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국으로 가는 옛길 ⑧

 조선 사신들의 최종 목적지는 연경(燕京), 바로 북경(北京)입니다. 북경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경제·사회·학술·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국제 외교의 목적지였습니다. 사신들은 외교 업무를 위해 머물러야 하는 옥하관(玉河館)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사행단의 공식 숙소 옥하관에 들다북경의 ‘조선관’을 대체로 회동관 혹은 사역회동관(四譯會同館)이라고 했지만, ‘옥하관’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의로 일대에 복개된 옥하중교(玉河中橋)를 중심으로 동서 방향 골목을 동교민항(東郊民港)이라고 부릅니다. 옥하관은 동교민항의 옥하중교 서쪽에 위치하는 최고인민법원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명·청대의 조선 사절단 숙소로 활용되던 옥하관은 1693년 러시아인들에 의해 관소를 선점당하면서 후기에는 점차 인근의 사찰 등 으로 밀려나 새로운 공간을 숙소로 이용하게 됩니다. 특히 옥하남교에 있던 남관, 즉 옥하교관은 사행단의 숙소로 많이 활용되었는데, 사행이 끝나는 1895년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공식 숙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오늘날의 북경시공안국 일대로 파악됩니다.  1780년 연행했던 연암 박지원 일행은 서관에 머물렀습니다. 서관의 위치는 자금성 서남쪽 서단에 있었습니다.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첨운(瞻雲)’이라는 편액이 걸린 서단패루(西單牌樓) 서쪽 골목의 백묘(白廟) 왼쪽”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현재의 민족문화궁 뒤쪽 경기호동(京畿胡同) 일대입니다.  서단사거리의 ‘첨운패루’는 인근 공원에 새롭게 조성하여 세워져 있습니다. 240년 전 연암이 올려다보았을 ‘첨운’의 두 글자가 선명합니다. 옛 흔적이 사라진 역사의 현장에서 어쩌면 E.H. 카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는 바로 이 콘크리트 ‘첨운패루’가 아닐까 합니다.  조선 사신들의 공식 외교업무는 사행단의 숙소인 옥하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청은 조선 사행의 입관(入關) 전부터 사신들이 자국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였습니다. 특히 문금(門禁) 제도라고 해서 삼사의 경우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옥하관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청 조정의 승낙 하에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정기 사절단인 동지사의 경우 대략 음력 12월 22일 전후에 입경하면, 다음 해 2월 초순까지 약 40~50일 정도 머물렀습니다.  조선 사신들의 상대는 청 ‘예부’조선 사신이 청 조정과 직접적으로 상대했던 관서는 예부(禮部)입니다. 오늘날 외교부인 셈입니다. 사행은 외교문서의 전달 및 답신 수령을 위해 예부와 긴밀하게 협조해야 했고, 예단의 납부를 위해서 황궁 안 체인각(體仁閣)을 부지런히 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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