주문한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단죄라고 설교했다. 페스트는 확산됐고 시민들은 계속 죽는다.
페스트는 모두에게 재앙이 아니었다. 술집들은 고급술이 페스트균을 죽인다고 광고를 했다. 수배 중이던 범죄자 코타르는 페스트로 인해 “훨씬 지내기 좋아졌다”고 말했다. 배급물자 암거래에 손을 대어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뜻있는 시민들이 자원보건대를 만들었다. 리더인 의사 르외는 말한다.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어야 한다.” 시민들은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페스트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주목할 세 명의 인물이 있다. 페스트는 코타르에게 축복이었다. 페스트가 물러가자 오히려 당황한다. 코로나19도 누군가에겐 축복일지 모른다. 돈벌이의 도구가 되거나 혐오상품을 만들어 큰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지에서 온 랑베르! 오랑시에서 도피하려고 필사적이다. 그런 그가 점차 변한다. “여태껏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그는 혼자서만 행복하다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자원보건대의 일원이 됐다.  
파늘루 신부는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신의 재앙이라며 회개를 요구하던 그가 죄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에서 의문을 갖는다. ‘신이 과연 이 아이를 제물로 삼았을까?’ 그도 자원보건대와 한 몸이 된다. 그는 이제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쓴다.” 불행히도 그는 활동 중에 사망한다.
코로나19에서 초기의 랑베르와 파늘루 신부를 본다. 페스트로부터 혼자만 도망치려하거나 신앙심에 기대어 오독하거나! 수많은 코타르들도 발견한다. 혐오상품과 사재기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시민들은 이들의 노예가 된다.
이들이 랑베르나 파늘루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코로나19의 이익에 취한 한국의 코타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자원보건대의 비판과 활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원보건대를 만들 수 있을까? 자원보건대를 제안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다 희생당한 타루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선 ‘우리 모두가 페스트에 속해 있다’는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 주목할 것이 있다. 페스트가 사라지자 시민들은 축제를 벌이지만 르외는 이를 경계한다. 페스트균이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늘 페스트균이 있었다. 빨갱이, 차별, 혐오 등의 페스트는 우리 속에 살아 있다가 방심하는 순간 우리 곁에 출몰했다.
희망은 피어난다. 정치와 자본이 여전히 습관처럼 위험을 이용하려는 저편에서 자신에게 배당된 마스크를 양보하는 시민들, 대구로 몰려드는 자원봉사자들, 의사 르외들이 한국의 자원보건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펜더믹 선언은 코로나19로 이제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험과 혐오는 코타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한국과 오랑시의 자원보건대가 만나야 한다.


1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